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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시선, 워코노미] 미 공군 ‘최악의 최선화’로 일본군 수송을 봉쇄하다

입력
2019.08.10 04:40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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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비스마르크해 전투 

※ 태평양전쟁에서 경제력이 5배 큰 미국과 대적한 일본의 패전은 당연한 결과로 보입니다. 하지만 미국과 베트남 전쟁처럼 경제력 비교가 의미를 잃는 전쟁도 분명히 있죠. 경제 그 이상을 통섭하며 인류사의 주요 전쟁을 살피려 합니다. 공학, 수학, 경영학을 깊이 공부했고 40년 넘게 전쟁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온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1943년 남태평양 비스마르크해에서 미군 폭격기 A-20이 육군 51사단 병력을 싣고 뉴기니로 이동 중인 일본군 수송선 다이에이마루를 공격한 뒤 급상승하고 있다. ⓒNational Archives
1943년 남태평양 비스마르크해에서 미군 폭격기 A-20이 육군 51사단 병력을 싣고 뉴기니로 이동 중인 일본군 수송선 다이에이마루를 공격한 뒤 급상승하고 있다. ⓒNational Archives

1943년 2월7일 밤, 일본 8함대 소속 구축함대는 일본 17군의 마지막 잔여 병력을 싣고 과달카날섬을 탈출했다. 이로써 약 6개월간 남태평양의 섬 과달카날을 두고 벌인 전투의 최종 승자는 미군이 되었다. 이는 태평양전쟁에서 미군이 일본군을 이긴 최초의 육상 전투였다. 그럼에도 일본 구축함대가 병력을 증원하러 왔다고 착각한 미군은 탈출하는 17군을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일본군의 세력은 여전히 강했다.

일본은 20사단, 41사단, 51사단의 3개 사단으로 구성된 18군을 뉴기니에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뉴기니를 점령한 후 오스트레일리아로 진격한다는 일본군의 계획은 1942년 6월 미드웨이해전 패배에도 불구하고 유지됐다. 1943년 1월부터 일본군 수송선단은 뉴브리튼의 라바울로부터 뉴기니의 여러 항구로 18군의 병력을 실어 날랐다. 구체적인 목적지는 뉴기니 북부의 웨와크, 북동부의 마당, 동부의 래이 등 세 곳이었다. 2월 말까지 20사단과 41사단 주력이 뉴기니에 도착했다. 이제 51사단 주력이 이동할 차례였다.

 ◇미군이 얻은 불완전한 정보 

미군은 뉴기니의 일본군 병력 강화를 모르지 않았다. 3개 전투비행전대와 5개 폭격비행전대로 구성된 미국 5공군은 오스트레일리아 방어를 위해 사령부를 브리스번에 두었다. 그 중 35전투비행전대, 49전투비행전대, 43폭격비행전대는 뉴기니의 모레스비 항구에 전진 배치되어 있었다. 5공군은 1943년 1월과 2월 뉴기니로 향하는 일본군 수송선단을 상대로 미미한 전과를 올리는 데 그쳤다. 100여 대 이상의 항공기로 총 416번을 출격했지만 수송선 2척을 격침한 게 전부였다. 이런 식의 순탄한 증원이 계속된다면 뉴기니를 일본군에게 잃지 말란 법이 없었다.

1943년 2월14일, 5공군의 정찰기는 라바울에 79척의 함선이 정박해있음을 발견했다. 그 중 45척이 수송선이었다. 2월22일, 정찰기는 라바울의 수송선 수가 59척으로 늘어났다고 보고했다. 또 다른 수송작전이 한참 준비 중이라는 분명한 징후였다. 연합군은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한 결과 3월 초 뉴기니로 병력 수송이 예정돼 있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이러한 정찰과 첩보로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우선 수송 시점을 정확하게 특정할 수 없었다. 이를테면 어느 암호문에서는 3월5일을, 다른 암호문에서는 3월12일을 뉴기니 도착 시각이라고 얘기했다. 서로 상충하기에 암호문 모두의 진위 여부를 확신하기가 어려웠다. 더 큰 문제는 목적지였다. 연합군이 해독한 암호문은 뉴기니의 웨와크, 마당, 래이를 모두 언급했다. 뉴기니로 간다는 사실을 알아도 그 중 어디를 향하는지를 모른다면 수송선단에 대한 공격 효율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떤 항로를 지킬 것인가 

일본군 수송선단을 반드시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했다. 바로 전투기와 폭격기를 골고루 나눠 세 개의 항로를 모두 지키는 방법이었다. 이 방법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즉 일본군 수송선단에 큰 피해를 입히기가 어려웠다. 전체 전력의 3분의 1만 공격에 투입되고 나머지 3분의 2는 허탕치기 때문이었다. 앞선 1, 2월에 일본군 수송선단에 대한 미국 5공군의 전과가 미미했던 이유가 바로 그랬다. 이제 전력을 분산하지 말고 하나로 집중해야 한다는 판단은 당연했다.

미국 5공군이 보기에 세 곳의 항구 중 웨와크의 가능성은 무시할 만했다.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수송이 이뤄진 데다가 제일 북쪽이라 뉴기니의 전선에 투입되는데 더 시간이 걸렸다. 또 웨와크에는 뉴기니에서 제일 큰 일본군 비행기지가 있었다. 즉 라바울에서 아예 북서 방면으로 항해해 웨와크로 향하는 수송선단을 공습하는 일은 여러모로 무리였다. 결과적으로 5공군이 노릴 수 있는 항로는 동서로 길게 뻗은 뉴브리튼의 북부해안선을 따라 내려오는 북부항로와 남부해안선을 따라 내려오는 남부항로의 두 가지였다.

라바울에서 마당까지의 북부항로는 거리가 약 700㎞, 라바울에서 래이까지의 남부항로는 900㎞ 이상이었다. 일본군 수송선단의 속도는 약 7노트, 즉 시속 13㎞ 정도였다. 이를 환산하면 하루에 약 300㎞씩 항해가 가능했다. 다시 말해 일본군이 북부항로를 택하면 2일, 남부항로를 택하면 3일 만에 뉴기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수송선단이 항해 중인 시간은 곧 미국 5공군이 공습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항구에 있는 선단을 공습하는 일은 주변 비행장의 호위 전투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더 오래 공습할 수 있는 남부항로를 노리는 게 미국 5공군 입장에서 수지가 맞았다.

비스마르크해 전투 그래픽=송정근 기자
비스마르크해 전투 그래픽=송정근 기자

 ◇크게 잘못될 일을 없애라 

다만 이는 일본군이 남부항로를 택했을 때만 성립할 수 있는 얘기였다. 5공군이 전 병력을 남부항로에 투입해 지키고 있는 동안 일본군이 북부항로를 항해한다면 최소한 하루는 큰 피해 없이 항해가 가능했다. 정찰기의 활동에 의해 북부항로의 수송선단을 첫날 발견해도 본격적인 공격은 둘째 날에나 가능했다. 즉 이 경우 5공군이 온전히 공격할 수 있는 시간은 하루밖에 되지 않았다.

반대의 상황도 벌어질 수 있었다. 5공군이 남부항로 대신 북부항로를 지키고 있을 때, 일본군이 북부항로로 항해한다면 이틀 동안 공습이 가능했다. 일본군이 북부항로 대신 남부항로를 택했다면 첫날은 공치고 둘째 날부터에나 공습할 수 있었다. 이 경우도 공습 가능 시간은 이틀이었다.

즉 5공군 입장에서 일본군의 선택과 무관하게 언제나 더 유리한 선택이 있지는 않았다. 5공군이 북부항로를 지키면 일본군이 어느 항로를 택하든 2일 간의 공습을 기대할 수 있었다. 반면, 5공군이 남부항로를 지키면 일본군의 선택에 따라 3일 혹은 1일을 공습할 수 있었다. 이렇게만 보면 어느 쪽이 더 낫다고 결론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허나 다른 관점을 취하면 선택은 의외로 쉬웠다. 상대가 어떤 선택을 할지에 신경 쓰지 말고 나한테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관리하는 관점이었다. 각 선택의 최악 상황 중 제일 나은 쪽을 택한다면 이미 각오한 최악 중 최선의 결과보다 나쁜 일이 벌어질 리는 없었다. 게다가 상대의 선택에 따라 그보다 나은 일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었다. 즉 ‘최악의 최선화’ 방침은 “크게 잘못될 일을 없애면서 긍정적인 서프라이즈만 남기라”는 이른바 ‘반취약성’의 관점과도 일맥상통했다.

최악의 최선화 관점에서 위 상황을 바라보면 남부항로보다는 북부항로를 지키는 게 더 나았다. 왜냐하면 남부항로는 잘못했다가는 겨우 하루밖에 공습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벌어질 수 있었다. 반면 북부항로를 택하면 최소 이틀의 공습은 확보할 수 있었다. 실제로 5공군은 남부항로를 버리고 북부항로를 택해 지켰다.

 ◇놀라운 행운도 함께한 대승 

2월28일 밤, 8척의 구축함과 8척의 수송선으로 구성된 일본군 수송선단이 라바울을 떠났다. 기무라 마사토미가 지휘하는 선단은 북부항로를 택했다. 때마침 열대성 호우가 뉴브리튼 일대를 덮었다. 덕분에 3월1일 오전까지 북부항로를 지키고 있던 연합군에게 탐지되지 않은 채 항해했다.

3월1일 오후 들면서 폭풍우가 그쳤다. 북부항로를 지키고 있던 폭격기 B-24 리버레이터가 드디어 오후 3시에 기무라의 선단을 발견했다. 5공군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남은 하루 동안 최대한 공격하는 일이었다. 본격적인 공습은 3월2일 오전부터 시작되었다. 1척의 수송선을 침몰시키고 2척의 수송선에 피해를 입혔다. 여기까지는 일본군도 예상할 수 있는 피해였다. 남은 일본군 선단이 마당으로 들어가는 일을 5공군이 막을 방법은 없는 듯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몇 시간만 더 가면 마당에 도달할 수 있는 수송선단이 갑자기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5공군에게는 그저 반가운 놀라움이었다. 기무라의 목적지는 처음부터 래이였다. 다만 남쪽항로를 택하지 않고 북쪽항로를 택했을 따름이었다. 북부항로를 통해 래이를 목표로 하다 보니 직접 남부항로를 택했을 때보다 항해시간이 조금 더 늘어났다. 결과적으로 5공군은 애초에 생각했던 이틀 동안 마음껏 수송선단을 공격했다. 기무라는 8척의 수송선을 모두 잃고 구축함도 4척을 잃었다. 최악의 최선화를 택한 5공군의 완벽한 승리였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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