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쉽게도 과학을 바라보는 관점은 아직도 유신 시대에 많이 머물러 있다. 부품과 소재는 지난 시절 ‘선택과 집중’의 간택을 받지 못했다. 이른바 ‘가성비’가 맞지 않아서였다. 과학이 경제의 수단으로 전락하면 ‘가성비’나 비용편익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이 틀을 깨지 않으면 앞으로도 제2, 제3의 불화수소가 우리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사진은 5일 오전 정부서울청사 브리핑룸에서 열린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 대책 브리핑’ 현장. 성윤모 산업통산자원부 장관, 유영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등이 참석했다. 이한호 기자

현존 최고의 물리학자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스티븐 와인버그는 그의 저서 ‘최종이론의 꿈’에서 현대과학은 민주주의 및 대위 음악과 함께 서구 사회가 자부심을 가질 만한 유산이라고 소개했다. 서구의 과학자가 아니더라도 현대과학이 그럴 자격이 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 유산을 지구 반대편에서 가장 잘 이어받은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인 출신 노벨 과학상 수상자는 모두 23명이다.

대학원 시절 고에너지 물리학을 공부하면서 교과서든 논문이든 일본 과학자의 이름이 심심찮게 등장해서 무척 놀랐던 기억이 난다. ‘클라인-니시나 공식’으로 유명한 니시나 요시오는 일본 현대물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인물로 20세기 초반 양자역학이 태동했던 유럽에서 연구했다. 코펜하겐에서는 양자역학의 태두였던 닐스 보어와 공동연구를 하기도 했다. 니시나는 일본으로 돌아간 뒤 유럽풍의 자유로운 학문 분위기로 일본에 최신의 양자역학을 소개했다. 그의 제자였던 유가와 히데키와 도모나가 신이치로는 각각 일본 노벨상 1, 2호의 주인공이 되었다. 중성미자 검출장치인 가미오칸데와 그 후신 슈퍼 가미오칸데는 계속해서 일본에 노벨상을 안겼다. 규모도 엄청날뿐더러 성능도 뛰어나서 전공자들에게는 감탄과 부러움의 대상이다. 일본에는 이미 여러 대의 입자가속기가 있다. 벨(Belle)이라는 입자검출장치는 70년대 고바야시와 마스카와의 이론을 2000년대에 검증해 이들에게 노벨상(2008년)을 안겼다. 적어도 이 분야에서 한일 격차를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싶을 정도이다.

내가 잘 모르는 반도체나 부품, 소재산업 분야도 비슷할 것이다. 유가와가 첫 노벨상(1949년)을 받기 훨씬 전에 이미 일본은 항공모함을 띄우고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던 나라이다. 확실히 일본은 서구의 과학 또는 과학기술 문명을 잘 배운 우등생임에 분명하다. 이를 바탕으로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을 이루었고 G7 국가모임의 유일한 아시아 회원이기도 하니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를 갈망했던 그들의 야망이 어느 정도 실현됐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일본이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가졌더라도 그것이 과거의 침략행위나 현재의 ‘갑질’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와인버그가 꼽은 서구의 또 다른 자랑거리인 민주주의를 기준으로 보자면 일본이 그리 우등생은 아닌 것 같다. 세습 정치인도 많고 변변한 정권교체의 경험도 거의 없다. 견제와 균형보다는 일당독주라는 말이 더 어울려 보인다. 국경없는기자회가 발표한 올해 언론자유지수는 67위로 41위인 우리보다 한참 아래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아시아 최고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지난 2016~2017년 촛불혁명은 세계사에서도 유래를 찾기 어렵다.

하지만 민주주의 자체가 우리를 온전히 지켜주지는 못한다. 민주주의 없는 과학이 일본이라는 괴물을 만들었다면 과학 없는 민주주의는 그런 괴물에게 어떤 시달림을 당할 수 있는지 이번 사태가 여실히 보여주었다. 일본이 100년 넘게 걸려 이룩한 과학기술의 성과를 우리가 단숨에 따라잡기는 어렵다. 우리에게도 시간이 걸리고 돈과 사람이 들어가야 하고 꾸준한 노력이 소요되는 일이다. 노벨상이 하루아침에 나오지 않듯이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소재를 국산화하는 데에도 적잖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제는 그 길이 피하거나 생략할 수 없는 필수선택이 돼 버렸다. 그러나 멀리 보면 지금의 고통을 견딜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다행히도 민주주의는 과학이 발달할 수 있는 훌륭한 토대이자 플랫폼이다. 그 역이 성립하지 않음은 지금의 일본이 증명하고 있다. 과학의 또 다른 이름은 끊임없는 권위에의 도전과 구체제의 전복이다. 민주주의와 궁합이 잘 맞는다. 이제는 우리가 성취한 민주주의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과학이 그 자체로 나래를 활짝 펼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 아쉽게도 과학을 바라보는 관점은 아직도 유신 시대에 많이 머물러 있다. 부품과 소재는 지난 시절 ‘선택과 집중’의 간택을 받지 못했다. 이른바 ‘가성비’가 맞지 않아서였다. 과학이 경제의 수단으로 전락하면 ‘가성비’나 비용편익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이 틀을 깨지 않으면 앞으로도 제2, 제3의 불화수소가 우리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과학 그 자체의 논리와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동북아의 냉전구조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불가피하게 게임의 룰과 참가자들의 역할이 재조정을 받을 수밖에 없다. 쇠락하는 ‘넘버2’가 무섭게 떠오르는 ‘넘버3’의 목전에 칼을 들이대고, ‘보스’는 다른 패거리의 ‘보스’와 결전을 벌이면서 줄서기를 강요하고 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일단 그에 따른 손익계산부터 정확해야 한다. 트럼프 미 대통령은 천부적인 사업 감각으로 계산을 한다지만 힘없는 우리는 증거와 데이터, 꼼꼼한 분석과 빈틈없는 시나리오 플래닝에 기댈 수밖에 없다. 데이터 과학이나 인공지능이 벤처기업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다.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도 이제는 과학이 사회를 움직이는 중요한 담론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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