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아주버님ㆍ형님… 며느리는 왜 ‘님’이 아닐까요”

알림

“아주버님ㆍ형님… 며느리는 왜 ‘님’이 아닐까요”

입력
2019.07.27 04:40
21면
0 0

 에세이 ‘나는 당신들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 낸 배윤민정 

배윤민정씨는 “제가 서열이란 관습을 저항한 이유는 이것이 가족의 본래 목적인 사랑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수직적 서열구조는 소통을 방해하고 가족 내 약자에 대한 억압으로 이어진다. 가부장적 문화 때문에 힘겨워하는 사람들에게 내 경험이 하나의 참고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홍윤기 인턴기자
배윤민정씨는 “제가 서열이란 관습을 저항한 이유는 이것이 가족의 본래 목적인 사랑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수직적 서열구조는 소통을 방해하고 가족 내 약자에 대한 억압으로 이어진다. 가부장적 문화 때문에 힘겨워하는 사람들에게 내 경험이 하나의 참고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홍윤기 인턴기자

탈권위적인 아버지, 자주 포옹하며 ‘사랑한다’고 말하는 어머니, 제사 안 지내고 집안일 분담하는 가풍까지. 가부장제의 표본 같던 친정 식구와는 여러모로 비교됐다. 이 사람과는 꿈꾸던 가족을 이루겠다는 기쁨으로 결혼을 결심했다. 꿈이 현실이 되던 찰나, 이 한마디가 막내며느리의 처지를 직시하게 했다.

“우리 모두 아주버님 형님 도련님이란 호칭 대신 ‘님’자를 붙여 불러보면 어떨까요?”

“의논해보자”는 시부모의 의견에 ‘아주버님’은 노골적으로 반발했고 동갑내기 ‘형님’은 무시와 침묵으로 일관했다. 프리랜서 작가 배윤민정(34)씨의 가족호칭 투쟁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지난해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에 ‘나는 당신들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라고 쓴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펼친 배윤씨는 최근 자신의 체험을 정리한 동명의 책을 냈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서 만난 배윤씨는 “어려서부터 서열문화에서 살아온 이들이 이 구조에 균열내는 게 가능할까 고민했다. 이 책을 읽고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독자들을 만나며 희망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배윤씨가 처음부터 전투적인 며느리는 아니었다. 2016년 10월 결혼식을 올리기 전 2년동안 현재 남편과 함께 살면서 예비 시부모와 “각별하게” 친해졌다. 그는 “경조사 챙기기 좋아하는 성격이라 집안대소사에 참석하는 게 즐거웠다”고 말했다. 배윤씨가 ‘시월드’의 독특한 위계질서를 느낀 건 결혼 후 자신보다 3개월 빨리 결혼한 ‘형님 부부’와 함께하는 자리에서였다. “저랑 배우자, 배우자의 부모님 4명이 만날 때는 어머니가 편하게 말을 많이 하세요. 한데 (형 부부까지 함께하는) 공식모임이 되면 아버지가 주로 말하고 배우자 형, 배우자에게 근황을 묻는 분위기가 되는 거죠. 어머니가 말하면 형도 배우자도 자주 말을 끊는데 집에 와서 ‘왜 그랬냐’고 물으면, 배우자는 인식 못하고 있더라고요. 여자들은 늘 대화에서 소외되는데, ‘시가 모임은 이래야 한다’ 스테레오 타입을 상정하고 거기 맞추는 건지...”

'나는 당신들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 저자 배윤민정씨. 홍윤기 인턴기자
'나는 당신들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 저자 배윤민정씨. 홍윤기 인턴기자

어머니와 아들 둘이 초대된 ‘박가네’ 휴대폰 단체 대화방을 통해 가족의 대소사가 ‘하달’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시가 단체대화방에 초대된 친구들은 스트레스 받는다는 말을 많이 해요. 수평적 관계가 아니라서 발언권이 없으니까요. 한데 저처럼 없어도 스트레스 받죠. 정보가 배우자를 걸러 하달되는데, 기업도 아니고 이게 무슨 가족인가 싶고. 이런 갈등은 근본적으로 시가에서 며느리 위치가 불명확하기 때문이죠.”

시가의 모든 이들에게 ‘님’자를 붙인 배윤씨는 어느 날, 시가 식구 중 누구도 막내며느리인 자신에게 ‘님’자를 불러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수씨, 동서, 이름으로 불린 그는 몇 번의 망설임 끝에 “모두의 호칭에 ‘님’자를 붙이자”고 조심스레 제안했다. 박가네 대화방에서 동갑내기 ‘형님’의 반발이 남편 형의 입을 통해 전달됐다. 남편의 형 역시 “어떻게 그런 말이 아래에서 위로 나올 수 있냐”고 쏘아 붙였다. 동갑이라며 말을 높였던 남편 형의 부인은 민정의 제안에 침묵을 지키다 아들 백일잔치에서 말했다. “동서, 왔어?”

점자책 출판사에서 점역(한글을 점자로 번역하는 일)을 담당했던 배윤씨는 그 무렵 초등 교과서 속 그림을 점자로 해석할 때, 직업 명칭에 체계적인 권력질서가 있다는 걸 체감했다. 세탁소에서 다림질하는 모습, 식당에서 음식을 나르는 모습을 점자로 해석할 때는 마땅한 직업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름 없는 직업이 의외로 많았다. 이 모습이 동등한 가족 구성원이 아닌 아랫사람으로 인식되는 자신의 처지 같았다. 배윤씨는 “인간은 언어를 배우면서 세계를 인식하는데, 특히 ‘시댁’과 ‘처가’의 호칭 굉장히 비대칭적이다. 성차별, 연령차별이 섞여 호칭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이후 몇 번의 갈등 끝에 ‘엄마(형님)가 마음고생하면 자식(조카)이 건강하게 못 큰다’는 시가의 저주같은 경고를 듣고 남편 형 부부에게 사과했지만, 문제의식은 여전히 남았다. 배윤씨는 “사과 후 배우자 부모님의 반응이 슬펐다. ‘이제 훌훌 털어버리자’고 다독이는 데, 가정의 평화가 권력 없는 약자의 침묵에서 이뤄진다면 이런 기만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가족호칭 문제를 제기한 머그컵 100개를 맞춰 주변에 나눠주며 반응을 살폈다. 이 반응을 ‘시가족사’와 함께 한국여성민우회 누리집에 연재했다. 형의 말을 배윤씨에게 ‘반사’했던 남편은 머그컵을 함께 나눠주다 광화문 1인 시위를 함께 하는 지원군이 됐다. 배윤씨는 “남편 자신이 호칭 바꾸자고 제안하면 기껏해야 ‘아내한테 잡혀 사는 놈’ 소리 듣는데 그쳤는데, 아내가 그런 말 하는 순간 악처나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는 걸 보면서 (호칭 개선 요구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시작한다는 걸 느꼈다고 하더라”고 덧붙였다.

올해 초 시부모가 편지를 보냈다. “민정님!” 1년여 투쟁 끝에 시작한 작은 변화다. 아직 남편 형 부부와는 서먹하다. 배윤씨는 “독자 중 10년 전 똑같은 문제를 제기했지만 아무 반향없이 끝나 유리벽에 갇힌 느낌이었는데, 그 벽이 깨졌다고 응원해 주신 분이 있다. 살면서 부당한 일을 겪었을 때 ‘내가 예민한가’하는 생각 때문에 차오르는 말을 삼켰던 사람들에게 말하고 행동하면 반드시 바뀌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