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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대법 판례에 또 발목… 장선우 감독 ‘긴급조치 배상’도 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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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대법 판례에 또 발목… 장선우 감독 ‘긴급조치 배상’도 기각

입력
2019.06.19 04:4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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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전 대통령 배상 불발 이어 

 “개별 가혹행위 증거부족” 되풀이 

장선우 영화감독. 한국일보 자료사진
장선우 영화감독. 한국일보 자료사진

유신정권의 긴급조치(유신헌법에 규정된 대통령의 특별조치로 국민의 자유ㆍ권리를 잠정적으로 제한할 수 있는 것)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구속됐던 장선우(67) 영화감독에 대해, 법원이 국가로부터 피해 배상을 받을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긴급조치는 위헌이지만, 배상할 수 없다”는 양승태 대법원 판결이 아직까지 효력을 발휘한 셈이다.

18일 법원 등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3부(부장 김선희)는 13일 장 감독 등 ‘오둘둘 시위’에 참여했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됐던 8명과 가족 33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총 7억5,000여만원을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체포 당시 적법절차를 지키지 않고 구타 등 가혹행위를 했다”면서 “국가가 불법행위를 저질렀다”고 판단했다.

다만, 재판부는 원고들 중에서 장 감독과 최모씨에 대해서만은 배상 청구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장 감독 등이 개별적으로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기각 이유를 간단히 밝혔다.

영화 ‘경마장 가는 길’, ‘꽃잎’, ‘거짓말’ 등을 감독하며 1990년대 대표 영화감독 중 한 사람인 장 감독은, 오둘둘 시위 당시 서울대 인류학과 71학번으로 시위에 참가했다. 1975년 5월 22일의 오둘둘 시위는 그해 5월 13일 긴급조치 9호(유신헌법에 반대하거나 반대운동을 보도하면 영장 없이 체포한다는 내용)가 나온 이후 처음으로 발생한 학생 시위다. 당시 서울대에 모인 학생 500여명은 박정희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며 자결한 선배 김상진 열사를 애도하는 추도식을 마친 뒤 “독재타도”를 외치며 학교 밖으로 행진했다. 고 김근태 전 의원 등과 함께 시위 주동자로 지목된 장 감독은 지명수배돼 반 년 동안 도피생활을 하다 1975년 12월 체포됐다. 서울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 대공분실에 끌려가 구타 당했고 6개월간 구금됐다. 이듬해 1심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고, 2심에서 그대로 확정됐다.

장 감독은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중정 요원이 3일 밤낮을 재우지 않고 ‘김근태 행방을 대라’며 온 몸을 구타하던 기억이 선명하다”며 “같이 중정에 끌려갔는데 나만 기각당한 이유가 뭔지 의아하다”고 심경을 밝혔다. 그는 “100평 규모 방 안에 혼자 묶인 채 조금이라도 졸려고 하면 누가 들어와서 구타했던 기억이 난다"고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그는 입영제외 대상자임에도 이 사건 때문에 군대에 강제징집 당했고, 공무원ㆍ공기업ㆍ대기업 취직을 금지 당하는 삼중의 불이익을 겪었다. 영화계에 발을 들이면서도 본명(장만철) 대신 ‘장선우’라는 예명을 써야 했다.

장 감독이 끝내 피해배상을 받지 못한 것은, 이번 재판부가 2014년 양승태 대법원의 판례를 따랐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당시 대법원은 “위헌임이 선언되기 전 긴급조치 위반으로 유죄를 선고한 것이 국가의 불법행위는 아니다”면서 “수사기관의 구체적 위법행위가 있어야 배상할 수 있다”고 했다. 지난해 불거진 사법농단 의혹에서는 양 대법원장이 2015년 8월 청와대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면담하며 상고법원 도입 필요성을 설명했고, 긴급조치 배상 판결을 국정운영 협조 사례로 든 사실이 확인됐다.

장 감독 외에도 배상을 받지 못한 피해자는 적지 않다. 최근 서울중앙지법이 판결한 긴급조치 사건 9건을 분석한 결과, 원고 179명 중 배상을 받은 이는 63명(35%)에 불과했다. 긴급조치로 구속됐던 직접 피해자 34명 중에서는 10명(29%)만이 배상책임을 인정받았다. 유신정권이 남긴 기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진술의 구체성 등 애매한 기준을 근거로 배상책임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희호 여사 발인 전날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등의 긴급조치 피해를 배상할 수 없다는 판결(한국일보 6월 17일자 15면)이 나오는 등 법원의 기각 판결이 잇따르는 것을 두고 “다 같은 피해자인 것을 뻔히 아는데 누구는 배상하고 누구는 배상하지 않는 것이 형평성에 맞냐”는 지적이 나온다. 장 감독 사건을 대리한 이정일 변호사는 “국가폭력 피해자에게 가혹행위 사실에 대한 입증책임을 과도하게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면서 “왜 법원 스스로 양승태 대법원이 남긴 잘못된 기준을 바로잡지 않느냐”고 말했다.

정반석 기자 banseok@hankookilbo.com

장선우 감독이 제작한 영화 ‘꽃잎’의 한 장면. 5.18 광주의 참상 속에서 정신을 잃은 소녀가 등장한다. 장 감독은 유시민 작가 등과 1980년 5.15 서울역 집회를 주도했다가 5.18 계엄령으로 체포돼 합수본부에 함께 끌려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장선우 감독이 제작한 영화 ‘꽃잎’의 한 장면. 5.18 광주의 참상 속에서 정신을 잃은 소녀가 등장한다. 장 감독은 유시민 작가 등과 1980년 5.15 서울역 집회를 주도했다가 5.18 계엄령으로 체포돼 합수본부에 함께 끌려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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