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의 영국 유조선 억류 사태로 핵합의 존폐 기로
핵 합의(JCPOAㆍ포괄적공동행동계획) 이행 문제를 두고 미국과 이란 간 군사적 긴장감이 상승하는 가운데 ‘이란 대(對) 유럽’이라는 또 하나의 전선(戰線)이 형성되고 있다. 영국의 자국 유조선 억류 조치에 반발해온 이란이 결국 군사력을 동원해 영국 유조선을 나포ㆍ억류하며 유럽을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은 것이다. 미국의 대(對)이란 압박에 유럽이 동참할 여지가 커지며, 가까스로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이란 핵합의 존폐 위기감도 한층 커지게 됐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이란은 19일(현지시간) 호르무즈 해협에서 영국 국적의 스테나 임페로호와 라이베리아 국적의 영국 해운사 소속 메스다르호 등 2척의 선박을 나포했다. 메스다르호는 풀려났으나 스테나 임페로호에 대해선 이란 해안에 억류시켰다.
이란 혁명수비대는 보란 듯 나포 당시 상황을 담은 동영상을 20일 공개했다. 2분 길이 동영상에는 혁명수비대의 쾌속정 수척과 헬리콥터 1대가 도주하는 스테나 임페로호를 추격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유조선이 멈추지 않자, 복면을 쓴 무장 병력들이 헬리콥터에서 유조선 갑판으로 강하하는 모습도 눈에 띈다. 이란 혁명수비대는 “스테나 임페로호가 선박자동식별장치(AIS)를 끈 채 호르무즈 해협을 항해하다 다른 어선과 충돌했는데도, 항해를 계속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란 국적 유조선이 영국령 지브롤터 당국에 의해 지난 4일 억류된 뒤 이란이 “영국 선박도 억류될 수 있다”고 공공연하게 위협해 온 점에서 이번 억류는 영국에 대한 보복 조치로 해석된다.
영국은 곧장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 등 대응 마련에 착수했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영국이 자산 동결 조치 등이 포함된 경제 제재안을 22일 발표할 것”이라고 전했다. 또 2016년 핵합의 체결에 따라 해제됐던 대(對)이란 제재 부활을 유럽연합(EU)에 촉구할 것으로 전해졌다. 제레미 헌트 영국 외무장관은 “이 상황이 신속하게 해결되지 않을 경우 심각한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유럽도 이란에 대한 규탄에 나섰다. 영국과 함께 유럽 측 핵합의 당사국인 프랑스와 독일 외무부는 20일 성명을 내고 “이란은 항행의 자유를 준수해야 한다”며 “영국 선박을 즉시 석방하라”고 촉구했다. EU도 “이란이 긴장을 심화하는 위험을 가져왔다”고 비판했다. 반면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무장관은 트위터에 영국 선박 억류의 적법성을 주장하며 “영국은 더는 미국 경제 테러리즘의 장신구 노릇을 하지 말아야 한다”며 강경한 태도를 이어갔다.
드론을 서로 격추시켜 미국과 이란의 긴장이 고조된 데 이어 이란과 유럽 간 충돌이 이어지면서 이란 핵합의 유지 동력은 더욱 떨어지게 됐다. 지난해 5월 미국의 핵합의 탈퇴 뒤에도 유럽은 “합의를 유지해야 한다”며 미국과 이란 사이 ‘회색 지대’를 고수해왔으나 이번 영국 유조선 억류 사태를 분수령으로 이란 압박에 무게를 둘 수밖에 없어졌다. 이에 반발한 이란이 또다시 우라늄 농축 농도를 상향 조정하겠다고 나설 경우 양측 간 합의 불이행 누적으로 합의가 사실상 무력화하는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다.
한편 미국 국무부가 19일 워싱턴에서 한국 등 60개국 대표들을 불러모아 호르무즈 해협 호위 연합체구상을 설명한 데 이어, 국방부는 이날 중동 내 대표적 우방국이자 이란의 숙적인 사우디아라비아에 500명을 파병하는 계획을 승인했다. 전날 미 해군이 호르무즈 해협에서 이란의 군사용 드론을 격추시키는 등 양국 간 군사적 충돌이 빈번해지는 상황에서 이뤄진 조치다. 미군의 사우디 주둔은 2003년 발발한 이라크 전쟁 이후 16년 만이다.
조영빈 기자 peoplepeopl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