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시백 한국 영화 100년] <19> ‘충무로 간판’ 김지미의 등장
※ 한국영화가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한국일보> 는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들을 통해 매주 토요일 들려드립니다. 한국일보>
김지미(79)가 영화배우의 길을 걷게 된 건 생각지 않은 우연이었다. 당초에는 외교관이 되고자 정치외교학과를 지망하여 영어 공부에 열심이었고, 덕성여고 재학 시절에는 육상에 소질을 보였다. 당시로선 보기 드물게 자기 진로를 정해두고 있었던, 능동적이면서 주체적인 여성이었다. 여고 시절 집안에서 운영하는 명동의 다방 배꽃을 자주 오갔던 김지미는 검정고무신을 신고 들어온 괴상한 인상의 남자로부터 “영화에 출연할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그 사람은 ‘주검의 상자’(1955)를 마친 초년의 김기영(1919~1998) 감독이었고 이광수의 소설 ‘애욕의 피안’을 각색한 차기작 ‘황혼열차’(1957)의 캐스팅에 한창 열을 올리던 차였다. 김지미를 눈여겨본 김 감독은 광화문 근처의 집까지 찾아와 배역을 제안했고, 집안사람들과의 논의 끝에 김지미는 배역을 받아들였다. 준비하던 미국 유학을 포기하면서 내린 결정이었다. 다른 말로는 1957년 1월 20일, 오빠와 미국 유학 여권 수속을 밟고 나오는 길에 픽업(‘아세아의 미녀 김지미’ 인터뷰 ‘여원’ 1963년 11월 호)되었다 한다.
◇시작부터 달랐던 대형 배우
단발머리에 교복차림으로 사무실에 찾아온 김지미를 ‘황혼열차’의 제작자인 최재익 동광영화사 사장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기용하길 망설였다. 이때 김 감독이 기지를 발휘했다. 교복 대신 준비된 의상으로 갈아 입히고 시나리오의 장면 하나를 골라 즉흥으로 찍어서 보여주었는데 그걸 보고 나서야 김지미의 캐스팅이 확정되었다(‘한국영화 주름잡은 30년 톱스타 김지미’ 한국일보 1991년 1월 19일). 연기 경력이 전무한 신인임에도 막힘 없는 연기를 선보인 김지미는 김 감독의 다음 작품인 ‘초설’(1958)에도 출연한다. 남동생(아역 시절의 안성기)과 함께 살면서 용산역에서 석탄을 훔쳐 팔아 생계를 잇는 가난한 처녀 역할이었는데, 이때 김 감독은 김지미가 미모 탓에 가난한 배역이 맞지 않을 것 같다는 걱정을 했지만, 촬영 직전에 김지미가 얼굴에 석탄가루를 덕지덕지 묻히고 남루한 차림을 입고 나오는 등 준비를 갖춘 걸 보고 놀랐다고 한다. 흥행은 실패했지만 ‘금년도의 큰 발견’이자 ‘입체적인 마스크는 앞날이 가장 기대된다’는 호평을 받으며 18세의 김지미는 혜성처럼 등장했다. 이때 김 감독과의 인연은 훗날 ‘렌의 애가’(1969)로 재개되어 ‘육체의 약속’(1975)과 ‘화녀 82’(1982)로 이어진다.
데뷔하자마자 세간의 이목을 끈 김지미의 첫 번째 상업적 성공작은 홍성기(1928~2001) 감독의 ‘별아 내 가슴에’(1958)였다. ‘애인’(1956)과 ‘실낙원의 별’(1957)로 성공가도를 달리던 멜로드라마의 장인 홍 감독은 김지미에게 출판사 직원과 사랑에 빠지는 여대생 역을 맡겼고, 영화는 13만명의 관객수를 기록하며 종전 최고 흥행작이던 ‘자유부인’(1956)의 11만5,000명을 갈아치운다. 선민영화사 전속배우가 된 김지미는 ‘산 넘어 바다 건너’ ‘청춘극장’ ‘별은 창 너머로’ ‘비극은 없다’(1959), ‘재생’(1960) 등 홍 감독의 주요 작품에 단골로 출연해 잇달아 대박을 터뜨렸고, 홍성기-김지미 조합은 흥행 공식처럼 자리 잡았다. 이 인연은 감독과 배우 사이를 넘어 연인 관계로 발전해 1958년 9월 11일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이 첫 결혼은 ‘춘향전’(1961)이 신상옥-최은희 커플의 ‘성춘향’(1961)에 참패한 뒤 선민영화사가 부도처리되고, 감독의 여성 관계 문제로 이혼하기까지 4년 간 이어진다.
◇촬영 중 얼굴 부상 등 수난도
촉망받는 신예에서 화려한 스타로 빠르게 입지를 다진 김지미였지만, 때때로 경력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한 예로 정창화 감독의 ‘사랑이 가기 전에’(1959) 때는 배우 황해가 운전하는 오토바이 뒷좌석에 탔는데 오토바이가 전차 레일에 걸려 넘어져 15m 이상 아스팔트 바닥에 얼굴이 밀리는 사고를 겪었다. 얼굴 전면과 코의 피부가 파열되었고 배우 일을 영영 그만둘지도 모르는 상황으로 몰렸던 김지미는 3개월 이상 입원해야 했고, 일본의 성형외과에서 재수술을 받는 등 천신만고를 겪은 끝에 ‘사랑이 가기 전에’의 촬영을 마친다.
1959년 8월에는 김지미가 존 포드 영화에 출연제의를 받고 할리우드로 진출한다는 소문이 충무로에 나돌았다. 이는 미국 정부가 주한미군과 한국의 실태 파악을 위해 포드 감독에게 한국에서의 다큐멘터리 촬영을 요청하면서 생겨난 일이었다. 세미 다큐멘터리 ‘조용한 아침의 한국’(1959)에 여교사 역할로 잠깐 출연한 김지미를 두고 포드 감독이 여주인공인 타이피스트 역할을 제안했고 배우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공연한다는 것이 소문의 골자였다. 김지미가 전속으로 소속되어있던 선민영화사에서는 포드 감독이 방한 때 김지미에 대해 큰 호의를 표했으며, 7월 말 매니저를 통해 서면으로 5만달러 이상의 개런티를 약속, 10월에 한국 로케이션을 끝내고 11월부터 할리우드에서 세트 촬영에 들어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전국민의 이목이 집중되었고 언론에 대서특필되었지만 이 소문은 한 차례의 해프닝으로 그쳤다. 진위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났는데, 선민영화사는 미8군 오락과와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했지만, 정작 미8군 측 대변인이 “김지미 양과 전혀 논의한 적 없다”고 발표했고 나중에는 포드 감독 또한 서면 인터뷰로 소문을 부인했다. 이른바 ‘김지미 할리우드 진출 날조 소동’이었다. 이 사건의 파장이 얼마나 컸던지 당시 김지미의 남편이었던 홍 감독이 세 차례나 기자회견을 벌여 논란을 진화하려 했을 정도였다.
◇34편 겹치기 출연까지 한 스타 중의 스타
1960년대에 들어 한국 영화의 제작 편수가 급속히 늘어남에 따라, 김지미 또한 여러 현장을 종횡무진하며 한국 영화의 전성기를 견인하게 된다. ‘춘향전’(1961)이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판정패 당했지만, 그럼에도 김지미는 ‘장희빈’(1961)과 ‘에밀레종’(1961)을 성공시키며 굳건히 스타의 자리를 지켰고, ‘진시황제와 만리장성’(1962), ‘석가모니’(1964)와 같은 대형 시대극이나 추리 스릴러 ‘붉은 장미의 추억’(1962), 코미디물인 ‘특등신부와 삼등신랑’(1961), 심지어 정창화 감독의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 같은 액션 영화에까지 도전할 만큼 넓은 연기 스펙트럼과 활동량을 과시했다. 한창 많은 경우는 34편까지 겹치기 출연을 할 정도였고, 돈줄을 쥔 지방 흥행사들은 김지미를 기용하지 않으면 제작비를 대지 않겠다고 영화사를 압박하기도 했다. 이규웅 감독과는 ‘요화 배정자’(1966), ‘요화 장록수’(1969), ‘전하 어디로 가시나이까?’(1969)를 포함, 무려 18편의 영화를 같이 했는데 이는 ‘감독은 이규웅, 여주인공은 김지미’를 원했던 지방 흥행사들의 입김이 강하게 반영된 결과였다.
문희, 남정임, 윤정희와 나란히 스타의 자리를 유지했고 비슷한 연배였지만, 김지미는 트로이카 여배우들처럼 청순하고 발랄한 이미지에 제한되지 않았다. 최은희, 주증녀, 도금봉 같은 배우들이 고수한 전통적 향토미와도 겹쳐있지 않았다. 당돌하면서 오만한 모습이 매력으로 작용했다. 김지미의 도도한 이미지에서 다른 가능성을 보았던 정창화 감독은 사극 ’장희빈‘에 1대 장희빈으로 캐스팅해 자기주관이 강한 여성상으로 재해석했는데, 이 시도가 성공하면서 이후 김지미는 최훈 감독의 ’양귀비‘(1962), 김기덕 감독의 ’칠십칠번 미스 김‘(1963), 박상호 감독의 ’선술집 처녀‘(1963) 등에서 팜므파탈 역할을 자주 맡게 된다. 임권택 감독의 첩보영화 ’몽녀‘(1968), 박종호의 ’골목 안 풍경‘(1962)에서도 강단있고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당연시되던 시기, 당차고 카리스마 넘치던 김지미의 배역들은 “어휴! 대신 실컷해줘서 좋다”는 반응을 얻었으며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뭇 여성들의 심정을 대변해주었다. 여배우 김지미의 입지는 독보적이었다. 트로이카를 비롯해 엄앵란, 최은희, 김혜정, 최지희 등 동시대의 배우들이 1970년대를 기점으로 차츰 일선에서 물러나는 와중에도 김지미는 활발한 연기 활동을 이어가며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얼굴로 남았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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