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가 인정한 ‘탱고 마에스트로’ 공명규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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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울 세종대로 한국일보 본사에서 만난 공명규(63)씨가 인터뷰 도중 탱고 스텝을 선보이고 있다. 류효진 기자

서울 종로구 구기동의 한 야외 정원. 말끔하게 차려 입은 40~70대 중ㆍ장년 남녀 30여명이 한데 모여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도 깰 겸 와인을 가져다 놨는데, 모두들 홀짝 거리기만 할 뿐 누구 하나 마음 편히 입 떼는 사람이 없었다. “왠지 춤이라면 꺼려져서 평생 한 번도 배워본 적이 없다”는 한 60대 여성의 고백에, 그제서야 다들 말문이 트였다. “맞아요. 나도 그랬어요.” “멋져 보이긴 하는데 제가 하기엔…” “이제 와서 배운다니 주책 아닐까요.”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때마침 ‘라 쿰파르시타’가 울리기 시작했다. ‘가장 행렬’을 뜻하는 이 음악은, 춤에 대해 전혀 몰라도 듣는 순간 탱고를 떠올릴 수 밖에 없는 바로 그 곡이다. 이 음악과 함께 은은한 조명이 쏟아지자, 미끄러지듯 무대에 등장한 이가 공명규(63) 선생. 공 선생의 능숙하면서도 열정적 몸놀림에 다들 시선을 빼앗기더니, 춤이 끝났을 땐 열렬한 박수를 쏟아냈다. “나보다 나이도 어린 분인데, 어쩌면 저렇게 우아하고 멋있는 포즈를 취할 수 있느냐”는 감탄이 쏟아졌다.

이날 무대는 공 선생의 일일 탱고 교실. 전시기획사 나비타아트의 최미향 대표가 주변 사람들에게 탱고를 권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다. 공 선생과 함께 탱고 시범을 선보인 최 대표 자신이 탱고를 배우면서 삶의 활력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서울 구기동의 야외정원에서 공명규 씨가 일일 탱고 강습에 앞서 최미향 대표와 탱고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공 선생이 선보이는 건 아르헨티나 탱고. 공 선생은 탱고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아르헨티나 본토에서, 동양인 최초 ‘탱고 마에스트로’ 칭호를 받은 사람이다. 아르헨티나 탱고란 유럽으로 전파되고 현대에 접어들면서 화려해지고 스포츠화된 탱고와는 다소 결이 다른, 파트너와의 호흡 그 자체를 가장 중시하는 ‘원조 탱고’다. ‘쇼’적인 요소가 더해진, 강력하고 격렬한 동작이 상대적으로 적으니 훨씬 편안할 것 같지만 서로의 호흡을 맞춘다는 기본 그 자체에 충실하기란 쉽지 않다.

시범 뒤 이어진 공 선생의 탱고 강연이 그 증거다. 이날 공 선생은 탱고의 기초인 ‘걷기’, 그리고 ‘살리다(스페인어로 ‘출발’) 스텝’에 대해 설명했다. 척 보기엔 별 다른 기술이랄 것도 없이 상체를 똑바로 세우고 한발씩 내딛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다들 균형을 잃고 비틀댔다. 음악에 맞춰 고작 3분 정도 같은 동작을 반복했는데도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공 선생은 빙긋 웃었다. “탱고는 흔히 걸을 줄만 알면 누구나 배울 수 있는 춤이라고들 해요. 나이는 아무 문제 없지요. 하지만 그냥 걷는 게 아니라 상대와 호흡을 맞춰 정성을 다해 걸어야 한다는 것, 그게 정말 어려운 거예요.”

◇무술인 체면에 무슨 탱고? 그러다 빠졌다

공 선생은 원래 태권도를 했던 무술인이었다. 1978년 TV로 월드컵 개최국이었던 아르헨티나를 접하곤 흠뻑 빠졌다. 1980년 스물셋의 나이로 태평양을 가로질렀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태권도 사범증만 있으면 쉽게 자리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가보니 일본 가라데보다 태권도가 강하다는 걸 증명해보래요.” ‘도장 깨기’를 시작했다. 일본 가라데 도장을 찾아가 겨루자고 청했다. 지기 싫어서, 아니 지면 끝장이란 생각에 말 그대로 정말 “피 터지게” 싸웠다.

지난 2017년 6월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콜로세오 극장 무대에 오른 ‘피버 탱고 아리랑’. 공씨가 태권도의 아르헨티나 진출 50주년을 기념해 기획한 이 공연은 탱고와 태권도를 콜라보한 작품이다.

이런 공 선생에게 탱고가 눈에 들어왔을 리 없다. “춤에 대한 편견도 컸고요. 한국의 무술인으로서 태권도를 전파하기 위해 아르헨티나에 건너왔다는 사람이, 체면이 있지 무슨 춤이냐고 생각했죠.” 그렇게 자리를 잡아갔다. 도장 깨기 끝에 아르헨티나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발탁됐고, 육군 교관 자격으로 1982년 아르헨티나와 영국간 포클랜드전쟁에도 참전했다. 에콰도르 태권도 국가대표팀 감독도 맡았다.

하지만 탱고를 마냥 피할 수만은 없었다. 탱고가 고급 문화예술 그 자체인 아르헨티나 사회에서 점점 자리를 잡아 간다는 건, 탱고를 한번은 춰야 한다는 의미였다. 격파하고 찌르기를 하던 손으로 여성 파트너의 손을 맞잡았다. 역시나 이 세계에서도 동양인에 대한 편견은 강했다. 한국인이 무슨 탱고냐는 시선에 오기가 생겼다. 그 말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또 한번 미친 듯 몰입했다. 1996년 아르헨티나 탱고협회 역사상 동양인 최초로 ‘탱고 마에스트로’ 자격을 얻었다.

◇한국 노인들이여, 탱고를 춰라

공 선생은 그 이후 한국을 드나들 때마다 ‘탱고 전도사’ 역할을 했다. 때때로 탱고 강습도 하고 아르헨티나 현지의 대규모 탱고 무용단 초청 공연도 성사시켰다. 그 공로를 높이 사 아르헨티나 정부는 2003년 공 선생을 ‘아르헨티나 홍보대사’로 임명하기도 했다. 그러다 지난해 아예 한국에 눌러 앉았다. “이제 한국의 시니어들에게 탱고를 제대로 가르치고 싶어서”다. 최근 탱고협회도 만들었고, 서울 사당동에 협회 사무실 겸 강습소도 열었다.

공씨가 아르헨티나 현지 무용수와의 공연에서 아르헨티나와 대한민국 국기를 들어 보이고 있다. 공명규 제공

왜 하필 ‘시니어 탱고’일까. 우리 사회 시니어들이 너무 주눅들어 있어서다. 젊어서 산전수전 다 겪으며 나라 발전에 이바지했는데,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하는 것 같아서다. 한국 노인들의 우울한 모습은 활달한 아르헨티나 노인들과 비교됐다. “그 사람들은 노인이라 해도 멋지게 차려 입고요, 젊은 사람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탱고를 추죠. 그러곤 와인 한 잔 기울이면서 격의 없이 얘기를 나눠요. 그게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내 조국, 우리 한국의 시니어들도 그런 멋진 노인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더구나 탱고는 세계 어디서나 즐길 수 있다. 탱고를 추면서 즐기는 곳을 ‘밀롱가’라 부르는데, 탱고는 아르헨티나에서 유럽, 미국, 동남아 등으로 번져나갔기에 세계 어디를 가든 밀롱가 한 곳 정도는 언제든 찾을 수 있다. 탱고 신발 하나만 신고 무대에 올라서는 그 순간, 그 어느 현지인과도 어울릴 수 있는 셈이다. “해외 다녀보면 멋들어지게 탱고를 추는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정말 많아요. 젊은 시절 배워 평생 즐기는 거지요. 여행지에 가서 사진 찍고 먹고 마시기만 하고 올 겁니까. 무대에 올라보세요. 말은 안 통해도 춤은 통하잖아요.”

시니어 탱고를 지향한다 해서 젊은이들을 배제하는 건 아니다. 춤으로 나이, 성별, 문화 등 모든 걸 뛰어넘자는 것이니 젊은이도 당연히 대환영이다.

◇6개월만 꾸준히 해봅시다

‘배움에 나이는 없다’고 하지만 사실 예순 훌쩍 넘은 이들이 새로운 뭔가를 배우기란 쉽지 않다. 젊은 사람들의 전유물로 통하는 ‘춤’은 심리적 장벽이 더욱 높다. 그래서 공 선생은 ‘건강’을 탱고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로 내세운다. 공 선생 자신이 표본이다. 척 봐도 꼿꼿하고 다부진 체격이다. 그가 내민 명함엔 선명하게 새겨진 복근을 드러낸 프로필 사진이 함께 찍혀 있다. 괜한 말이 아니라 언뜻 40대 정도로도 보인다.

공명규씨가 아르헨티나 육군사관학교에서 겨루기를 한 후 찍은 사진. 공씨는 이 겨루기 이후 아르헨티나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발탁됐다. 공명규 제공

하지만 그는 젊은 시절 혹독하게 수련했던 무술인 아니었던가. 공 선생은 그 덕분만은 아니라 했다. 일단 탱고는 상체를 세우고 골반을 이용해 올바른 자세로 걷는 데서 시작한다. 춤을 배우고 추는 동안 이 걸음걸이만 반복해도 “죽어 있던 근육이 펴지면서 체형을 바르게 만들어 준다”고 했다. “나무를 처음 심으면 지지대를 받쳐 주잖아요. 탱고도 마찬가지에요. 처음엔 제대로 걷는 것만도 힘들지만 연습을 꾸준히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중심으로 근육이 붙기 시작해요.”

걷기가 기본이니 배우기도 어렵지 않다. 공 선생은 “하루 1~2시간씩 6개월간 꾸준히 걷기 연습을 하며 기본기만 익히면 ‘몸치’라 해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게 탱고”라고 강조했다. 남 모를 고민, 요실금 예방에도 좋다. “다리를 8자 모양으로 그리는 ‘오초(ocho)’란 동작이 있는데 이 동작을 반복하면 골반 주변 근육이 강화됩니다. 요실금 같은 질병이 싹 사라지는 거죠.”

탱고 얘기에 공 선생은 더 신났다. “탱고 음악은 기본적으로 아르헨티나 이민자들이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며 만든 겁니다. 우리로 치자면 ‘한’의 정서죠. 음악 자체도 한국 사람들의 정서에 딱 들어맞아서 정서적 울림을 주니까 치매 예방에도 좋아요.” 공 선생은 다시 한번 외쳤다. “늙어서 건강 챙긴다고 비싼 영양제 먹을 필요 없어요. 영양제 먹고 집에 가만히 앉아 있을 게 아니라 나가서 춤을 배웁시다!”

김동욱 기자 kdw128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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