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키마이라’ 스크립터 성추행 사건으로 본 방송 제작 현장
성추행 신고 후 가해자와 함께 촬영
‘미투’ 운동 이후에도 개선 미진… 대본에 ‘반성폭력’ 공지 못 넣게 하기도
영화계처럼 교육 의무화, 제작현장관리 부처 일원화 필요
대작 영화 한 편을 만들 수 있는 130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됐고, 시청률 40%를 웃돈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의 김도훈 PD가 연출한다. 드라마 ‘키마이라’는 올 하반기 방송가의 기대작 중 하나로 꼽혀왔다. 하지만 제작 과정에서 스태프 성추행 사건이 벌어지며 방송도 되기 전 도마에 올랐다.
◇ “너 무서워 드라마 하겠니?”
드라마 촬영 일지 작성 등의 일을 하는 스크립터 A씨는 지난달 24일 제작진이 모인 회식 자리에서 조연출 B씨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 B씨는 A씨를 두 시간가량 따라다니며 여러 차례 껴안고, 엉덩이를 만졌다고 한다. A씨는 회식 다음 날 이른 오전에 드라마 제작사인 제이에스픽쳐스 측에 B씨의 성추행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B씨는 잘못을 인정했다. A씨는 제작사에 ‘공식적인 자리에서의 가해자 사과’를 요구했다.
제작사는 처음엔 A씨의 요구대로 움직이는 듯했다. 성추행 사건을 인지한 후 첫 촬영일인 29일에 B씨를 불러 촬영장 인근 풀숲에서 연출과 조명감독 등 주요 제작진 5명이 보는 앞에서 A씨에게 사과하도록 시켰다. 하지만 A씨는 애초 B씨가 드라마 촬영에 참여하는 모든 스태프 앞에서 사과하기를 바랐으나 제작사 측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프로젝트(드라마 제작)를 위해 그것(공개 사과)은 피해달라’는 게 이유였다. A씨는 문제 수습 방식에 이의를 제기했다. 돌아온 건 ‘2차 가해’였다. A씨는 한국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제작사 프로듀서로부터 ‘그 자리를 피하지 않은 네 책임도 있다’ ‘뭘 원하는지 말해라. 너 무서워서 드라마 하겠니’ 식의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A씨는 성추행 사건 발생 후 지난달 29일과 30일, 이달 2일 등을 B씨와 함께 촬영장에서 일해야 했다. A씨는 “처음엔 사과만 받고 당장 나가고 싶었으나 스크립터를 구하기 어려워 다른 사람 구할 때까지 기다려주겠다고 했다”며 “하지만 이건 아닌 거 같아 이달 초에 일을 그만뒀다”라고 말했다. A씨는 일을 그만두며 지난 13일 스태프 카카오톡 대화방에 글을 올려 성추행 사건과 일을 그만두게 된 배경을 알렸다. A씨가 글을 올린 하루 뒤인 14일에야 가해자인 B씨는 제작 일선에서 물러났다. A씨가 성추행 사실을 알린 뒤 20일 만이었다. 김도훈 PD도 15일 비공개 ‘키마이라’ 인터넷 카페에 뒤늦게 글을 올려 “사건의 심각성에 맞게 일찍 사태를 수습하지 못한 제 불찰”이라며 사과했다. 성추행 사건을 부적절하게 수습한 C씨도 이날부터 프로그램 제작에서 배제됐다.
◇공론화 꺼리고 성평등 교육도 불참
‘키마이라’의 사례는 방송 제작 현장에서 성추행 수습 과정이 얼마나 미숙한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세 가지 문제점이 드러났다. 우선 제작진은 스태프 성추행 사건을 인지한 뒤 사건 수습을 위한 초기 공론화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 이후 수습 과정에서 오히려 피해자를 압박하는 2차 가해가 벌어졌다. 일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피해자와 가해자를 일터에서 분리하지 않았다.
‘키마이라’ 대본 앞엔 ‘성희롱 예방 가이드’가 붙어 있었다. ‘주위에 피해자가 있을 경우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피해자의 문제 제기가 건강한 조직 문화를 위해 중요한 행동임을 인식하고 불이익을 주는 행위는 절대 금합니다’ 등의 경고 문구가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지난해 초 미투(MeToo) 운동으로 문화계 성폭력 문제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높아졌는데도 같은 일은 반복됐고, 대응은 미진했다. 방송 제작 현장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적 문화가 뿌리 깊게 박혀 있다는 방증이다. 외주제작사에서 10년 넘게 프로그램을 기획한 PD는 “미투 운동 이후 드라마 대본에 성폭력 경고와 내부 규약 등을 넣으려 했는데 방송사 PD가 거부해 싣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성 평등 교육을 안 받는 스태프도 있었다. 의무가 아니고 처벌 규정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10명 중 9명이 성폭력 경험”
영화와 달리 TV를 틀면 누구나 볼 수 있는 게 방송이다. 보편적인 콘텐츠가 만들어지는 방송 제작 현장은 여성에게 폭력적이다. A씨처럼 프리랜서 등 계약직으로 일하는 여성이 많아 피해자들은 제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방송계갑질119와 방송스태프노조 준비위원회가 지난해 4월 발표한 ‘2018 방송제작현장 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설문에 응한 방송 근로자 223명(여성 209명ㆍ남성 14명) 중 200명(89.7%)이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다’라고 답했다.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15 성희롱실태조사’에서 직장에서 성희롱 피해를 경험한 적이 있다는 응답이 6.4%를 기록한 것과 비교하면 방송제작현장의 업무 환경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20대 한 보조 작가는 50대 중반 지상파 PD가 회식에 참여한 제작진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가슴을 움켜쥐어, 그날 이후 일을 그만뒀다. 누구 한 명 말리는 사람도 없었다. 10여 년 동안 예능프로그램을 기획해 온 한 작가는 “이 바닥이 좁다”라며 “성추행을 신고했다가는 ‘신고하는 애’로 낙인찍혀 좀처럼 일을 찾기 어려워 문제 삼지 못하고 홀로 힘들어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고충 상담 창구 외부에 마련 필요
방송 제작환경 체질 개선을 위해선 구조 변화가 시급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한 작품을 찍을 때마다 모든 스태프가 성 평등 교육을 이수해야 하는 영화계처럼, 방송계도 교육 의무화가 필요하다. 방송사나 제작사가 아닌 외부에 고충 상담 창구를 마련하는 방안도 고민해야 한다. 방송계갑질119의 김혜진 활동가는 “방송 제작 환경이 방송사, 제작사, 외주제작사, 촬영 관련 하청업체 등 다단계 구조로 돼 근로자가 어디에 문제를 제기하고,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가 불분명한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성상민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기획차장은 “방송통신위원회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콘텐츠진흥원 등으로 방송 관련 규제 부처가 분산돼 있다”라며 “방송 제작환경의 효율적 관리를 위해 감독 조직을 일원화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제안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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