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한양 복귀와 암운 
연암 박지원은 당대 문명이 높았고, 그가 쓴 '열하일기'는 큰 화제를 몰고왔다. 김건순이 그를 찾은 것 또한 박지원에게서 듣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였을 것이다. 연암은 천주교에 대해 여러 글에서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낸 바 있다. 실학박물관 제공
 ◇연암 박지원과 김건순의 만남 

1796년쯤 20세 초반의 젊은이가 연암 박지원을 불쑥 찾아왔다. 연암은 그의 이름을 듣고 속으로 놀랐다. 그는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의 수장이었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제사를 받드는 노론 명문가의 종손 김건순(金健淳ㆍ1776~1801)이었다. 그는 20세에 이미 높은 재주와 해박한 학문으로 천재의 명성이 온 나라에 진동했다.

“어쩐 일로?”

“어르신께 삼가 가르침을 청합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묻고 대답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연암의 눈빛에 차츰 실망의 빛이 스쳐갔다. 그 느낌이 전해졌던지, 두 사람은 점점 말수가 줄고 마침내 입을 다물었다. 김건순이 떠난 뒤 연암이 서글픈 표정을 짓더니 아들 박종채에게 말했다.

“내가 그를 꼭 한번 보고 싶었다. 막상 만나 보니 그저 가엾은 생각뿐이로구나. 그의 재주는 천하의 기이한 보배라 할만하다. 천하의 기이한 보배를 간직하려면 단단하고 두터운 그릇이 있어야 부서지지 않고 오래 보존할 수가 있다. 내가 그의 그릇됨을 보니 이 보배를 간직하기에는 부족하다. 아! 안타깝구나.” 박종채가 펴낸 ‘과정록(過庭錄)’ 에 나온다.

김건순은 어려서부터 예봉을 드러냈다. 아홉 살에 이미 선도(仙道)를 배울 뜻이 있었다. 어려서 ‘논어’를 배울 때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라”는 대목에 이르자, 소년이 물었다. “공경해야 한다면 멀리해서는 안 되고, 멀리해야 한다면 공경할 수 없습니다. 공경하되 멀리하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요?” 스승은 그만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김건순은 마테오 리치의 ‘기인십편(畸人十編)’이란 천주교 책을 즐겨 읽었다. 그러더니 10여세에 ‘천당지옥론’을 지어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18세 때 양부의 상을 당했을 때, 상복의 제도를 옛 문헌에 의거하여 변경하였다. 이 일로 유림의 힐책이 잇따르자, 그는 글을 지어 답변했다. 고금의 학설을 끌어와 폭넓게 근거를 대며 주장을 펼쳤는데 문장 또한 놀랍도록 유창했다. 당대의 천재로 유명했던 이가환 조차 이 글을 읽고 나서 “나는 감히 바라보지도 못하겠다”고 탄복했을 정도였다. 그가 여주에서 한 번씩 서울로 올라오면 그를 만나보려고 사람들이 줄을 섰다. 그는 실로 희대의 천재였다. 안연(顏淵)이 다시 태어났다는 소문까지 돌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김건순의 방문을 받고 대화를 나눈 연암은 허탈해하고 서글퍼 했다.

대체 무슨 대화가 오갔기에 연암은 김건순에 대해 실망했을까. ‘과정록’은 이 말끝에 “얼마 못 가 건순은 그릇된 부류와 사귐을 맺어 폐해지고, 5년 뒤(1801)에 천주교에 물들어 죽임을 당했다”고 썼다. 이로 보아 당시 김건순은 이미 유학의 본령을 떠나 천주교에 심각하게 경사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건순은 연암의 ‘열하일기’를 읽고서 북경 천주당이나 서학에 관한 생각, 이용후생에 대한 질문을 연암에게 묻고 싶었을 것이다.

 ◇강이천의 비어 사건과 김건순 

이후 김건순은 강이천과 이중배 등 5, 6명과 생사를 같이하기로 사귐을 맺고, 배를 타고 강소성과 절강성에 가서 북경까지 이르러 서양 선교사들과 만나 이용후생의 방법을 배워와 조선에 전할 결심까지 했다. 그런 그가 한 시골 교우에게서 미카엘 대천사의 상본(像本)을 얻어 보게 된 일을 계기로 천주교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권철신을 밤중에 몰래 찾아 가 천주교 교리에 대해 문의했고, 권철신을 통해 김건순이 천주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을 알게 된 주문모 신부는 노론 핵심부에 속한 그를 천주교 신자로 끌어들일 경우, 교회의 확산에 큰 힘이 될 것으로 믿었다. 주문모 신부는 1797년 가을에 교우인 정광수를 통해 김건순에게 편지를 전하고, 8월 어느 날 밤에 홍필주의 집에서 김건순과 첫 대면을 했다.

이 짧은 만남에서 김건순은 천주교를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요사팟이라는 세례명까지 얻었다. 그는 돌아와 벗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실을 천명하고, 성호를 긋고 천주교 서적을 꺼내 보이기까지 했다. 천주교는 이제껏 남인들의 종교였는데, 노론 최고 명문가의 종손이 자발적으로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은 큰 사건이었다. 1797년에 다산이 변방소를 써서 공개적으로 배교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김건순이 몹시 슬퍼하며 안타까워했다고 달레 신부는 ‘조선천주교회사’에서 적고 있다. 김건순에 관한 내용은 황사영의 백서와 ‘추안급국안’에 실린 관련 심문 속에 상세하게 나온다.

당시 정조의 근심은 진산 사건 이후 양반 계층의 상당한 이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신자의 숫자가 계속 늘어가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한때 서학에 물들었던 지도층 지식인들 사이에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역모를 꾀하고 불측한 풍문을 유포하는 책동이 늘어가던 분위기였다. 1797년에 발생한 강이천(姜彝天)의 유언비어 사건은 대표적인 경우였다.

강이천은 김건순과 가까운 사이였고, 그 또한 주문모 신부와 만났다. 강이천은 천주교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바다 섬으로부터 군대를 이끌고 진인(眞人)이 건너 와서 조선을 멸망시키고 새 나라를 건국하리라는 이른바 해도거병설(海島擧兵說)을 퍼뜨리며 전국 규모의 비밀 결사체 조직을 실행에 옮기려다가, 1797년 11월 1일에 김신국이 고변하여 역모죄로 고발당했다. 이른바 강이천 비어(蜚語) 사건이다.

사건이 터져 연루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김건순의 이름이 등장하자, 노론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노론의 정신적 지주였던 청음의 종손이 천주학쟁이가 된 사실은 일거에 노론 세력을 깊은 분노와 충격 속으로 빠뜨렸다. 이것은 어떻게 해서든 애초에 없던 일이어야 했다. 노론 전체가 동원된 김건순 구하기 작전이 개시되었다. 하지만 노론의 전면적인 엄호사격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인은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밝히며 배교를 거부했다.

김건순은 강이천과 엮이면서 역모의 한 중앙에 섰다. 그것은 바다 섬에 사는 해상진인(海上眞人)이니 남곽선생(南郭先生)이니 하는 이인이 그곳에서 나라를 세우고 마침내 배를 타고 건너와 조선을 무너뜨린다는 놀랍고도 겁나는 시나리오였다. 이 큰 배가 마침 조선 신자들이 북경 교회에 청원했던 포르투갈 국왕의 사자를 실은 배와 겹쳐지면서, 곧 큰 전쟁이라도 날 것 같은 흉흉한 소문에 전국이 술렁댔다. 조기에 차단하지 않으면 한동안 잠잠하던 ‘정감록’ 신앙에 불이 다시 붙을 기세였다. 해묵은 이인좌의 난이 새롭게 호출되었고, 정도령의 이름이 은밀하게 사람들 입에 다시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정조와 노론은 총력을 다해 김건순이 강이천의 비어 사건에 연루되는 것을 막았다.

 ◇채제공의 서거와 다산의 복귀 

1799년 1월, 채제공이 80세로 세상을 떴다. 남인의 거목이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다산은 곡산에서 그의 서거 소식을 들었다. 다산은 멀리서 그의 영전에 ‘채번암 선생 제문(祭蔡相國樊巖先生文)’을 지어 올렸다.

공께서 나라를 진정시키심公之鎭國

대산(岱山) 같고 숭산(嵩山) 같네.如岱如嵩

공께서 떠나셨다니公之云逝

세상엔 공이 이미 없으리. 世旣無公

하늘 보고 땅을 봐도 頫仰天地

휑하니 텅 비었네.廓然其空

멀리 박한 예물 올려遙薦菲薄

슬픈 마음 하소한다. 以訴悲衷

채제공과 다산은 평생에 걸친 애증이 있었다. 채제공은 다산의 든든한 원군이었지만, 천주교 문제가 계속 불거지자 채제공은 다산을 버릴 작정을 하고 실행 직전까지 갔다. 다산은 그 아들 채홍원을 협박해서 이를 막았다. 채제공의 만년 기록에는 다산이 잘 보이지 않는다. 채제공이 서거할 당시 다산은 2년째 곡산 부사로 나가 있었다. 평생에 얽힌 파란 많던 인연에 비하면 위 다산의 제문은 너무나 짧고 무덤덤해서 도리어 사람을 놀라게 한다.

채제공 서거 넉 달 뒤인 1799년 5월 초 다산은 곡산을 떠나 근 2년 만에 내직으로 복귀했다. 정조는 다산을 형조참의에 임명했다. 독촉을 받고 입시하자 임금의 하교가 있었다. “원래는 가을쯤 너를 부르려 했다. 마침 큰 가뭄이 들어 여러 옥사를 심리코자 너를 불렀다. 해서(海西)의 의심스런 옥사에 대해 올린 네 장계를 보고 네가 옥사의 처결에도 능한 줄을 알았더니라.” 그러면서 정조는 곁에 있던 형조판서 조상진(趙尙鎭)을 돌아보며 말했다. “경은 모든 일을 참의에게 맡기고 베개나 높이 베고 있으면 될 것이오.” 정조는 늘 이런 식으로 다산에 대한 각별한 신임을 표시하곤 했다.

임금은 다산에게 오랫동안 논란이 되었던 몇 가지 살옥에 대한 재심을 맡겼다. 다산은 살인사건의 정범으로 7년간 옥살이를 하던 함봉련(咸奉連)의 옥사를 재심리해서 그녀의 무죄를 주장했다. 임금은 그날로 함봉련을 무죄 석방케 했다. 함봉련이 칼을 벗고는 큰길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집으로 돌아갔다. 황주 백성 신저실(申著實)의 살옥도 명쾌한 법리 논쟁을 거쳐 정상 참작으로 석방 시켰다. 호조 아전 이창린(李昌麟)의 공금횡령 사건을 두고 다산은 정조와 격렬한 논쟁까지 벌여가면서 임금의 뜻을 꺾고 자기 견해를 관철시켰다. 이 같은 경험이 훗날 ‘흠흠신서(欽欽新書)’의 정리로 이어졌다.

무슨 일이든 일단 실무 현장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다산의 소맷자락에서는 경쾌한 바람 소리가 났다. 일 처리가 명쾌해서 일체의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1799년 6월 12일에 민명혁(閔命爀)이 정약전의 사직과 연좌시켜 다산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복귀 후 고작 한 달 가량 지난 시점이었다.

이때 다산은 ‘형조참의를 사직하는 상소문(謝刑曹參議疏)’를 올려 자신의 소회를 길게 밝혔다. 글 속에 “조정에 선 지 11년간 여러 직책을 거치는 동안 단 하루도 마음 편한 적이 없었습니다”라고 쓴 대목이 짠하다. 그물에 걸린 토끼나 새처럼 옴짝할 수 없이 옥죄는 고통에 밤새 뒤척이며 눈물로 뺨을 적신다고도 썼다. 이때쯤 해서 다산은 벼슬길을 아예 그만두고 은거하려는 결심을 점차 굳혀가고 있었던 듯하다. 사직 청원은 받아들여져 다산은 7월 26일에 체직되었다.

10월에는 앞서 정조가 천주교 내부에 심었던 밀정 조화진이 이가환과 다산을 천주교 문제로 다시 저격했다. 임금은 무고라면서 한 번 더 다산을 지켜 주었다. 1799년 12월에 넷째 아들 농장(農牂)이 태어났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운명의 1800년을 만났다. 다산은 자신의 주변을 점점 옥죄어오는 살기를 느끼고 있었다. 전원으로 돌아갈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던 즈음, 1800년 6월 28일, 다산의 마지막 버팀목이었던 정조가 갑작스레 승하했다. 세상과 통하는 모든 문이 일제히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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