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의 작가 웰스가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 이름붙인 1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 두 달여가 지난 1919년 1월부터 전후 평화체제를 모색하는 회의가 프랑스의 파리에서 열렸다. 경제학자 케인스는 영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이 회의에 참석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케인스는 다시금 재무부 공무원이 되었고, 그 와중에 양심적 병역거부를 했다. 케인스는 “평화조약의 조건을 적은 초안을 수정할 수 있는 희망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 케임브리지로 돌아가 ‘평화의 경제적 결과’(한국어판 2016년)란 제목의 책을 냈다. 1919년 11월이었다.
프랑스의 클레망소 총리를 “그에게 국가는 하나만을 사랑하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증오해야 하는 그런 대상”이라고 적을 정도로, 협상과정에서 정치적 이해관계만을 타산하는 당대의 지도자들을 실명으로 비판하는 내용이 ‘평화의 경제적 결과’의 앞부분이다. 후반부에서는 패전국 독일이 지불해야 하는 배상금을 “독일의 지급 능력 범위 안에서 책정”하고, “독일 내에 희망과 모험심이 다시 살아날 수 있도록” 해야 함을 제안한다. 그러나 1921년 결정된 독일이 물어야 할 배상금은 독일국민이 낸 세금을 20여년 모아야만 지불이 가능한 액수였다. 케인스는, “인간은 언제나 가만히 죽지 않는다”는 말로 이웃을 궁핍하게 하는 정책이,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줄 것이라 예견한다.
케인스가 그렸던 전후 평화경제는 패전국에 대한 징벌이 아닌 관용과 연민의 경제에 기반한 것이었다. 재정적 안정을 위해 연합국이 전쟁기간에 서로 진 부채를 탕감하자는 제안도 순 채권국이었던 부상하는 패권국가 미국의 관용을 필요로 하는 제안이었다. 전쟁을 겪은 유럽대륙의 국가들에게 외국에서 구매할 수 있는 신용을 제공하자는 제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케인스 스스로 공상적이지 않다고 강변했던 관용의 경제를 통한 유럽부흥계획은 당시에는 현실이 되지 못했다. 그의 통찰처럼, “인간은 스스로를 빈곤하게 만들고 서로를 빈곤하게 만들 방법을 고안해내고 개인적 행복보다 집단적 증오를 더 선호”하기 때문일 수 있다.
평화경제가 한반도를 배회할 즈음 참고서로 ‘평화의 경제적 결과’를 읽는다. 평화가 경제성장을 위한 토대이고, 경제발전이 평화를 공고화한다는 가설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케인스가 물었던 “어떤 평화”인가를 다시금 물어야 한다. 케인스가 목도했던 승전국이 패전국에게 “강요한” 평화의 먼 결과는 1930년대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이었다. ‘평화의 경제적 결과’는 정치적 이해관계가 지배하는 협상의 공간에서 경제에 순기능적 역할을 하는 평화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를 고민하게 한다. 대통령의 74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는, “평화로 번영을 이루는 평화경제”란 정의와 함께, “북한이 미사일을 쏘는데 무슨 평화경제냐”라는 세간의 질문을 언급하며 “그러나 우리는 보다 강력한 방위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란 자답이 나온다.
한반도 평화체제를 다룬 판문점선언 3항에 등장한 ‘군축’은 남북한에게 군사적 방법에 의한 안보라는 낡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강제할 수 있는 핵심 의제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남한은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재개와 첨단무기의 도입과 같은 군비증강으로, 북한은 단거리 미사일 발사실험과 평화경제에 대해 “삶은 소대가리”가 웃는다고 하는 막말의 폭탄으로 맞물린 한반도 안보딜레마가 재개되고 있다.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평화경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남북한의 국내적 차원에서 국방비의 축소가 복지비의 증가로 연결된다는 전환적 사고가 있어야 한다. 물리적 폭력에 기여하지 않는 경제관계의 구성을 의미하는 소극적 평화경제를 넘어 정의와 평화와 함께 가는 적극적 평화경제의 실현을 위해서는(J. Peterson, Building a Peace Economy?), 남북한 모두 국내적 차원에서 전쟁이 아니라 평화에 투자하는 자원배분의 방식을 만들어야 한다. 현재 남북한 모두 이 약속을 지키려 하지 않고 있다. 어떤 평화인가가 공유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생할 수 있는 비극의 전조다.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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