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처형과 유배 
정조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최필공은 참수형에 처해지자 자신의 피를 손에 묻혀 '보혈'(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흘린 피)이라고 외쳤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공
 ◇추국청의 두 형제 

다산이 곤장 30대를 맞고 실려 나간 이튿날인 1801년 2월 12일, 책롱 사건의 당사자인 정약종이 추국청에서 심문을 받았다. 오전 오후로 잇달아 열린 추국에서 정약종은 시종 당당했다. 모진 형벌을 받아 죽더라도 천주 믿은 일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천주야말로 온 천하의 위대한 임금이요 훌륭한 아버지시니 천주를 섬기는 도리를 모르면 이는 천하의 죄인이요, 살아있어도 죽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하지만 관련자를 대라는 심문에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오후 심문에서 책롱 속에서 나온 정약종의 일기가 문제가 되었다. 일기 속에 “나라에 큰 원수가 있으니 임금이다. 집안에 큰 원수가 있으니 아버지다(國有大仇, 君也. 家有大仇, 父也)”라고 한 구절이 특히 문제가 되었다. 앞뒤 맥락을 잘라내고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무리로 천주교를 싸잡아 힐난했다. 특별히 돌아가신 임금에 대해 불측한 말을 들어 있는 것을 문제 삼았다. ‘눌암기략’에는 정약종이 공초에서 선왕을 무고했다고 썼다. 무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삭제되고 없지만, 앞뒤 맥락으로 보아 정조 임금이 천주교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았다는 정도를 넘어, 속으로는 믿었다는 내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일 추국청에서는 정약종에 대해 하루도 더 이 세상에 살도록 용납할 수 없다는 보고를 올렸다. 개전의 정이 없을 뿐 아니라, 자백의 가능성도 없다고 본 것이다.

그 이튿날인 2월 13일에는 다산이 다시 끌려 나왔다. 이때 다산은 평소 그답지 않게 최창현을 고발했고, 조카 사위 황사영은 죽어도 변치 않을 인물로, 자신의 원수라고까지 진술했다. 다산은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김백순과 홍교만을 더 지목했고, 묻기도 전에 천주교도를 체포해 신문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알려 주었다. 상황이 워낙 다급했다. 멸문의 화가 저만치서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자기가 말한 천주교 지도자들의 이름은 어차피 나올 수밖에 없는 이름이기도 했다. 같은 날 추국장에 끌려 나온 총 회장 최창현은 다산이 너를 사학의 괴수로 지목했다는 진술을 들이대자, 지난 날 자신이 천주를 배반했던 일을 깊이 뉘우친다며 천주를 위해 기쁘게 죽겠다고 말했다.

 ◇이승훈과 다산의 엇갈림 

이승훈도 같은 날 끌려 나왔다. 추국청에서 다산이 자기 집안이 너 때문에 천주학에 빠지게 되었으니 너를 원수로 여긴다고 했고, 또 네가 1785년 이후 배교했다고 일관되게 주장하나 1785년 이후에 정약용이 너를 천주교 본명인 베드로로 부르며 교유한 증거를 인정했다고 하자, 이승훈이 대답했다. “지금 정약용이 저를 원수로 여긴다면 저 또한 그를 원수로 여길 것입니다.” 이로써 두 사람은 다시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이승훈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계속 변명하며 발뺌했다. 명백한 증거를 들이대면 그제서는 말을 슬쩍 바꿨다. 자신에게 조금 유리하겠다 싶으면 없는 말을 지어내 다른 사람을 끌어들였다. 정약전도 이승훈의 물귀신 작전에 말려 끌려 들어왔다. 하지만 정약전에 대한 심문을 마친 뒤 심문관은 특별히 매질하며 심문할 단서가 없다고 문서에 써서 올렸다. 추국청은 이승훈에 대해 “오락가락하며 진술을 번복하는 것이 매우 악랄하다”고 보고했다.

당시 이승훈 형제와 다산 형제가 모두 끌려와 심문을 받았는데, ‘눌암기략’에는 당시 이들의 엇갈린 태도에 대해 기술한 한 단락이 나온다. “정약용과 이치훈은 비록 사학을 두호한 죄가 있지만 본래 사학 죄인으로 다스리지는 않았다. 정약용이 국청으로 들어와 여러 천주교도들이 행한 흉악한 일들의 내용을 자세히 진술하였고, 혹 사람을 물리쳐 달라고 청하고는 그들을 기찰하고 체포하는 핵심 정보까지 알려주었다. 그러다가도 말이 두 형에게 미치면, 반드시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떨구었으므로, 심문관이 이 때문에 마음이 흔들렸다. 이치훈은 말이 재빠른데다가 스스로 자신이 천주교를 배척한 일을 밝히려 하면서 그 형 이승훈이 숨기려 한 일까지 많이 폭로하였다. 그래서 추국에 참여한 여러 사람이 그를 개돼지처럼 보았다. 이 때문에 정약용과 이치훈은 받은 형벌의 경중이 전혀 달랐다고 한다.”

다산은 2월 15일, 17일에도 연이어 끌려 나와 추국을 당했다. 심문장에서 다산은 천주교의 고급 정보를 다 털어놓았다. 핵심 인물들을 지목했고, 체포 방법까지 일러주었다. 심지어 주문모 신부의 거처까지도 알려주었다. 이 일로 다산은 심문관들에게 동정을 샀다.

 ◇다산을 살린 정약종의 문서 

한편 추국이 진행될수록 다산에게 유리한 증거가 속속 나왔다. 다산을 죽음의 수렁에서 결정적으로 건져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셋째 형 정약종이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정약종의 책롱 속에서 튀어나온 문서였다.

문서 속에 있던 다산이 황사영에게 보낸 친필 편지에는 “재앙의 기색이 박두했는데도 이를 하라고 종용한다면 내가 장차 손수 베겠다(禍色迫頭, 慫慂爲此, 吾將手刃)”는 말이 들어 있었다. 자기들끼리 주고받은 편지 속에서도 “정령(丁令)의 말은 모두 공갈이니 겁먹을 것 없네(丁令之言, 都是恐喝, 不足動心)”라거나, “정령이 안다면 반드시 큰 일이 일어날 걸세(丁令知之, 則必生大事)” 같은 말이 나왔다. 이는 모두 다산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문서 조사 중에 새롭게 밝혀진 사실이었다. 가장 핵심 증거품에서 다산이 천주교에 대해 일관되게 배척의 태도를 견지했다는 점이 입증된 것이다. 정령(丁令)은 다산이 당상관을 지냈으므로 정 영감을 줄여서 쓴 표현이었다. 다산 집안에서 영감의 호칭으로 불릴 사람은 그 밖에 아무도 없었다.

 ◇교회의 중심축을 무너뜨린 잇단 처형 

2월 21일에는 형 정약전의 스승인 권철신이 옥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는 예전 주어사에서 강학회를 열어, 유가 경전과 함께 천주학의 교리서를 공부했었다. 나흘 뒤인 2월 25일에 감옥에 갇힌 천주교도 전원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 삼흉의 수괴로 꼽혔던 이가환마저도 혹독한 고문 끝에 옥중에서 6, 7일간 곡기를 끊고 지내다가 세상을 떴다. 여기저기서 거목들이 쓰러져 나갔다.

이승훈과 최필공, 최창현, 홍교만, 홍낙민, 정약종 등 6명은 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조선 천주교회의 대들보가 한 날 한 시에 목이 떨어졌다. 형장에서 보여준 이들의 죽음 장면은 참으로 장엄했다.

정조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최필공은 결연한 표정으로 형장에 들어가 목을 늘였다. 경험이 부족했던 망나니의 칼날이 허공을 헛놀다가 그의 목을 치니 칼날이 절반쯤 들어가 박혔다. 최필공은 피가 주루룩 흐르는 목덜미로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제 손에 묻은 피를 보며 ‘보혈(寶血)!’이라고 외쳤다. 그 순교의 피를 먹고 조선의 천주교회가 훗날 거목으로 우뚝 설 터였다. 두 번째 칼날이 허공을 가르자 그의 목이 땅 위에 굴렀다.

예전에 몇 차례의 배교를 통해 목숨을 건졌던 홍낙민은 잔혹한 형벌로 뼈가 바스러졌는데도 다시는 천주를 배신하지 않고 진리를 위해 죽겠노라며, “이제야 내 마음이 행복하고 편안하다”며 기뻐했다. 형장으로 가는 수레에 앉은 그의 표정은 환하게 빛났다. 그는 이조정랑의 높은 지위까지 오른 관리였는데, 평소 공무를 집행하면서도 묵주기도를 빠뜨리지 않았다. 홍낙민의 아들 홍낙영은 다산의 큰형 정약현의 셋째 사위였다.

이승훈도 이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는 끝내 자신의 배교를 철회하지 않았다. 나라는 정작 그에게 천주교 삼흉의 죄를 물어 죽였는데 그는 배교자인 상태로 죽었다. 사흘 뒤 그의 시체가 집으로 운구 되었지만 아무도 조문을 오지 못했다. 이 땅에 천주교의 씨앗을 처음 심었던 그의 최후가 이랬다. 그는 두 번 죽었고, 어느 쪽에서도 기억하려 하지 않는 배신의 이름으로 남았다.

 ◇하늘을 보며 죽겠소 

정약종의 처형 장면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형장으로 끌려가는 그의 표정에 두려운 빛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도중에 목이 마르다며 그가 물을 청했다. 곁에서 나무라자, 그는 자신이 물을 청하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모범을 본받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목을 베기 직전, 그가 돌연 큰 소리로 외쳤다. “스스로 존재하시고, 무한히 흠숭하올 천지만물의 주재자이신 이가 그대들을 창조하셨고 지켜주십니다. 모두 회개하여 본분으로 돌아오십시오. 어리석게 멸시와 조소를 하지 마시오. 당신들이 수치와 모욕으로 생각하는 것이 내게는 영원한 영광이 될 것입니다.”

형리가 더 말을 잇지 못하게 그의 입을 막고, 나무토막 위에 머리를 대게 했다. 정약종은 놀랍게도 올려다보며 눕더니 천주가 계신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죽겠다고 선언했다. 사형수가 제 목으로 떨어지는 칼날을 똑바로 보면서 죽겠다고 말한 것이다. 생전 처음 겪는 일이어서, 칼을 잡은 망나니가 오히려 넋이 나갔다. 두려워 칼을 내려치지 못하는 그를 곁에서 윽박지르자, 쳐든 망나니의 칼날이 마지못해 내려왔다.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그 칼에 정약종의 목은 절반 밖에 끊어지지 않았다.

정약종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았다.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가슴으로 쿨럭쿨럭 흘러 내렸다. 그는 크게 성호를 긋더니 다시 하늘을 보고 누었다. 두 번째 칼날이 다시 지나고 나서야 신체와 목이 분리되었다. 그의 나이 42세였다.

 
 ◇유배지로 떠나는 다산 

다산과 정약전은 옥중에서 정약종과 이승훈 등의 참혹한 죽음 소식을 들었다. 뒤이어 자신들만 죽음을 면하고 유배형으로 감형되었다는 극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이가환과 자형 이승훈이 죽었고, 형님이 죽었고, 사돈인 홍낙민이 죽었다. 정약종이 처형된 이튿날인 2월 27일 새벽에 두 사람은 옥에서 풀려났다. 다산은 배교와 검거 협조의 대가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정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유배가 결정되었고, 다산은 경상도 장기현(長鬐縣)으로 떠나야 했다.

집에서 매질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겨우 추슬러, 2월 29일 다산은 유배지로 떠났다. 돌아보니 마흔 생애가 참으로 파란만장했다. 남대문을 나서 석우촌(石隅村)까지 가족들이 따라왔다. 한강을 건널 때는 두 아들만 남았다. 사평촌(沙坪村)에서 그날 밤을 묵고, 2월 30일에 두 아들과도 작별했다. 이젠 혼자였다. 앞길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언제 돌아올지도 알 수 없었다. 신지도로 떠난 형님의 소식은 이제 물을 수도 없을 터였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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