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2막] 교통약자 지하철 환승 지도 만드는 시니어들
장철수(58ㆍ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 차상현(67) 조순길(63) 안민경(53) 씨가 6월 8일 인천시 환승역 7곳을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교통약자용 환승역지도 사전조사를 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협동조합 무의 제공

“요즘은 대통령보다 장애인이 더 대접 받아!”

협동조합 ‘무의(無意)’의 홍윤희(45) 이사장은 2년 전 휠체어를 탄 장애인과 ‘서울시 교통약자 환승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노원역 엘리베이터를 타던 중 한 노인으로부터 이 같은 소리를 들었다. 무의는 지난 2015년 ‘장애가 무의미해지는 세상’을 기치로 만들어진 시민단체다. 홍 이사장에게 소리를 지른 노인은 “백화점 장애인 주차장에 내 차를 대지 못하게 한다”고도 화를 냈다.

소수자와 공존하기에 대한 교육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던 노년층이 이렇게 공공 장소에서 장애인 등 자신보다 더 약한 사람에 대한 혐오를 표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휠체어를 타는 딸이 있는 홍 이사장은 이런 일을 겪으면서 노년층의 의식 개선을 위해 할 일을 찾던 중, 교통약자를 위한 지하철 환승지도를 제작하는 일을 시니어가 직접 해 보도록 하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휠체어를 직접 타고 복잡한 지하철 환승역을 조사하다 보면 우리 사회가 장애인을 비롯한 약자에게 얼마나 불친절한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안민경(53), 장철수(58), 조순길(63), 차상현(67)씨가 지난해 5월 서울시 ‘도심권50플러스센터’를 통해 홍 이사장과 만나게 된 데는 이 같은 배경이 있었다. 도심권50플러스센터는 은퇴자들에게 일자리나 봉사활동 등을 통해 소개해 주고 창업이나 직업 교육도 하면서 퇴직 후 사회활동을 지원하는 서울시 산하 ‘50플러스재단’ 소속 기관이다.

이들을 비롯한 총 6명의 50~60대 은퇴자들은 먼저 한 달 간 ‘유니버설 디자인’과 현장 조사 방식에 대한 교육을 받고 나서, 주 2, 3회씩 반년간 서울 지하철의 28개 환승역 지도 제작을 위한 현장 조사를 실시했다. 3인 1조를 이루어 한 사람은 실제로 휠체어를 타고 역에서 환승을 해보면서 불편한 점을 이야기하고, 다른 한 사람은 이를 기록하며, 나머지 한 사람은 휠체어를 밀어주면서 이동하는 방식이었다.

올해 초 서울시 환승역 지도 제작을 마무리한 후, ‘무의’는 인천교통공사로부터 교통약자 이동권 증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인천 지하철의 환승역 지도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지난해 말까지 현장 조사에 참여해 끝까지 프로젝트를 완료한 시니어 6명 중 4명이 다시 한번 뜻 깊은 일에 참여하길 원했고, 지난 8~11일 인천시 7개 환승역을 휠체어를 타고 누비며 지도 제작을 위한 조사를 마쳤다. 반년 만에 다시 뭉친 4명의 시니어는 휠체어를 타고 환승할 수 있는 최단 거리를 찾아 내면서 동시에 휠체어가 통과하기에 좁은 입구, 휠체어 눈높이에서 보기 어려운 안내문 등 교통약자의 편의를 위해 개선해야 할 사항도 꼼꼼히 메모했다.

차상현(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 안민경 장철수 조순길 씨가 6월 8일 인천시 환승역을 휠체어를 타고 돌면서 교통약자용 환승역지도 사전조사를 하고 있다. 협동조합 무의 제공
◇“70 넘으면 사회적 약자” 사회공헌 활동에 보람

인천 지하철 환승역 조사에 참여한 은퇴자 4명 중 최연장자인 차상현씨는 구청 공무원으로 재직하다 10년 전인 2009년 정년 퇴직했다. “평생 회사만 죽기 살기로 다니다가 관두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던 차씨는 등산과 여행을 다니면서 2, 3년을 쉬었다. 노는 것도 슬슬 지겨워질 때쯤 공무원연금공단에서 전화가 왔다. 정식으로 돈을 버는 일자리는 아니지만 소정의 교통비와 식비 정도를 받으며 할 수 있는 봉사활동 자리가 있는데 해 보겠느냐는 제의였다.

심심한데 소일거리 삼아 해 볼까, 하고 시작한 첫 번째 일은 초등학교 저학년생의 하교 도우미. 아이들의 등하교를 안전하게 이끌어주는 역할이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갈 데가 있다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는 차씨는 봉사활동에 재미를 붙이고 공단을 통해 다양한 봉사활동을 소개 받았다. 서울의료원에서 입원 환자의 대화 상대를 해 주고 식사와 목욕, 산책을 돕는 일이 두 번째로 했던 일이다.

지난해부터는 도심권50플러스센터를 통해 보수는 적지만 의미가 큰 봉사활동을 찾아 해 오고 있다. 서울 지하철 환승지도 제작에 참여했을 때는 직접 휠체어를 타고 이동해 보면서 느낀 점이 많았다. 차씨는 “나이 70이 넘으면 사회적 약자”라면서 “장애인만 길을 못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같은 노인도 지하철 역에 처음 가면 깜깜하다”고 말했다. 그는 “휠체어를 타고 직접 지하철을 다니면서 그 사람의 입장이 돼 본 후론 지하철역에 가도 새로운 것이 보인다”고도 했다. 승강장 열차 사이가 너무 많이 벌어져 있거나, 휠체어의 눈높이로 보면 읽을 수 없는 곳에 표기된 안내문구 등이다.

앞으로도 여생을 계속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활동을 하며 보내고 싶다는 차씨는 더 많은 시니어가 봉사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제안도 내놓았다. “내가 했던 봉사활동이 마일리지처럼 차곡차곡 쌓이고, 나중에 내가 더 늙고 힘이 없어졌을 때 그만큼의 복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제도가 도입됐으면 좋겠다.”

차상현(왼쪽부터) 조순길 안민경씨와 협동조합 무의의 홍윤희 이사장, 나정민 연구원이 지난 5월 20일 인천시 교통약자용 환승지도 제작을 위한 사전 모임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협동조합 무의 제공
◇“마음의 거품을 지운 후 새로운 세계에 눈 떴다”

조순길씨와 안민경씨는 대학과 대기업 등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다 퇴직하고 각각 부동산중개인과 어린이집 원장으로서 8~10년간 열심히 살았다. 창업자로 변신한 후 정신 없이 일하다 은퇴했으나, 잠시 쉰 후 그 다음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조씨는 처음에는 제대로 보수를 받는 일을 하고 싶었지만 나이 예순에 그런 일자리를 여간해선 찾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마음의 거품을 지우고서야” 하루 3, 4시간 정도만 일하면서 교통비와 식비 등으로 월 20여만원 정도의 사례비를 받는 봉사활동을 하기로 결심할 수 있었다. 안씨도 돌봄 등 사회서비스 일자리를 알아보다가 자격증이 없어서 문턱을 넘지 못하고, 코딩 교육을 받으러 학원을 다니기 위해 면접을 보았으나 학원 측이 재취업이 가능한 사람을 우선시해 탈락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던 중 도심권50플러스센터에서 연락을 받아 처음으로 참여한 활동이 ‘무의’의 지하철 환승지도 제작이었다. 조씨는 이 활동과 홍 이사장과의 조우를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고 표현했다. 이전까지 먹고 살기에 바빠 다른 사람을 챙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자신과 가족만 생각하면 살았지만, 직접 휠체어를 타고 장애인의 입장이 되어 봉사활동을 하면서 큰 보람을 느끼게 됐다는 것.

그는 특히 ‘무의’에서 받은 ‘유니버설 디자인’에 대한 교육이 매우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유니버설 디자인이란 제품이나 시설, 서비스 등을 이용하는 사람이 성별ㆍ나이ㆍ장애ㆍ언어 등의 이유로 제약을 받지 않도록 설계하는 것을 말한다. “많은 노년층이 단지 모르기 때문에 장애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면서 “정부나 지자체가 공익 광고 등 노년층의 인식 전환을 위한 교육을 적극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장철수(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 안민경 차상현 조순길 씨가 6월 8일 인천시 환승역을 휠체어를 타고 돌면서 교통약자용 환승역지도 사전조사를 하고 있다. 협동조합 무의 제공
◇“세상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곳”

국내 유수의 대기업을 30여년 다니며 임원까지 지냈던 장철수씨는 지난 2010년 강원도와 충청남도의 농촌 지역 지사장으로 근무하면서 독거노인이나 이주자 가정 등을 대상으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2017년 4월 퇴직한 장씨는 “혼자서 세상을 살 수 없는데, 30년 동안이나 직장생활을 하고 무사히 퇴직하는 큰 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주변의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함께 할 수 있는 사회공헌 활동을 알아보던 중 지하철 환승역 지도 만드는 무의의 활동을 알게 됐다.

장씨는 장애인 등 교통 약자가 지하철에서 편리하게 환승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이들에게 불편하게 돼 있는 시설이나 안내문 등을 찾아 수정하는 일은 지자체에서 응당 해야 하는 일인데, 민간단체를 이끄는 홍 이사장이 직접 나선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관련 교육을 받고 조사 현장에서 만난 시니어들과 교류하면서 배운 것이 많았다는 장씨는 “세상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노력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변화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장씨 부부는 올해부터 2년을 예정으로 제주도에 내려가 휴식 중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제주의 각종 박물관과 유적 등지를 다니면서 시청각 자료에 청각장애인을 위한 안내나 설명이 부족하지 않은지 살피고 있다. 최근 삼성혈을 방문한 장씨는 홍보 영상에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이나 수어 등을 첨부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는데, 관리하는 곳에서 자체적으로 개선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가만히 있으면 그대로지만 문제 제기를 하면 바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앞으로도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해 더 적극적으로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최진주 기자 parisc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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