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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 아닌 ‘임신 중지’… 어떤 여성에게는 기쁜 선택일 수 있다

입력
2019.05.30 17:12
수정
2019.05.30 19:44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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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폐지공동행동 단체 회원들이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오자 환호하고 있다. 홍인기 기자
낙태죄폐지공동행동 단체 회원들이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오자 환호하고 있다. 홍인기 기자

“낙태는 당시 나의 정신과 신체 건강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나는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어떤 이유에서라도 낙태를 해야 한다면, 당신 역시 그래야 한다.”(영국 배우 자밀라 자밀)

최근 미국 앨라배마주에서 모든 임신중지(낙태)를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된 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쏟아진 여성 스타들의 ‘고백’ 중 하나다. 여성들은 임신한 아이를 낳지 않을 자유가 있음을, 또 안전하게 수술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확인하며 법안을 비판했다. 미국에선 51개 중 7개 주가 임신중지에 ‘죄’라는 굴레를 씌웠다. 미국이 처음부터 임신중지 후진국은 아니었다. 1973년 임신 28주까지 임신중지를 허용하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도 했었다.

한국은 어떤가. 지난달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66년 만에 낙태에 붙은 ‘죄’라는 수식어를 막 끊어냈지만, 후속 논의는 붕 떠 있다. 호주 애들레이드 대학에서 젠더학과 사회학을 강의하는 에리카 밀러가 쓴 ‘임신중지: 재생산을 둘러싼 감정의 정치사’는 신뢰할 만한 참고문헌이다. 책에선 ‘낙태’ 대신 ‘임신중지’라는 말을 썼다.

저자는 1970년대부터 호주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임신중지 허용 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며 임신중지 대한 ‘상식적인 감정’이 어떻게 통제돼 왔는가를 분석한다. 그는 임신중지 허용을 주장한 진영조차 ‘드문 임신중지’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었음을 지적한다. ‘임신중지는 드문 일이어야 한다’는 명제가 임신중지를 택한 여성에게 수치심을 심어 준다는 면에서 임신중지 반대론자의 주장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호주 애들레이드 대학에서 젠더학과 사회학을 강의하는 에리카 밀러가 쓴 ‘임신중지: 재생산을 둘러싼 감정의 정치사’는 신뢰할 만한 참고문헌이다. 책에선 ‘낙태’ 대신 ‘임신중지’라는 말을 썼다. 게티이미지뱅크
호주 애들레이드 대학에서 젠더학과 사회학을 강의하는 에리카 밀러가 쓴 ‘임신중지: 재생산을 둘러싼 감정의 정치사’는 신뢰할 만한 참고문헌이다. 책에선 ‘낙태’ 대신 ‘임신중지’라는 말을 썼다. 게티이미지뱅크

저자는 임신중지를 경험한 여성들이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이 ‘안도감’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심각한 ‘애통함’을 느끼는 여성은 예상외로 적다. “가슴 찢어지는 결정을 하고 그 결과 지울 수 없는 애통함과 죄책감으로 고통받는 여성”이라는 이미지가 임신중지에 대한 수치와 낙인을 내면화하게 만든다는 것이 저자의 논리다.

‘어떤 여성들에게는 임신중지가 기쁜 선택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수치스럽지 않은, 미안하지 않은 임신중지를 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 책이 조언하는 한국의 입법이 지향해야 할 방향이다.

임신중지: 재생산을 둘러싼 감정의 정치사

에리카 밀러 지음ㆍ이민경 옮김

아르테 발행ㆍ352쪽ㆍ2만4,000원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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