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실의 악마, 그루밍 성폭력] <중> 진료실을 파고드는 검은 손길
[저작권 한국일보] B원장의 그루밍 성폭력 방식. 김경진기자

A(38)씨는 지금도 분을 삭일 수 없다. 하나는 유명 정신과 병원 B(44) 원장이 2017년 6월부터 석 달 동안 자신을 성적 노리개로 삼았던 일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래서 B 원장을 형사 고소했음에도 여전히 의사로서 진료를 계속 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의 이유는, 그 때문에 결국 또 다른 피해자 C(23)씨가 생겨나고 말았다는 점이다.

B 원장이 의사로 계속 활동할 수 있었던 건 검찰이 형법상 ‘위력에 의한 간음 혐의’에 대해 불기소 처분해서다. 성관계가 있었다 하나, 강압이 아니라 다 큰 어른들끼리 합의 하 성관계를 맺은 이상 죄가 되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한마디로 정신 상담을 받는 심리적 약자라 해도 어엿한 성인인 이상 ‘그루밍(Grooming) 성폭력’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자기 같은 피해자가 더 생겨나는 걸 막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에 수치심을 무릅쓰고 수사기관을 드나들었던 A씨는 오히려 더 깊은 우울증과 공황 증세에 빠져들었다.

 ◇ “B 원장의 행동은 전형적인 그루밍” 

22일 A씨와 C씨의 주장을 종합해보면, B 원장은 ‘대상 고르기→피해자의 신뢰 얻기→욕구 충족시켜주기→고립시키기→관계를 성적으로 만들기’라는, 전형적인 그루밍 성폭력 수순을 밟았다.

낯선 곳을 두려워하는 공황장애가 심했던 C씨는 2016년 3월 유명 정신과를 찾다 B 원장의 병원을 방문했다. B 원장은 TV에 자주 나오는 의사인데다 기본 상담 대기 시간이 3~4시간에 달할 정도로 환자가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

첫 진료부터 B 원장의 태도는 남달랐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상담을 하면서 기록지도 작성하지 않고 면담에만 집중했다. 진료 중간중간 연예인과 통화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유명한, 유능한 의사는 역시 뭔가 다르구나 생각했다. 병원에 함께 온 어머니에게 B 원장이 “따님이 정말 예쁘다”고 칭찬했다는 말도 전해 들었다. 대상을 고르는 단계였다.

처음엔 호전되는 듯했으나 두 달 만에 C씨의 증상은 더 나빠졌다. B 원장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을 알려주면서 언제라도 연락하라 했다. SNS 메신저로 도움을 요청하면 언제나 친절하고 빠른 답장을 보내줬다. “1년 안에 낫게 해주겠다” “싸구려 약을 쓰는 다른 병원과 달리 나는 손해를 봐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렇게 신뢰를 쌓았다.

 
 
유명 정신과 병원 B 원장에게 그루밍 성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A씨의 트위터. A씨는 의사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정신과 환자의 특성을 감안해 그루밍 성폭력이 인정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A씨 트위터 캡쳐
 ◇“심리적으로 완벽하게 지배당해” 

B 원장은 공황장애로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던 C씨를 거듭 격려했다. 진료와 무관하게 “재벌가에 들어가도 손색이 없을 미모”라는 등 꾸준히 이것저것 칭찬했다. 당시 대학생으로 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C씨에게 “확실한 방법이다. 나만 믿으라”며 비트코인 투자를 권하기도 했다. C씨가 투자금을 잃고 빚까지 지자 B 원장은 1,000만원을 선뜻 주기도 했다.

B 원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자 C씨와 어머니의 갈등이 시작됐다. 의사와 환자 사이를 넘어섰다고 판단한 C씨 어머니가 “병원에 가지 말라”고 하자 C씨는 “B 원장은 매너 있고, 여성 인권을 누구보다 중요시 하는 훌륭한 의사다”라며 거부했다. 오히려 B 원장에게 어머니의 말을 고스란히 전했다. B 원장은 “어머니에게 상담 내용을 말하지 말라”고 C씨를 입단속 시키더니 마침내 “어머니로부터 독립하려면 자해 소동을 일으키라”고 주문했다. ‘이 의사만이 내 병을 낫게 해주리라’고 철썩 같이 믿었던 때라 C씨는 그대로 따랐다. C씨는 그렇게 고립됐다.

B 원장과 C씨가 연인 사이가 된 건 지난해 말부터였다. A씨가 제기한 위력에 의한 간음혐의에 대해 검찰이 불기소 결정을 내린 직후였다. B 원장은 C씨에게 옷이나 화장품을 사주며 “행복하다”고 했다. B 원장이 결혼한 건 알았지만 “아내와 합의해 자유연애 한다”는 말을 믿었다.

스킨십 수위는 조금씩 높아졌고 올해 설 연휴 마지막 날인 2월 6일 부산의 한 호텔에서 첫 성관계가 있었다. 이후 성적인 만남이 10여 차례 이어졌다. 1주일에 세 번 호텔을 가거나 3일 연달아 관계를 가지기도 했다.

둘의 관계는 지난 2월 중순 C씨가 B 원장의 보험금 허위청구 사실을 알게 되면서 틀어졌다. 오지도 않은 환자가 진료를 받은 것처럼 건강보험공단에서 돈을 받아 챙긴 것이다. C씨는 “양심적인 의사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고, 그제서야 내가 심리적으로 지배를 받았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위력에 의한 간음으로 고소 “추가 피해 막겠다” 

C씨는 이달 초 B 원장에 대한 고소장을 경찰에 냈다. C씨가 고소한 혐의는, A씨가 고소했으나 검찰이 무혐의 처분한 위력에 의한 간음 혐의다. 한번 면죄부가 나갔지만 C씨와 B 원장의 나이 차이가 스무살이 넘는다는 점, 동일한 피해자가 있다는 점이 A씨 때와는 다르다. C씨는 “다른 피해자가 생기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B 원장은 처벌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B 원장은 지난해 3월 대한신경정신의학회에서 제명당했다. 유명 배우에 대해 진료도 하지 않은 채 병명을 공개했고 환자와의 부적절한 관계 등이 제명 이유다. 학회 차원에서 징계를 받아봐야 보건복지부가 관리하는 정신과 전문의 자격과 의사 면허는 그대로 남아 있다. 진료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 권준수 이사장(서울의대 신경정신과 교수)은 “대한의사협회가 1년 넘게 B 원장 징계 사안에 대해 논의만 하고 있다”며 “의협 중앙윤리위원회는 물론, 관리감독기관인 보건복지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신과 의사가 자신이 치료하는 환자와 어떠한 사적 관계도 가지면 안 된다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라면서 “법적인 처벌과는 별개로 이런 의사는 진료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B 원장은 “지금 알고 있는 팩트와 많이 다르다”면서도 “재판이 끝난 후 인터뷰를 하는 게 윤리적으로 맞다”고 자세한 해명을 하지 않았다. C씨의 고소에 대해선 “그 부분을 말하는 자체가 윤리적 딜레마다. (나는) 정신과적 비밀 유지의 의무가 있고, 이 딜레마를 은밀히 이용하는 축이 있다”고만 대답했다.

허정헌 기자 xscop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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