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 미술 ‘액션 페인팅’을 아시나요
가로 80cm, 세로 170cm 남짓한 도화지 앞에 섰다. 내 키보다 크다. 직업 화가들도 흰 캔버스가 두렵다는데, 미술에 소질이 없는 내가 그림을 그리다니.
하지만 이 작업은 스트레스가 아니다. 그 반대라고 해서 찾았다. 지난 2일 불금(불타는 금요일) 저녁, 서울 신촌의 한 복합문화공간에 기자를 포함해 7명의 수강생이 모였다. 모두 20대 후반 직장인, 모인 이유는 동일했다. “업무 스트레스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다”는 것. 캔버스에 물감을 떨어뜨리거나 흩뿌리는 액션 페인팅 수업이다.
기자는 신청 버튼을 누르기까지 여러 번 망설였다. 원하는 결과물이 나오지 않으면 되레 스트레스를 얻고 올 것 같아서다. 하지만 이 또한 즐기기 보다 잘해야 한다고 스스로 다그쳐온 강박관념의 산물이리라. 자신을 놓고 뿌리고 튀기며 완성한 그림을 보니, 스트레스와 추상화는 닮은 것도 같다.
◇감정 들여다보기 ‘나에게 몰입하는 시간’
강사가 나눠준 매뉴얼 첫 장엔 다양한 감정 키워드가 나열돼 있었다. ‘자신 있는’, ‘뿌듯한’, ‘신나는’부터 ‘혼란스러운’, ‘우울한’, ‘짜증나는’까지. 이 중 최근 느꼈던 감정 다섯 가지를 골랐다. 그 다음은 나에게 맞는 5~7개의 컬러 선택하기. 기자는 불안감을 나타내는 주황색, 순수함을 나타내는 흰색, 기쁨을 나타내는 노란색을 골랐다. 내 감정과 그 감정이 형성된 원인들을 세심하게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감정들을 나는 어떤 그림으로 표현하게 될까. 기대감이 커졌다.
길게 걸린 도화지 앞에 섰다. 그 뒤로 초록, 주황, 빨강, 파랑, 보라 등 십여 가지 물감과 붓, 주사기, 물총 등의 도구가 늘어져 있었다. 본 작업에 들어가기 전, 색감을 테스트하고 도구 사용 방법도 익혔다. 이를 ‘에스키스(esquisseㆍ초안이나 밑그림)’라 부른다. 정해진 표현 방식은 없다. 붓으로 찍기, 흩뿌리기, 물감을 듬뿍 묻혀 아래로 흘러내리게 두기, 물총에 물감을 넣고 분사하기 등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게 중요하다.
◇감정 분출하기 ‘잘 그리지 않아도 괜찮아’
직장인들은 기본적으로 자유롭지 않은 존재다. 자유롭게 표현하자 해도 겁부터 났다. 붓을 잡기도 전에 고민에 빠졌다. 혹여 실수라도 할까 흰 도화지에 선뜻 물감을 묻힐 수 없었다. 우선 티가 안 날 것 같은 흰색 물감부터 집어 들었다. 주사기에 물감을 주입하고 위에서 아래로 쏘았다. 처음이 어렵지 서너 번 하다 보니 익숙해졌다. 용기를 내 주황, 초록, 파랑 물감을 찍고 뿌렸다. 점차 마음이 가는 대로 작업이 가능해졌다.
그 때 갑자기 기자의 얼굴로 갈색 물감이 날아왔다. 물총을 사용하던 옆 사람이 방향 조절에 실패해 물감이 튄 것이다. 인상을 찡그리고도 남을 상황이었지만 웃어 넘겼다. 이 역시 액션 페인팅 예술의 일부라는 생각에.
경쾌한 인디 음악과 팝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물총을 쏘고 붓으로 점을 찍으며 움직이다 보니 스트레스도 날아갔다. 이날 함께 참가한 직장인 장서연(27)씨는 “회사에서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지만 여기서만큼은 그런 부담이 전혀 없다”며 “역동적으로 그림을 그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스트레스가 해소됐다”고 말했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다. 30분이 채 되기도 전에 완성한 사람, 50분을 꽉 채워 그린 사람도 있었다. 같은 재료와 도구를 사용했지만 전혀 다른 작품이 완성됐다. 우열은 없었다. 하나하나가 ‘느낌 있는’ 작품이었다.
◇감정 공유하기 ‘작품을 통한 소통’
“이직을 앞둔 복잡한 심경을 담고자 최대한 빽빽하게 그렸고요. 주황색으로 휴가가 끝나가는 아쉬움을 표현했어요.”
수강생들은 한 명씩 돌아가며 제작 의도를 설명했다. 작품을 통해 자연스레 자신의 감정을 공유했고, 금세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회사원 이현승(27)씨는 “친구들을 자주 만나긴 해도 진지한 대화를 나눌 시간은 많지 않다”며 “반면 액션 페인팅은 주제가 감정 표현이다 보니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도 속마음을 쉽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액션 페인팅의 스트레스 감소 효과는 다양한 연구를 통해 입증된 바 있다. 이 클래스 역시 올해 4~7월 정신과 전문의, 심리학 교수, 심리상담센터 원장 등 전문가들의 자문을 거쳐 기획됐다. ‘치유 미술’로 액션 페인팅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자리잡아가고 있다. 지난달 29일 수업이 처음 열린 뒤 2주 만에 참여자는 71명, 예약자는 100명(13일 기준)까지 늘어났다. 주 고객층은 2030 직장인이다.
◇놀다 보면 치유되는 ‘힐링 아트’
액션 페인팅에서는 미술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주사기, 물총도 훌륭한 작업 도구가 된다. 실내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뿌리고, 붓고, 칠하는 건 어디서도 해보지 못한 경험이다. 멋있게 그려야 한다는 부담은 시간이 갈수록 사라진다. 잘 그리든 못 그리든 그것마저 ‘개성’이라 생각하면, 어느새 작업을 즐기고 있는 내 모습을 볼 수 있다. 액션 페인팅 수업을 진행한 최현정 디디맨션 공동대표는 “액션 페인팅은 치유(healing) 미술로, 치료(therapy)에 비해 감정을 표현하는 활동을 강조한다”며 “심리적 문제를 겪는 이는 누구라도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액션 페인팅을 해 보니 미술은 생각보다 쉽고 가벼운 활동이었다. 스트레스 받는 날, 알록달록하게 풀어보는 건 어떨까. 꼭 수업이 아니라도, 흰 도화지를 펼치고 물감만 있으면 어디서든 가능하다. 막대기, 주걱 등 손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 작업 도구가 될 것이다.
권현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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