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을 보느라 시선이 아래로 쏠린 보행자들을 사고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바닥에 신호등을 설치했다. 아이디어는 기발하지만 실효성은 여러모로 의문이다. 한국일보 ‘뷰엔(View&)’팀이 서울 시내에서 시범 운영 중인 바닥신호등과 그 관리 실태를 살펴본 결과 도입 취지와 달리 오히려 보행자의 안전을 위협할 만한 요소가 적지 않았다.
바닥신호등은 지난 3월 경찰청이 ‘바닥형 보행신호등 보조장치 표준지침’을 확정함에 따라 정식 교통안전시설물로 지정됐고 인증 절차가 완성되면 전국에 확대 설치될 전망이다.
◇낮엔 희미하고 밤엔 눈부셔
21일 낮 바닥신호등이 설치된 서울 세종대로의 횡단보도 앞. 길 건너 보행등에 빨간불이 켜졌지만 1~2m 앞 바닥신호등의 불빛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원인은 화창한 날씨. 일반 교통신호등에는 햇빛을 가려 시인성을 높이는 챙이 있지만 바닥신호등은 구조상 이 같은 장치를 달 수 없다.
주간에 희미하던 바닥신호등은 저녁이 되자 멀리서도 시선을 끌 정도로 밝게 빛났다. 문제는 이 빛을 수직으로 내려다 볼 경우 눈부심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앞이 안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휴대폰을 보며 바닥신호등을 지날 때 이 같은 경험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직장인 김모(39)씨는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바닥에서 강한 빛이 올라와 피하려고 고개를 들었더니 눈앞이 캄캄해 당황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시범 운영 실태는 엉망
20일 저녁 또 다른 시범 운영 지역인 연세대학교 앞은 관리 소홀 정도가 심각했다. 정문 앞쪽에 설치된 바닥신호등은 아예 작동하지 않았고 LED 전구가 내장된 27개의 점등 블록 중 일부가 돌출돼 보행자가 걸려 넘어질 가능성도 있었다. 맞은편의 경우 적색등만 켜질 뿐 녹색등이 들어오지 않아 대기 신호 때보다 어두운 환경에서 보행자 횡단이 이루어졌다. 취재 시작 전까지 이 같은 실태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경찰청은 22일 “이른 시일 내 시정 조치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12월 서초구가 자체적으로 시범 설치했다 운영을 중단한 남부터미널역 사거리 바닥신호등에서는 21일 내부에 습기가 찬 점등 블록 여러 개가 발견됐다. 대구 수성구에서 지난해 10월 발생한 바닥신호등 화재의 원인이 내부 습기였다.
◇표준지침만 따르면 해결될 문제인가
경찰청 표준지침은 방수 및 미끄럼 현상, 내구성 등 시범운영을 통해 드러난 문제점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바닥신호등의 성능 기준을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제품은 지침에서 규정한 기준을 충족해야만 설치, 운영이 가능하다. 그런데 표준지침이 규정하는 바닥신호등의 밝기가 보행자가 아닌 운전자를 기준으로 규정되어 있어 부작용이 우려된다. 주변 조도에 따라 조절해야 할 신호등의 밝기에 ‘가변형 교통안전표지(도로 전광판)의 조도별 휘도 기준’을 그대로 적용한 것인데, 적정한 실험을 거쳤다고는 하나 수십 미터 앞의 전광판을 인지할 수 있는 정도의 밝기를 1~2m 앞 바닥 신호등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주변 조도의 기준 또한 애매하다. 표준지침은 주간과 야간, 두 가지 경우로만 주변 조도 기준을 제시하는데, 주간과 야간의 경계가 모호한 데다 주변 밝기를 측정할 수 있는 조도계 장착 의무마저 빠져 있다. 일반적으로 조도는 날씨나 일출ㆍ일몰 등에 따라 그때그때 변하고 야간에도 주변 조명에 따라 차이가 날 수 있으므로 단계를 더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 표준지침안을 마련한 도로교통공단 관계자는 “현 기준이 다소 엉성해 보일 수 있지만 기준을 세분화할수록 설치 비용이 많이 드는 단점이 있다”며 “시범 운영 기간에 파악하지 못한 문제들이 시행 초기 발생할 수밖에 없는 만큼 연말이나 내년 초 표준지침을 개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바닥신호등, 꼭 필요한가
성능이나 관리의 문제를 떠나 바닥신호등 설치 자체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 바닥신호등이 교통신호가 갖춰야 할 통일성과 단순성, 명료성을 해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장일준 가천대 도시계획학과 교수는 “바닥신호등을 전체 지역에 설치하지는 못할 것으로 보이는데 통일성이 떨어져 이용자들이 혼동할 수 있고, 바닥신호등에 익숙해지고 의존하다 보면 미 설치 지역에서 사고 위험이 더 커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바닥신호등은 보행신호등의 보조장치에 불과하지만 설치비용은 보행신호등에 비해 더 많이 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바닥신호등 한 쌍을 자체 시범 설치했던 서초구에 따르면 제품가격을 제외한 시공비만 2천여만원에 달했다. 설치 위치가 보행자의 발 밑인 까닭에 설치 후에도 유지 및 보수에 드는 시간과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동권 침해로 고통받는 시각장애인이나 노약자 등 교통약자를 위한 투자에는 인색하면서 보행습관이 잘못된 보행자들에 대한 배려가 과도하다는 비판도 예상된다. 신중한 검토 없이 여론에만 이끌려 도입할 경우 바닥신호등이 전시행정의 표본으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김주영 기자 will@hankookilbo.com
박서강 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