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조치 9호는 위헌이지만
국가가 배상할 책임은 없어”
재판거래 양승태 대법 판례 유지
법원이 고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긴급조치 9호’ 피해를 배상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놨다. 이로써 “긴급조치는 위헌이지만 국가가 배상할 책임은 없다”던 과거 양승태 대법원의 모순적인 판결도 그대로 유지되게 됐다. 법원 판결은 공교롭게도 김 전 대통령 부인인 이희호 여사의 발인 전날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3부(부장 김선희)는 13일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수감됐던 김 전 대통령을 대신해 부인 이 여사와 아들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이 소송에는 유신정권 최대 반정부선언사건인 ‘3.1명동사건’에 참여했다가 유죄를 선고 받은 함세웅 문정현 신부와 고 윤보선 전 대통령, 문익환 함석헌 목사의 유가족 등 75명이 원고로 참여했으나 모두 패소했다.
긴급조치는 박정희 정권이 유신반대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고안한 도구로 그 가운데 ‘위반 시 영장 없이 체포한다’는 내용을 담은 9호가 가장 악명 높았다. 이에 재야인사들은 1976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삼일절 기념미사에서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며 맞섰다. 유신정권을 '독재정권, 일인독재'로 규정하고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이 있다"면서 △긴급조치 철폐와 민주인사 석방 △의회정치 회복 △사법권 독립 등을 촉구한 것이다. ‘정부 전복 사건’이라며 분노한 유신정권에 의해 김 전 대통령과 이 여사는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고, 관련자 18명이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다음해 대법원은 김 전 대통령 등에게 징역 5년 실형을 확정했다.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은 2010년 이용훈 대법원이 “긴급조치 1호는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놓으면서 시작됐다. 이듬해 이 여사를 비롯한 유족들이 재심을 청구했고 2013년 7월 서울고법 형사8부(부장 이규진)는 이 여사 등 유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김 전 대통령을 비롯한 15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이 부장판사는 “긴급조치 9호는 여기 있는 피고인과 가족에게 말씀드리기 조차 부끄러울 정도로 문제가 많았다”면서 “피고인들의 인권을 위한 헌신과 고통이 이 나라 민주주의 발전의 기틀이 됐다, 깊은 사죄와 존경의 뜻을 담았다”고 위로의 말까지 전했다.
명예회복과 달리 배상의 길은 멀었다. 이 여사 등이 “위헌인 긴급조치에 따라 반국가행위자로 처벌한 국가의 불법행위로 고통받았다”며 국가배상을 청구했지만 양승태 대법원이 2014년 “긴급조치는 위헌이되 국가가 배상할 책임은 없다”고 앞뒤가 맞지 않은 판결을 내리면서 제동을 걸었다. 올 4월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7부가 “긴급조치 자체가 위헌인 만큼 그로 인한 수사와 재판도 위법하기 때문에 국가에 배상 책임이 있다”고 대법원 판결에 반기를 들기도 했지만 김 전 대통령 사건을 담당한 재판부는 양승태 대법원 판결에 안주하고 말았다.
더구나 양 전 대법원장이 박근혜 정부와 거래하기 위해 긴급조치 배상 판결까지 활용한 정황이 사법농단 수사에서 밝혀진 이상, 대법원 판례를 유지할 이유는 크지 않다는 지적이다. 소송을 맡은 김진영 변호사는 “하급심 판사들 스스로 용기 있는 판결을 내놓아야만 양승태 대법원의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반석 기자 banse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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