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 징계·기소 등 피해갈 의도… “공범들이 피해자 코스프레” 비판
“부적절했다” “내키지 않았다” “후회스럽다” “부끄럽다.” 이른바 ‘사법농단’ 재판 증언대에 선 법관들이 한결같이 되뇌는 말들이다. 일부는 사법농단 의혹 문건을 작성한 것에 대해 “타성에 젖어 부적절한 지시에 따랐다” “작성한 문장 하나하나가 후회스럽다” 거나 “행정처가 오만하게 타성에 젖어 있었다”면서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현직 법관들의 뒤늦은 반성에 “10년차 이상 엘리트 법관들이 부당한 지시인 것을 알면서도 왜 그대로 따랐나”라는 질타가 쏟아지고 있다.
특히 고위 엘리트법관들은 “불러주는 대로 받아썼다”면서 뒤늦은 후회를 하지만 책임 미루기에 급급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재판에서 심의관의 업무를 ‘일종의 납품’이라고 표현했던 정다주 부장판사는 최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판에서 “(임 전 차장이) 불러준 대로 기재했다”는 답변을 반복했다. “말단으로서 지시에 따라 작업했을 뿐”이라고 강조했던 시진국 부장판사 또한 최근 “의문을 제기해도 임 전 차장은 본인의 표현이 담기기를 원했다”면서 “내키지 않아 ‘뭉개고’ 있던 보고서가 많았다”고 임 전 차장에게 책임을 돌렸다. 김민수 부장판사는 “심의관들이 자발적으로 아이디어를 낼 정도로 여유롭지 않다”고 했다.
고위 법관들이 책임을 떠넘기기에 급급한 것은 추가 징계ㆍ기소 등 불이익을 피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게 대체적 분석이다. 직권남용 법리상 의무 없는 일을 강요당한 피해자임을 부각시키는 재판 전략이라는 것이다. 재경지법 한 판사는 “진짜 피해자는 재판거래 의혹 피해자들, 사찰당한 법관들인데 사실상의 공범들이 이제 와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면서 “승진 코스에서 탈락하기 싫어 부당한 지시를 그대로 따른 고위 법관들이 할 소린 아니다”고 비판했다.
“모른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식의 두루뭉실한 답변을 두고는 무책임하다는 지적과 함께 사법방해 소지까지 거론된다. “재판개입이 있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굉장한 오해다” “실제 실행으론 이어지지 않았다”는 등의 회피성 발언도 마찬가지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일부 법관은 검찰에서 진술한 내용 조차 번복하는 등 재판에서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사법 본연의 업무를 방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법조계에서는 법관들의 ‘책임 미루기’ 전략이 임 전 차장 등의 직권남용 혐의를 입증하는 데 역설적으로 도움을 줄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심의관들로부터 출발해 임 전 차장, 박병대ㆍ고영한 전 대법관(행정처장), 양 전 원장으로 이어지는 직권남용의 고리가 역피라미드로 완성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실제 증언석에 나온 대부분 법관들이 “임 전 차장의 부당한 지시에 어쩔 수 없이 따랐다”는 진술을 반복하면서 검찰 기소 내용을 구체적으로 입증해 주고 있다.
다만 최고 윗선인 양 전 원장의 혐의 입증에 전직 심의관들의 진술이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는 섣불리 예상하기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정다주 부장판사 등은 실제 “양 전 원장에게 보고됐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고 진술하고 있다. 시진국 부장판사가 “임 전 처장으로부터 보고가 양 전 원장에게 잘 전달됐다는 말을 들었다”고 법정에서 진술하고 김민수 부장판사가 “행정처장이 보통 오후5시 양 전 원장에게 직접 보고했다”고 밝혔지만 전해들은 진술 또는 추측에 해당해 증거능력을 가지긴 어렵다는 지적이다.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회의를 주재한 행정처장들의 혐의 입증은 비교적 용이할 수 있으나, 양 전 원장의 보고 여부를 구체적으로 입증하려면 행정처 실장급 이상의 진술이 중요할 것”이라면서 “이제 재판은 임 전 처장과 양 전 원장, 둘 중 누가 살고 누가 죽느냐의 문제가 됐다”고 말했다.
정반석 기자 banse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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