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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대선 때 부정행위?… “여당이 투표결과 조작 등 모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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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대선 때 부정행위?… “여당이 투표결과 조작 등 모의했다”

입력
2019.07.21 08:11
수정
2019.07.21 20:12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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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노태우 패배 시 무효 선언 검토”

1987년 부천역 광장에서 열린 '6.29 실천결의대회'에서 노태우 당시 민정당 총재가 지지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7년 부천역 광장에서 열린 '6.29 실천결의대회'에서 노태우 당시 민정당 총재가 지지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7년 12월 16일 치러진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여권이 부정선거를 모의했다는 폭로가 나왔다. 여당이던 민주정의당이 투표결과 조작은 물론 선거 무효 선언까지 검토한 사실이 미국 정보기관의 문건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20일 정보공개 요청을 통해 입수한 미국 중앙정보국(CIA) 자료를 토대로 “(1987년) 기념비적인 선거를 앞두고 (한국)여당이 투표결과 조작 등 부정선거를 구체적으로 기획했다”고 보도했다. 13대 대통령 선거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쟁취한 대통령직선제 개헌에 따라 같은 해 12월 치러졌다. 여권에선 노태우 민주정의당 총재가, 야권에선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가 각각 후보로 출마해 삼파전을 벌였다.

실제 선거에선 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당시 여당은 승리를 확실히 보장하기 위해 불법적인 방법을 강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보도에 따르면 CIA는 대선을 며칠 앞두고 작성한 보고서에서 "노 후보의 당선 가능성을 두고 여당 공직자들의 의견이 엇갈리면서 투표결과를 조작해야 한다는 압박이 가중되고 있다"라며 "광범위한 조작 계획이 이미 시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또 11월 23일 보고에선 “그들(민정당 측)은 흑색선전과 투표결과 조작 등 ‘더러운 술책(dirty tricks)’을 검토하고 있다”며 “일부는 그 이상을 준비하는 듯하다"고 전했다.

특히 이들은 선거 패배 확률이 높아지면 아예 선거를 무효화하는 방안까지 고려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 소식통은 당시 CIA에 “여당 전략가들은 개표 초반 결과 노 후보가 패배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올 경우, 여당의 조작 증거를 날조해 전두환 대통령이 선거 무효를 선언하는 방안을 검토했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저지른 부정행위를 야권에 덮어씌우려 했다는 얘기다. SCMP는 노 전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박철언 전 의원의 보좌관에게 사실 확인을 요구했으나 “노 전 대통령은 오래전 정계를 떠났다”는 답변만 들었다고 한다.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평민당 당원 및 시민들이 서울 구로구청에서 봉인없는 부재자 투표함을 운송하려는 차량을 세워놓고 투표함을 점거한 채 농성을 벌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평민당 당원 및 시민들이 서울 구로구청에서 봉인없는 부재자 투표함을 운송하려는 차량을 세워놓고 투표함을 점거한 채 농성을 벌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선거 이후 소요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계획도 사전에 구체적으로 논의된 것으로 드러났다. CIA의 한 정보보고에 따르면 당시 정부는 김대중 후보가 선거결과에 반발해 대중 저항을 선동하면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준비해뒀다. 선거를 닷새 앞둔 12월 11일자 보고에는 “노 후보 승리에 대한 사회적 불만이 확산될 경우 계엄령이나 긴급조치를 발동해 이를 조기에 진압하는 방안을 정부 관계자들이 논의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다만 SCMP는 CIA 문건에 담긴 여당의 계획이 얼마나 실행됐는지는 불분명하다고 전했다. 대선 이후 일부 야권 인사가 선거가 조작됐다는 주장을 제기했지만, 국제 선거 감시기구는 광범위한 부정행위를 보고하지 않았다는 점도 덧붙였다. 매체는 또 노 후보가 득표율 36.6%로 각각 28%, 27%를 득표한 김영삼, 김대중 후보를 큰 차이로 앞서 한국 국민이 해당 선거를 적법한 것으로 받아들였다며 “양김 후보가 단일화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문건과 관련해 미국 역시 노 후보의 당선을 선호한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도 나왔다. 당시 선거를 취재했던 국가안보 전문 저널리스트 팀 쇼록은 SCMP에 "이 같은 전술을 주목하기만 했을 뿐 여당을 약화시키는 데 사용하지는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노 후보에 대한 미 정부의) '선호'를 보여준다"며 "이런 정보가 뉴욕타임스 같은 곳에 유출됐다면, 미국과 한국의 여론이 어떻게 됐을지 상상해 보라"고 말했다. 미 정부가 야권을 밀어주고자 했다면 부정선거 모의 사실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는 편을 택했다는 얘기다.

손영하 기자 froze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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