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퇴 이후 하루하루 시간을 그냥 허비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삶에서 재미를 찾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 분노를 표출하기도 합니다. 은퇴 후 삶은 어때야 하는 걸까요. <한국일보>는 우아하고 품격 있게 인생 2막을 살고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매주 수요일 연재합니다.

27일 경기 시흥 노용범세무사사무소에서 노용범 세무사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시흥=박세인 기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생겼을 때 인터넷 검색사이트를 찾아 해답을 구하는 것은 현대인의 일상이 됐다. 검색으로 자신의 상황에 딱 맞는 답변을 구하지 못했다면 해당 분야에 전문적 지식이나 경험이 있는 사람의 답변을 기대하며 질문을 올리는 것이 정해진 수순이다. 국내 최대 포털사이트 네이버가 제공하는 ‘네이버 지식인’ 서비스는 이러한 갖가지 질문에 기꺼이 자신의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고수들이 있어 늘 문전성시를 이룬다.

‘지식인’에는 오랜 기간 현업에서 쌓아 온 경험을 바탕으로 노익장을 과시하는 사람이 많다. 노용범(77) 세무사도 그 중 하나다. 팔순에 가까운 나이지만 그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모두에서 팔팔한 현역이다. 그는 네이버에서 하루에 30~50개씩, 일주일이면 300개에 가까운 세무 관련 질문에 답변을 단다. 처음에는 양손 검지손가락만 쓰는 ‘독수리 타법’으로 더듬더듬 글을 썼지만 이제는 컴퓨터는 물론이고 스마트폰으로도 능숙하게 답변을 단다. 노씨가 네이버에서 세무상담을 시작한 2009년 이래 ‘도움을 받았다’고 응답한 사람만 6만명에 가깝다.

노씨가 세무사 자격증을 취득한 해는 반세기 전인 1970년이다. 그러나 이듬해 취직해 평생 직장이 된 일터는 농어촌개발공사(현 농수산식품유통공사ㆍaT)였다. 1997년까지 30년 가까이 근무하면서 경리부장, 기획본부장 등을 역임했지만 세무사 자격증을 쓸 일은 거의 없었다.

노씨가 묵혀둔 자격증을 꺼내들고 경기 시흥시에 개인 사무소를 차려 본격적으로 세무사 활동을 시작한 때는 환갑에 가까워진 2001년이었다. 세무사 자격을 취득한 지 30년 이상 지났지만 실무 경험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부족한 경험을 채우기 위해 개업에 앞서 1년간 세무사 고시 학원에 등록했다. 현직 세무사가 학원을 다니면서 공부한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후배 세무사 격인 강사가 수강생이 세무사인 것을 알고 몹시 부담스러워 했지만 공백을 메우려면 어쩔 수 없었다”며 “다시 세무사 시험을 친다는 마음으로 개업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네이버 지식인의 노용범 세무사 페이지. 노씨는 세무 상담으로 2015년과 2018년 두 차례 '분야별 지식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네이버 캡쳐
◇암 투병 중 ‘지식인’으로 거듭나다

노씨가 네이버 지식인에 본격적으로 답변을 달기 시작한 것은 2009년부터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너무 심심해서”였다. 그 전에도 재미삼아 한두 차례 답변을 달긴 했지만 당시에는 지금처럼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노씨가 지식인에 적극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당시는 악성림프종 판정을 받고 항암치료를 받을때였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치료 전후 2~3일씩 일주일 간 병원 신세를 져야 했는데 침대에 누워서 TV만 보는 것이 너무 지루했다고 한다. 그는 “한 번은 너무 심심해서 노트북을 가지고 (병원에)들어가서 네이버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몇 년 전 내가 달았던 지식인 답변에 댓글이 달린 걸 발견하게 됐다”며 “세무사 활동을 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게 있으면 답변을 해주면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고 말했다.

취미 삼아 답변을 달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일은 암환자였던 그에게 큰 위안이 됐다. 그 덕분인지5년 만에 완치 판정도 받았다. 노씨는 “의사가 ‘자주 보는 게 지겹지 않느냐’는 말과 함께 완치 판정을 내려줬다”며 “내 답변에 ‘고맙다’고 댓글을 달아준 사람들은 내가 암환자인지 몰랐겠지만, 그분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어쩌면 치료제가 됐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물론 오랜 항암치료에 따른 후유증 탓에 아직도 몇 개월에 한번씩 병원을 찾지만, 암으로 고통받던 시절에 비할 바는 아니다.

답변을 하다 보니 묘한 경쟁심리도 생겼다. 네이버는 2015년부터 매년 부문별 5명씩 ‘분야별 지식인’을 선정하고 있는데, 노씨는 원년 지식인(경제 분야)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지만 2016, 2017년엔 연거푸 고배를 마셨다. 절치부심 지난해에는 다시 지식인 타이틀을 되찾았다. 노씨는 “어린아이 같을지는 모르겠지만 분야별 지식인 선정에서 떨어지고 나니 더 열심히 답변을 달게 되더라”고 웃었다. 올해까지 만 10년째 지식인에 답변을 달다 보니 네이버가 부여하는 지식인 18개 등급 중 두 번째로 높은 ‘수호신’에 올랐다. 수호신 이상 등급을 가진 답변자는 200여 명에 불과하다. 지식인 등급이 올라간 것을 확인하는 것은 그의 소박하면서도 놓칠 수 없는 기쁨이다.

노용범 세무사가 네이버 지식인에 답변을 다는 모습. 컴퓨터 옆에는 조세 법전과 실무지침서, 계산기가 놓여 있다. 시흥=박세인 기자
◇지식인 답변은 취미생활이자 공부

노씨는 하루의 시작과 끝을 네이버 지식인과 함께 한다. 새벽 5시에 눈을 뜨면 밤새 올라온 질문을 읽어보면서 20건가량, 사무소에서 퇴근한 뒤에는 업무시간에 올라온 질문에 대해 20건가량 답변을 하는 식이다.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된 이후로는 출퇴근 시간에도 간단한 답변 한두 개씩은 달 수 있게 됐다고 한다. 그는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면서 뉴스 검색이나 동영상 시청, 모바일 게임을 하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한다”며 “답변을 쓰는 것을 일의 연장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게는 일종의 취미생활”이라고 말했다.

궁금증이 생기면 찾지 못하는 그다. 질문 중에 등기부 등본 같은 서류를 확인해봐야 하는 것이 있으면 따로 표시해 뒀다가 주말 나들이 삼아 서울로 가서 지하철역 무인발급기에서 해당 서류를 떼 본다. 세금 문제로 안타까운 사연을 호소한 질문자를 직접 만나 관할 세무서에 동행해 해결책을 찾아준 일도 있다.

노씨의 인터넷 세무상담은 재능을 기부하는 봉사활동에 가깝지만 스스로에겐 알찬 공부이기도 하다. 세무는 매년 세법이 바뀌고 정부 대책에 따라 각종 세제 혜택이 출몰하는 터라 꾸준히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여야 하는 분야다. 나아가 이러한 법조문 및 정책상 변화가 실제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체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무사 자격증을 취득한지는 50년이 됐지만 여전히 실무 경험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그의 입장에서 인터넷을 통해 만나는 질문들은 생생한 실무 사례에 다름 아니다. 세금은 뭇사람들의 관심사인 만큼 상담 활동을 하다 보면 업계 트렌드도 빨리 파악할 수 있다. 그는 “매년 세법이 개정될 때마다 어떤 분야가 바뀌는지 꾸준히 공부를 하고 있지만 실제 업무에 적용되지 않으면 ‘책 속의 지식’일 뿐”이라며 “남에게 무언가 가르쳐 주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오래 남는다더니, 지식인 상담을 하면서 알게 된 실무 지식이 자산이 됐다”고 말했다.

노씨는 답변을 할 때 책상에 한 뼘 두께의 조세 법전과 매년 새로 발간되는 세무분야별 실무해설서 등 책 여러 권을 꺼내놓고 질문에 알맞은 내용을 찾아본다. 실무해설서에는 세목별로 견출지를 붙여 관련 내용을 쉽게 찾을 수 있게 해놓고, 자주 답변하는 분야는 형광펜으로 표시해뒀다. 50년차 베테랑 세무사의 책이지만 마치 세무사 시험을 준비하는 고시생의 책을 보는 듯했다. 스스로가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어떻게든 해결하고자 하는 성격”이기도 하다.

이러한 노력 덕택에 노씨는 네이버 지식인에서 연말정산 관련 상담을 잘 하는 세무사로 소문이 났다. 매년 연말ㆍ연초가 되면 하루에 70개씩 답변을 올리기도 한다. 지난해부터는 부동산 양도소득세 관련 상담이 부쩍 늘었다.

네이버 선정 2019 분야별 지식인 인증 카드. 노용범 세무사 제공
◇”세무 상담은 평생 공부”

노씨가 세무사 활동을 시작한 때는 50대 후반, 네이버에서 상담을 시작한 때는 일흔에 가까운 나이였다. ‘늦깎이 세무사’인 그가 온라인 세상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것을 보면 ‘환갑이라는 나이가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가 아니다’고 외치는 것만 같다.

물론 그가 은퇴 후에도, 정기적으로 병원 생활을 하던 중에도 꾸준히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세무사라는 전문 자격증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는 세무사 시험에 합격한 이듬해 공기업에 입사하면서 나중에 이 자격증을 쓰게 될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젊을 때 공부했던 분야라고 생각하며 꾸준히 관심을 놓지 않았던 것이 그의 인생 황혼기를 윤택하게 하고 있다.

노씨는 3년 뒤 80세가 되면 세무사 활동에서 은퇴할 계획이다. 어느 날 세무서가 주최하는 간담회에 가보니 자신처럼 ‘머리가 허연’ 세무사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걸 깨닫고 머지 않아 후배들에게 길을 내줘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대신 “지식인 상담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하고 싶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공부하는 일을 평생의 취미로 삼겠다는 것이다.

노용범 세무사가 네이버 지식인에 답변을 달기 위해 실무 지침서를 살펴보고 있다. 시흥=박세인 기자

노씨의 사무실 벽 한 켠에는 ‘유비무환 일체유심조(有備無患 一切唯心造)’라고 쓰여진 액자가 걸려 있었다. 언뜻 보면 두 고사성어의 연관성을 발견하기 힘들지만, 은퇴 이후 세무사로 다시 일어서고 갑작스레 찾아온 암을 이겨낸 노(老) 세무사의 인생역정을 돌아보면 수긍할 만한 문구다.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관심분야가 있다면 틈틈이 공부를 해두세요. 지금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도 언제 반전이 생길지 모릅니다.”

박세인 기자 sa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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