자신을 키워준 중국과 자신이 다스려온 홍콩으로부터 동시에 불신을 얻게 된 정치인. 홍콩의 행정 수반인 캐리 람(林鄭月娥) 행정장관의 최근 처지다. 그리고 그를 이 같은 상황으로 몰아 넣은 것은 람 장관 본인 탓이 커 보인다.
시위대가 한창 세를 불려갔던 지난 5월까지만 해도 송환법에 대한 람 장관의 태도는 강경했다. 중국 정부 방침에 따라 조속히 송환법을 처리하는 동시에 시위대는 강경 진압하겠다는 것이었다. 지난 6월 9일 100만 명이 참가한 초대형 시위가 열리고 나서야 화들짝 놀라 송환법 추진 잠정 중단을 선언했으나, 이는 성난 홍콩 민심에 기름 붓는 꼴이 됐다. ‘잠정 중단’이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마지못해 한 발 물러서는 듯한 정치적 제스처로만 비쳐졌기 때문이다. 시위대는 순식 간에 200만명으로 불어났고, 람 장관은 결국 “시민들을 실망시키고 괴롭게 했다”며 고개를 숙여야 했다.
람 장관은 역대 홍콩의 행정장관들과 마찬가지로 친중파 엘리트 관료 출신이다. 홍콩대를 졸업한 뒤 영국 통치 하 홍콩정청에 입청했다. 특히 2014년 홍콩 민주화 혁명(우산혁명) 당시 1,000여명을 구속하는 등 시위대에 강경하게 대응하는 모습에 중국 당국이 차기 행정장관으로 낙점했다고 한다.
중국의 무력 개입 가능성이 점쳐졌던 18일 시위가 대체로 차분하게 마무리되며 홍콩 사태는 한 고비 넘긴 모양새다. 그러나 시위대 속 ‘람 장관 퇴진’ 구호는 여전히 쩌렁쩌렁하다. 그를 앞세워 홍콩 시위 사태를 주무르려 했던 중국 정부 마저 람 장관 경질을 검토하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그를 희생양 삼아 홍콩 사태를 수습하려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람 장관은 20일 기자회견을 열고 “사회 각계각층과 진심 어린 대화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사실상 시위대에 협상을 제안한 것이나 늦은 감이 역력하다.
조영빈 기자 peoplepeopl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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