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고 자란 나라를 처음으로 벗어난 때는 1989년 11월이었다. ‘나’를 찾겠다며, 혹은 ‘나’를 벗어나겠다며 명상수행이라는 아름다운 명분을 내걸고 떠났다. 한동안 머물렀던 인도의 아쉬람에는 깨달음을 얻겠다고 몰려든 여러 나라 사람들로 넘쳐 났다. 일본인도 가끔 눈에 띄었으나 대부분 유럽인이었다. 그들과 짧은 대화를 나누며 어울릴 기회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낭패감을 느끼곤 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주된 소통의 도구인 영어에 능숙하지 못해서였다. 간단한 문장 하나도 머릿속에서 빙빙 돌기만 할 뿐, 어렵사리 입 밖으로 튀어나와도 나조차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코앞에 있는 사람의 말도 잘 알아듣지 못했다. 타인의 속마음을 꿰뚫어 볼 수는 없지만, 태도나 말투로 짐작하건대, 영어가 능숙한 서구인들은 나를 말수가 적거나 유머 감각이 전혀 없거나 지적 능력이 좀 떨어지는 사람으로 간주하는 듯했다.
놀랍게도 나 또한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모국어로 말할 때 나는 재치있고 그럴듯하게 말하는 재주로 다른 이의 호감을 사는 사람이었다. 정말로 호감을 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논리적이면서 지루하지 않게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데 말이 어눌해지고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기 힘들게 되자, 그런 자신감은 와르르 무너졌다. 타인에게 부딪쳐 반사되는 나의 낯선 이미지는 혼란스러웠고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괴로움의 또 다른 이유는 나를 어린아이처럼 취급하거나 아예 무시하는 그들이 이전까지 내 머릿속에서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기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관점에서 쓴 세계사를 배웠고, 그들이 출연하는 영화를 보았으며, 그들의 감정과 사유로 충만한 소설들을 탐독했다. 정체성의 어떤 층위에서 그들과 나를 동일시했다. 하지만 그들 눈에 비친 나는 왜소하고 낯선 외모에, 말을 더듬으며 눈치만 살피는, 매우 이질적인 존재였다.
인도에 머무르던 시간 내내, 나의 의식은 온통 밖으로 향해 있었다. 내면으로 들어가 명상에 정진하기는커녕, 타인에게 반사되는 내 모습에 전전긍긍했다. ‘나’라는 껍질, 혹은 이미지가 얼마나 바깥세상에 의존적인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인지 깨닫는 계기이기도 했다.
‘나’를 찾는다는 것이 허망하고 쉽지 않은 이유는 나를 찾으려면 우선 내가 맺고 있는 관계망과 그것으로 직조된 사회에 대한 전체적 조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디까지 어느 방향으로 ‘나’를 확장할 것인지 경계에 대한 인지가 있어야 하고, 자기 욕망이 얼마나 안에서 솟아난 것인지 얼마나 밖에서 유입된 것인지 의식할 수 있어야 한다. 더욱이 그런 것들은 끊임없이 변한다. 자신에게 몰두하여 자기 욕망이나 능력의 절대값을 요리조리 가늠하는 일은, 어쩌면 중요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나’라는 존재는 정말로 늘 변화하는 관계망을 부유하는 변수에 불과한 것일까, 라는 의문이 슬그머니 솟아오른다. 북극에 사는 이누이트 사람들은 화가 나면 마을 밖 저 멀리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을 향해 하염없이 걷는다고 한다. 그러다가 마음이 풀어지는 순간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막대기 하나를 박아 놓고 돌아온단다. 이따금 사람들 관계에 부대끼고 사소한 욕망끼리 충돌하여 노여움이 치솟을 때면, 얼음으로 뒤덮인 순백의 세상을 상상한다. 어떤 불꽃으로도 녹지 않는 단단한 땅 위를 걷는다. 어느덧 나도 투명한 빈칸으로 지워지기 시작한다. 이제 몸을 돌려 사람의 체온을 지닌 세상으로 돌아갈 것인가. 막대기처럼 그대로 서 있을 것인가. 모두 부질없는 상상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텅 빈 시공간은 내 주위 어느 곳에도 없다.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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