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그려 앉아 철창 밖을 응시하는 청년의 모습이 처연하다(맨 위 사진). 지친 동료는 그의 옆에 쓰러져 잠을 청하고 한쪽 바닥엔 식사로 제공된 통조림이 놓여 있다. 1943년 4월 21일 남서태평양 뉴기니 섬의 미군 감옥에 수감된 한인 포로는 생포 당시 일본군 군속 신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에 의해 적도의 섬으로 끌려와 혹사당하다 미군의 포로가 된 한인 청년의 눈빛은 주권을 상실한 조국의 현실만큼 서럽고 억울하다.
한국일보 ‘뷰엔(View&)’팀은 제74주년 광복절을 맞아 일제강점기 남서ㆍ중서 태평양 지역으로 강제 동원됐다 미군에 붙잡히거나 투항한 한인 포로들의 사진을 찾아 모았다. 2014년 국사편찬위원회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으로부터 수집, 정리한 2만5,000장의 사진 중 일부로 1943년부터 1945년 사이 미 해군이 촬영한 것들이다. 당시 사이판, 뉴기니, 마리아나 제도 등으로 끌려간 한인 노무자는 총 5,800여 명. 비행장 건설과 사탕수수 재배에 투입된 이들 중 60%가 굶어 죽거나 일본군의 총알받이 또는 자살폭탄 공격을 강요받아 희생됐다.
총 30여 장의 흑백 사진 속에서 한인 포로 대부분은 오랜 굶주림으로 인해 뼈가 앙상하게 드러날 정도로 말라 있다. 안도와 불안이 교차하는 이들의 눈빛은 미군이 건넨 통조림을 먹는 동안에도 주변을 경계하고 분위기를 살핀다. ‘남의 전쟁’에 동원돼 지옥 같은 고통을 경험한 이들로선 자신의 운명을 쥔 타국의 병사들 앞에서 초조함을 숨길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한인 포로들 중엔 10대 중반 정도의 앳된 얼굴도 눈에 띈다. 한인 노무자들이 일본군에 반란을 일으켰다 보복 학살당한 ‘밀리 환초 사건’의 생존자들이 미군 보트에 올라 밝게 웃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미군은 구출된 한인 노무자들이 깨끗한 옷을 지급받고 막사에서 지내는 사진을 설명하면서 이들이 저항한 대상을 ‘일본의 노예생활(Japanese slavery)’이라고 표현, 당시 일제가 저지른 반인륜적 만행을 간접적으로 증언했다.
미군에 협조적이면서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는 한인 노무자들은 미군의 집중 회유 대상이었다. 당시 미 해군은 한국인이 일본을 위한 전쟁에 참여할 이유가 없음을 강조하는 등 한국인의 일본군 이탈을 유도하는 내용의 전단을 다량 제작해 살포하기도 했다. 당시 미군 병사들을 교육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Korean Slaves(한인 노예들)’라는 제목의 자료에서는 여러 장의 사진과 함께 한국인들이 일본에 의해 강제 징집돼 왔으며 일본을 싫어하고 미군에 협조하길 원한다는 점 등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일본의 불법적이고 반인권적인 강제 동원은 일제강점기 내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1938년 국가총동원법 제정 직후 일제는 본토와 식민지, 점령지에서 모든 물자와 인력을 가리지 않고 동원해 침략전쟁에 투입했다. 한국인 또한 단순 노무자부터 군속, 군인, 근로정신대, 위안부까지 다양한 명분과 역할을 나눠 무차별로 동원했다. 일본군에 소속된 민간 노무자, 즉 ‘군속’이라는 이름으로 한반도를 비롯해 일본과 중국, 동남아시아, 중서ㆍ남서 태평양 제도까지 끌려간 인력만 총 15만여 명에 달했다.
군수공장이나 광산 등으로 끌려간 노무자들에 비해 최전선 군사시설 건설에 투입된 군속들은 군인만큼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중에서도 남서 및 중서 태평양 지역으로 동원된 이들의 희생이 가장 컸다. 2004년 활동을 시작해 2014년 폐지된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의 2010년 진상조사에 따르면 일본군은 이 지역에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한인 노무자들까지 군인이나 군속으로 신분을 바꾸고 총알받이 등으로 내몰았다. 특히 남서태평양의 주요 격전지였던 뉴기니 섬에선 강제 동원된 한국인의 90% 이상이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군의 포로를 비롯해 지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생존자 대다수가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현지에서 힘든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일본의 보복성 수출규제로 촉발된 한일 갈등이 확산일로를 걷는 가운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빛바랜 사진이 더욱 숙연하게 다가오는 광복절이다.
박서강 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김주영 기자 wil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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