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 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한국일보>
저는 딸 둘을 키우는 40대 주부예요. 결혼한 지 1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제 말을 잘 들어주지 않는 남편 때문에 너무 힘듭니다. 남편은 집안일에 아무 관심이 없어요. 지하철에서 부랑자가 딸에게 욕하며 위협해도 남편은 가만히 앉아 있어요. 제가 층간 소음으로 아랫집 아저씨와 다툴 때에도 제 뒤에 가만히 서서 구경만 하는 사람입니다. 안방 천장에서 물이 새서 윗집과 4년을 다투고 부동산, 법률사무소, 구청을 저 혼자 발을 동동 구르며 뛰어다닐 때에도 남의 일처럼 뒷짐만 지고 있습니다.
남편은 제가 요구하는 사항들은 일단 무조건 알았다고 하고, 그 다음에 왜 안 했냐고 물으면 몰랐다거나, 깜박했다고 둘러댑니다. 결혼 초에 저보고 아버님 제사라며 시댁에 가라고 해 놓고 정작 본인은 오지 않기에 전화했더니 ‘날짜를 착각했다’고 둘러대는 겁니다. 시어머니는 그날 손님들이 온다며 저에게 5인분의 저녁을 차리게 했어요. 남편이 저에게 일부러 거짓말한 게 아닌지 의심됐지만 설마 하고 넘어갔습니다.
이후로도 남편은 제 말을 무시해요. 남편이 무좀으로 고생하기에 제발 치료를 받으라고 해도 병원은커녕 약도 바르지 않아요. 당연히 병원에 간다고 해놓고서요. 딸 사진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는 게 싫다고 얘기해도 저 보란 듯 사진을 올립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주말에 식구들을 위해 아침상을 차려 달라고 했더니 해 주겠다고 하고선 안 합니다. 예전에 제가 직장에 다닐 때 일주일에 한번은 함께 집안일을 하자고 했을 때도 알겠다고 약속해놓고선 술을 먹고 새벽에 들어오는 식이에요.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저도 어느 순간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제가 요구하는 것들을 전혀 들어주지 않는 남편의 태도에 저도 모르게 화가 나서 휴대폰을 던져 부숴버린 적도 있어요. 남편이 한심하고 날 일부러 괴롭힌다는 생각이 들어 남편의 등이나 머리를 마구 때릴 때도 있습니다. 욕도 하고요. 제가 그렇게 심하게 대해도 남편은 벽처럼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아요. 더 화나는 건 그가 밖에서는 전혀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행복하고, 편안하고, 잘 지낸다고 합니다. 저만 미친 사람처럼 힘든 것 같아 더 괴로워요.
화를 못 참고 폭발하는 제 모습에서 저는 어렸을 적 싫어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요. 아버지는 폭력을 쓰진 않았지만 늘 화를 냈어요. 엄마는 아버지가 싫어하는 행동을 일부러 하면서 아버지를 자극해 두 분이 늘 다퉜어요. 한 살 위 오빠와 남동생과도 늘 차별을 당했어요. 오빠가 저를 때리면 엄마는 맞은 저를 나무랐고, 오빠와 남동생은 유치원이나 학원을 다녔는데, 저는 늘 홀로 집에 방치됐어요. 색연필 같은 학용품도 새 것을 사 본 적이 없었어요. 지금 저를 분노케 하는 남편이 마치 저희 엄마 같아요. 남편에게 아무리 소리를 치고 뭐라 해도 남편은 ‘알았어, 알았어’라고 해 놓고선 달라지지 않아요. 이런 남편과 어떻게 하면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윤미란(가명ㆍ47ㆍ주부)
미란씨, 그동안 당신의 속을 뒤집는 답답한 남편과 지내느라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남들이 보기에는 일상에서 별 것 아닌 일로 다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저는 당신의 깊은 아픔과 고통이 너무나 이해됩니다. 그리고 그런 아픈 감정들이 얼마나 오래전부터 시작된 것 인지 어디서 왔는지 얼마나 아팠을지 가늠해 보면 남편에 대한 공격적 행동 밑면에 있는 당신의 분노가 이해됩니다. 물론 당신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해서 남편에 대한 공격적 행동을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도 잘 알겠지요. 가슴이 너무 아프네요.
남편을 남편이 아닌 한 인간으로 떨어트려놓고 한번 볼게요. 남편은 우선 매우 수동적이고 회피적인 사람이에요. 매사에 ‘좋은 게 좋은 거지’라고 생각하면서 갈등을 안 일으키는 것이 가장 우선인 사람일 거예요. 직접 만나 보진 못했지만 남편은 굉장히 감정적인 어머니의 아래에서 자란 것 같아요. 시어머니가 제사를 착각해 온 며느리에게 손님상을 차리라고 하는 걸 보면 매우 강요적이고 자신의 주장도 강하신 분이겠지요. 이런 어머니 아래에서 남편은 직접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일단 상황을 모면하는 방식이 몸에 배었을 거예요. 부정적인 감정을 과다하고 강하게 표출하고 매우 강요적인 어머니와 의절하지 않고, 잘 지내려고 자신의 주장을 또렷하게 밝히기보다 일단 ‘알겠어요’라고 하고, 얼렁뚱땅 상황을 피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했을 거예요. 좋은 방법은 아니었지만, 아마도 그런 남편의 태도와 성격은 어머니와 마찰을 일으키지 않고, 적당히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이었을 거예요. 아버지 제삿날을 착각해 당신을 시댁에 보낸 것도 아마 어머니의 요구를 받아주면서도 당신에게도 대충 얼버무리고 적당히 넘어가려 한 거지요. 남편은 공격적이지 않고, 어찌 보면 순하지만, 진지하고 심각한 면이 없으니 한결같이 그런 식으로 살아왔을 거예요.
이런 유형의 남편은 사실 미란씨 남편뿐 아니라 종종 있어요. 그런데 미란씨가 “그래, 내 남편은 그런 사람이니깐, 대충 맞춰서 살면 되지”라고 넘기지 못하고 유독 참기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건 남편의 이런 태도가 당신이 어린 시절 받았던 상처를 건드리기 때문일 거예요. 당신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은 고독하고, 암울하고, 헐벗고, 아주 차가웠던 것 같아요. 당신의 부모는 당신을 사랑했다고 말할 순 있겠지만, 당신은 부모로부터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대접받질 못했어요. 1년 365일 자식에게 사랑을 표현할 순 없지만,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기억과 경험은 반드시 필요해요. 어린 시절 가장 중요한 사람인 부모로부터 소중한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면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좌절되면서 결핍이 생깁니다.
당신은 부모로부터 사랑받은 기억도 없지만, 보호받지도 못했어요. 따뜻한 애정이나 관심도 받질 못했어요. 부모에게 학용품을 사 주고, 교육을 시켜 달라고 정당하게 요구했지만, 당신의 부모는 그런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오히려 당신을 나무라며 존중하지도 않았어요. 오빠가 때려도 당신을 보호하기보다 원인을 당신에게 돌렸지요. 얼마나 억울했을까요. 부모에게 따뜻한 배려와 사랑, 위로를 받았더라면 당신이 남편의 무심한 태도에 이렇게 상처를 받았을까요. 당신은 부모로부터 받고 싶었던 사랑과 위로를 남편으로부터 받고 싶었을 거예요. 그런데 남편도 전혀 당신의 결핍을 채워 주질 못했어요. 큰 잘못이지요.
어렸을 적 충족되지 못한 욕구가 당신에게 남아 있어, 남편이 부모처럼 당신을 대할 때 당신의 상처는 더 깊어지죠. 당신이 힘들 때 남편이 당신을 보호해주지 않으면 당신은 마치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정글 속에서 헐벗은 것처럼 외롭고 우울하고, 고통스러울 거예요. 그게 남편과 남들에게는 아주 사소한 일처럼 여겨지더라도 말이지요. 예컨대 경미한 접촉사고가 났을 때 남편이 내리지도 않고, 차 안에 무심히 앉아 있으면 당신은 당장 ‘이혼하자’라고 얘기할 정도로 화가 날 거예요. 그런 남편에게 당신이 요구한 것들은 매우 정당한 일이었어요. 주말에 밥상을 차리거나 집안일을 나누는 것, 병원에 가는 일 등의 요구는 정당했지만 남편은 당신의 말을 새겨 듣질 않았지요. 여러 번 요구했는데도 당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당신은 남편이 당신을 존중하지 않고, 무시한다고 생각할 거예요. 어렸을 때 부모한테 했던 정당한 요구들이 무시당한 것처럼 말이에요. 밀어도 밀리지 않고 두드려도 꿈쩍도 않는 철문 같은 부모처럼 남편이 답답하고 당신의 마음은 억울하겠지요. 그리고 거짓말로 대충 넘기려는 남편의 태도는 당신에게 당신을 속여서 이용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지요. 악의적인 의도가 없었더라도요. 집안일을 같이 안 하고 잔소리해도 고쳐지지 않는 그런 일상에서도 당신은 분노, 억울함, 무시당함, 절망과 무력감을 느낀다는 거지요.
남편은 그런 당신에게도 어머니에게 대했던 것처럼 대해요. 당신과의 갈등을 줄이기 위해서죠. 당신이 화를 참지 못해 감정적으로 격해진 상황에서 소리를 지르면 남편은 일단 그 상황을 피하려고 ‘알았어, 그럴게’라고 말합니다. 아이의 사진을 SNS에 올리지 말라고 당신이 얘기하면 “예쁜 우리 딸을 자랑하려고 올린 거지. 보고 싶어서 자주 보려고 그런 거야”라고 솔직하게 말하면 되는데, 서둘러 “그래, 안 올릴게”라고 마음에도 없는 말부터 하는 거지요. 이런 태도는 어머니에게는 통했을지 몰라도, 당신에게는 깊은 상처만 남겼을 거예요. 당신의 어린 시절과 연결되면서 남편의 그런 회피적인 태도에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충분히 공감해요.
미란씨 부부는 각자 성장 과정이 달라요. 그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도 다르지요. 미란씨가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해 남편의 무심한 태도에 더 크게 상처를 받는 것처럼, 남편은 지나치게 감정적인 어머니 아래에서 갈등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대충 얼버무리는 식으로 늘 살아왔어요. 그러니 이런 점을 서로 인정해 주고, 당신의 이런 고통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알고, 왜 그런지 잘 알아야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은 어린 시절 부모와 해결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 먼저 인지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남편의 태도에 그토록 크게 상처를 받는다는 걸 알아야 해요. 상대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당신의 가장 약한 면이 건드려진다는 것을요. 그리고 결국에는 그토록 싫어하는 부모처럼 상대를 대한다는 것을요.
당신의 이런 취약한 점을 남편도 반드시 알아야 해요. 자신의 회피적인 태도도 문제라는 것을요. 그러려면 당신이 감정적으로 남편을 대하기보다 좀 더 차분하게 남편에게 당신의 힘든 점과 취약한 부분을 전달해야 해요. “나는 어렸을 때 이렇게 컸어. 그래서 당신의 그런 태도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나에게는 힘들게 다가온다. 그러니 좀 더 솔직하고 진지하게 나를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도 세심하게 배려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이지요.
남편은 그럭저럭 넘어가는 자신의 태도가 당신에게는 상상도 못할 아픔인지 전혀 모르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잘 말한다면 충분히 당신의 고통을 이해하고, 개선할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이 말하기가 힘들다면 제3자인 의사나 중재자를 통해 이런 특성을 전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거예요.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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