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한일 경제 전쟁 터졌는데…일본기업 후원대회인 ‘용성전’, 올해 이어 향후에도 강행
한국기원 “바둑은 문화교류의 일환이다”며 “용성전 폐지를 논의한 바 없다”고 밝혀
용성전 고수 배경엔 후원금 중 한국기원에 주어지는 대회 주관료 때문이 아니냐는 시각도
국민정서는 탈(脫) 일본, 타 스포츠도 동참하고 나서는데…한국기원만 ‘나 홀로 행마’
지난 3월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에서 관계자와 프로기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2기 용성전’ 개막식이 열렸다. 한국기원 제공

한국기원이 일본 기업 후원으로 지난해부터 개최해 온 ‘용성전’에 대한 강행 의지를 밝히면서 논란도 불거질 조짐이다. 한국을 대상으로 한 일본의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우대국)’ 제외 선언과 더불어 양국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나온 행보여서 주목된다.

9일 한국기원에 따르면 현재 진행 중인 용성전은 한·일 양국간의 냉각된 기류와 관계없이 매년 지속될 전망이다. 한국기원 관계자는 최근 험악하게 굳어진 한·일 양국 관계와 관련, 용성전의 향후 계획을 묻는 질문에 “현재까지 기원 차원에서 용성전에 대한 향후 계획을 논의한 바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일본측에서 먼저 어떤 의사 표시를 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나서서 앞으로의 용성전 진행 여부를 언급할 필요는 없는 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일본측에서 먼저 후원 중단을 선언하기 전까지, 국내 용성전은 지속적으로 개최하겠다는 게 한국기원의 생각이다.

올해 3월 개막한 ‘제2기 용성전’은 현재 박정환(26) 9단, 김지석(30) 9단, 신진서(19) 9단, 박영훈(34) 9단 등의 4강전으로 압축됐다. ‘제2기 용성전’ 예선엔 일반조 154명, 시니어조 30명, 여자조 37명 등 총 221명이 참가했다.

국내 용성전은 일본바둑장기채널의 후원으로 지난해부터 시작됐다. “실력 높은 한국 기사들의 대국을 일본에 소개하고 싶다”는 게 국내 용성전 후원에 나선 일본바둑장기채널의 배경이다. 일본바둑장기채널은 한국 선수들의 용성전 대국 영상을 한국기원으로부터 넘겨 받아 현지 시청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용성전이 이처럼 양국의 문화 교류 분야 차원에서 이뤄지는 만큼, 바둑 분야는 대승적인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게 한국기원의 주장이다. 한국기원 관계자는 “오랫동안 국내 기업에서 개최해 온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우승상금 3억원)와 LG배 조선일보 기왕전(우승상금 3억원) 등도 ‘문화 교류’란 큰 틀내의 동일 선상에서 봐야 되지 않겠느냐”며 문제될 게 없다는 설명을 곁들였다. 이어 “지금까지 용성전에 대해 좋지 않게 언급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며 새삼스럽단 입장까지 덧붙였다.

지난 3월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에서 열렸던 ‘제2기 용성전’에 참가한 선수들이 예선전을 벌이고 있다. 한국기원 제공

용성전은 이번 ‘화이트리스트’ 사태와는 무관하단 태도와는 달리, 복잡한 속내 또한 털어놨다. 한국기원 관계자는 “지금 가뜩이나 바둑계가 어려운 데, 용성전마저 중단되는 일이 생기면 진짜 더 힘들어진다”고 토로했다. 현재 국내 종합기전은 용성전을 비롯해 KB국민은행바둑리그와 GS칼텍스배, KBS바둑왕전, 바둑TV배 마스터스 등으로 5개에 불과하다.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기전인 KBS바둑왕전(1981년 개막)도 방송국 사정상 폐지가 유력하다. 15개 기전으로 치러졌던 1990년대 중반, 국내 바둑계 상황에 비하면 위축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기원의 이런 입장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견해는 나온다. 우선, 일본에 대한 요즘 국민적인 정서를 감안하면 한국기원의 이런 ‘나 홀로 행마’에 공감대는 떨어진다. 현재 국내 정치와 경제는 물론이고 사회, 문화, 체육 등 각 분야에서 사실상 일본과의 국민적 대치 정황은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불매운동과 촛불시위 등을 비롯해 일본과의 실전 수위도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바둑이 포함된 체육 부문 또한 마찬가지다. 국내 남자 프로농구팀과 여자 배구팀 등의 경우엔 이번 ‘화이트리스트’ 사태를 계기로 잇따라 일본 전지훈련까지 전면 취소한 상태다. 이런 분위기는 남녀 배구 등 다른 스포츠 분야로 확산되는 추세다.

실제 당초 계획됐던 국제 대회에서 일본팀 배제 움직임도 포착됐다. 강릉시의 경우엔 이달 16~18일 강릉컬링센터에서 열릴 한·중·일 여자컬링 친선대회에서 일본팀을 초청하지 않기로 결정, 한국 3개팀과 중국 1개팀만으로 대회를 진행할 예정이다. 한국여자농구연맹(WKBL)은 이달 24~31일 강원도 속초체육관에서 열릴 ‘박신자컵 서머리그’에 일본팀 초청을 철회했다. 스포츠 분야에 포함됐지만 ‘바둑은 예외로 인정해야 되지 않겠느냐’며 용성전 사수 방침을 밝힌 한국기원의 포석은 난해하단 얘기다.

용성전의 대회 성격 또한 회의적이다. 한국 기업에서 후원 중인 세계대회엔 각국 선수들이 참가하지만 일본바둑장기채널에서 후원하는 용성전엔 국내 선수들만 참가하고 있다. 바둑 교류 목적까지 포함해 글로벌 선수들이 출전해 온 한국 기업 후원의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나 LG배 조선일보 기왕전 등을 용성전과 동등 비교 해야 되는 게 아니냔 한국기원의 논리에 설득력은 희박한 셈이다.

구라모토 겐지(왼쪽) 일본 바둑장기채널 사징이 지난 3월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에서 열렸던 ‘제2기 용성전’ 개막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한국기원 제공

이와 함께 지속적인 용성전 강행을 고수 중인 한국기원의 진짜 이면엔 또 다른 계산서가 뽑아져 있는 게 아니냔 시각도 흐른다. 국내 용성전의 총 후원 규모는 2,000만엔(한화 약 2억3,000만원)이다. 이 후원금은 우승상금 3,000만원과 준우승상금 1,500만원 이외에 한국기원에게 주어지는 대회 주관료(비공개) 등으로 사용된다. 주관료 명목으로 한국기원에게 돌아가는 수입 또한 적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가능하다.

프로바둑 기사들 사이에선 “용성전이 일본 기업 후원이긴 하지만 현재 축소된 국내 바둑계 상황을 고려하면 계속 유지됐으면 한다”는 솔직한 의견이 많지만 “한일 양국의 첨예한 대립 속에 국민적인 공감대를 얻기 위해선 다음 대회부터라도 용성전 유지 여부는 고려해야 한다”는 소신도 제기된다.

이에 대해 시민들의 시선은 따갑다. 바둑 애호가라고 밝힌 60대 초반의 서울시내 한 택시운전기사는 “솔직히 용성전이 일본 기업 후원 대회인줄은 몰랐다”면서도 “일본 때문에 나라가 이 지경이 된 마당에,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비굴하게 일본 돈으로 열리는 용성전 바둑대회를 계속해서 끌고 가겠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한국기원의 태도를 꼬집었다.

허재경 기자 rick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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