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한국-홍콩 합작과 ‘죽음의 다섯 손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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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화 감독의 ‘죽음의 다섯 손가락’(1972)은 한국 홍콩 합작 영화가 유행하던 시대의 산물이었다. 한국과 홍콩의 영화 공동제작은 멜로드라마 ‘이국정원’(1957)으로 첫 발을 뗐다. 신필름이 쇼브라더스와 손잡고 만든 ‘달기’(1964)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활기를 띠게 되었는데, 이는 양자간의 이해가 일치한 결과였다. 내수시장을 장악한 신필름 입장에선 해외 수출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대만과 홍콩의 배급망이 필요했고, 쇼브라더스는 한국 영화시장에 진출하는 동시에 부족한 인력을 보완하고 제작 노하우를 전수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1964년 박정희 정권이 외화수입쿼터 부여의 기준으로 영화의 수출실적을 포함시키면서 이러한 국제화의 물결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위장 합작까지 낳았던 한국-홍콩 교류
한국 홍콩 간의 합작이 급물살을 타면서 양국의 영화 인력은 국경을 넘나들었다. 특히 시대극과 무협영화의 경우 홍콩에서의 세트 촬영 분이 한국에서의 로케이션 촬영과 결합되는 형태가 두드러졌다. 리한샹(이한상)은 ‘양귀비’(1962)와 ‘무측천’(1963)을 한국 로케이션으로 찍었으며, 후진취안(호금전)은 ‘공산영우’(1979)와 ‘산중전기’(1979)를 해인사와 불국사, 설악산 등지에서, 장처(장철)는 ‘사기사’(1972)를 서울에서 촬영했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영화 인력도 대거 홍콩으로 건너가 신성일, 신영균, 남정임과 같은 스타가 홍콩의 배우들과 어울려 이국적인 풍광의 멜로드라마를 찍곤 했다. 이러한 합작은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서유기’(1966)나 ‘철선공주’(1967) 같은 경우 완성된 홍콩 영화에 한국 배우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장면을 추가하거나 한국어 더빙을 덧붙여 합작영화로 둔갑시켰다. 여러 폐단에도 불구하고 홍콩과의 합작은 한국영화의 국제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국제화 흐름 가운데 정창화 감독이 있었다. ‘망향’(1958)으로 합작영화 작업을 경험한 바 있던 정창화는 한국과 홍콩을 자주 오가며 ‘조용한 이별’(1967), ‘순간은 영원히’(1966), ‘정염’(1968) 등을 잇달아 연출한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 중 ‘순간은 영원히’가 홍콩 측에 스카우트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영화에서 정창화는 거리의 행인들에게는 아무런 공지 없이 총격전을 연출해 실제처럼 혼란스러워진 상황을 망원렌즈로 찍었다. 이 장면이 쇼브라더스의 사장 런런쇼의 눈길을 끌었다. 무협영화의 산실이었던 쇼브라더스는 현대 배경의 액션물에는 취약했는데,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ㆍ이 영화에 등장한 일곱 살 여자 아역이 훗날 가수로 성공하는 윤복희다)과 ‘노다지’(1961), 만주 웨스턴의 지평을 연 독립군 영화 ‘지평선’(1961), 미얀마로 끌려간 학도병을 다룬 ‘사르빈 강에 노을이 진다’(1965)로 현대 액션물에 일가견을 보인 정창화의 존재는 단연 돋보일 수 밖에 없었다.
◇쇼브라더스에서 성공시대 연 정창화
런런쇼의 요청을 받아들인 정창화는 1968년 1년에 세 작품을 찍는다는 조건으로 5년의 전속계약을 보장받고 홍콩으로 건너갔다. 뒤에 온 김수용, 장일호 감독은 향수병을 호소하거나 재계약에 실패해 한 작품씩만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정창화는 치열했다. “쇼브라더스에는 전속감독이 50여 명이나 됐어요. 소속 감독들의 작품을 하루 3시간씩 자면서 다 봤습니다. 실력을 가늠하고, 그에 대비하기 위해서였죠.” 정창화가 쇼브라더스에서 내놓은 첫 작품 ‘천면마녀’(1969)는 공전의 흥행을 기록했고 홍콩 영화로선 처음으로 유럽에 수출되는 위업을 달성했다. 작품의 참신함에 고무된 런런쇼가 촬영 도중 정상급 감독과 동등한 대우로 계약을 수정해줄 정도였다. 그러나 정창화의 야망은 현대 액션물에 그치지 않았다. 무협 영화의 본고장에 온 이상, 정통 무협물에 도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극 액션 ‘황혼의 검객’(1967)과 ‘나그네 검객 황금 108관’(1968)으로 일찌감치 검술 액션의 가능성을 시험해본 터였다.
무명 시절의 청룽(성룡)이 엑스트라로 출연한 ‘여협 매인두’(1970)부터 시나리오까지 직접 집필한 ‘아랑곡’(1970)과 ‘래여풍’(1971)까지 정창화는 세 편의 무협 영화를 연달아 내놓았고 모두 흥행에 성공시켰다. 정창화의 다음 선택은 무협물과 현대 액션의 중간지점인 권격영화를 향하고 있었다. “저는 새로움에 대한 갈증이 늘 있었습니다. 다행히 대학에서 중국어를 공부해 중국 서적을 어느 정도 읽을 줄 알았죠. 중국의 역사와 신비한 이야기를 많이 탐독했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전통과 현대를 잇는 시대공간인 청나라를 배경으로 영화를 찍자는 것이었죠.” 원래 ‘철장(鐵掌ㆍ철의 주먹)’이라 붙인 영화의 제목은, 홍콩에서는 ‘천하제일권’(天下第一拳),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는 ‘킹 복서’, 미국에서는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 되었다.
◇미국 극장까지 정복한 ‘죽음의 다섯 손가락’
‘죽음의 다섯 손가락’의 서사는 수련을 통해 고수로 거듭나는 주인공의 성장담과 스승의 원수를 갚는 복수극이라는 무협 장르의 기본적인 틀을 충실히 답습한다. 갖은 수련 끝에 철장비법을 터득한 조지호(로례)는 스승의 원수와 일본인 자객들을 해치우고 방랑길에 오른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컬트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연출의 차별성에 있었다.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1967)의 장처가 슬로우 모션과 핸드헬드를 통해 유혈 낭자한 육신과 죽음의 비장미를 펼치고, ‘협녀’(1971)의 후진취안이 유려한 수평 이동과 와이드 앵글로 자연과 공간, 그리고 인간에 흐르는 공기를 포착한다면, ‘죽음의 다섯 손가락’에서 정창화의 연출은 ‘스피드와 리드미컬한 템포, 몽타주 기법’으로 액션 본연의 쾌감을 끌어올리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각기 다른 앵글과 사이즈의 컷을 빠르게 이어 붙여 충돌시키고, 점프컷으로 무술 안무의 합을 도중에 건너뛰며 액션의 박력과 속도감을 끌어올리는 편집, 술항아리처럼 잘 깨지는 재질의 소품이나 부서지는 벽 같은 무대 세팅으로 영상의 파괴력을 극대화하는 방식 등은 같은 시대 홍콩 무협과는 결을 달리하는 정창화식 액션의 개성이었다.
홍콩 개봉 이듬해인 1973년, 컬럼비아와의 경합에서 이긴 워너브러더스의 배급으로 ‘죽음의 다섯 손가락’은 로스앤젤레스의 차이나타운에서 소규모로 개봉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영화는 열화와 같은 호응을 얻으며 확대 상영에 들어갔고, 종국엔 미국 전역의 상영관에 걸려 5주 동안 북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홍콩영화 사상 초유의 일이자, 한국 감독의 연출작이 국제적인 성공을 거둔 첫 케이스였다. ‘총 없이 싸운 서부극’이란 평을 얻으며 아시아 액션 영화의 상업적 잠재력을 입증한 이 영화의 성공은 리샤오룽(이소룡)의 ‘용쟁호투’(1973)가 제작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 타란티노 “내 인생의 영화”
그러나 해외의 열띤 분위기와는 달리 정작 한국에서의 반응은 냉담했다. 신상옥 감독은 외화 한 편 수입에 드는 돈을 아끼고자 영화를 재편집해 위장 합작영화로 만들었고, 난도질된 채 ‘철인’(鐵人)이란 제목으로 개봉한 영화는 조용히 묻혔다. ‘파계’(1977)를 마지막으로 오랜 홍콩 생활을 접고 귀국한 정창화 감독은 1979년에 화풍흥업을 설립하고 29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의 검열과 간섭은 한 때 큰물에서 활약하던 창작자에겐 가혹하고 숨막히는 일이었다. “아내가 미국행을 제안했습니다. 홍콩 체류 시절 향수병을 경험했던 터라 안 가려고 했었습니다만 인생 전부를 가위질 당한 심정으로 태평양을 건넜어요.” 액션장인 정창화는 그렇게 잊혀 가는 듯했다.
정창화를 복권하는데 기여한 건 영화 ‘킬 빌 1’(2003)과 ‘킬 빌 2’(2004)의 연출을 준비하던 쿠엔틴 타란티노였다. 주인공이 철장을 쓸 때 화면이 붉어지면서 퀀시 존스의 ‘아이언 사이드’ 테마곡이 흐르는 연출을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던 타란티노는 해당 장면을 오마주하고자 정창화 감독을 찾아가 허락을 구했고, 자신의 인생 영화 10편을 중 한 편으로 ‘죽음의 다섯 손가락’을 언급하는 걸 잊지 않았다. 재조명을 받은 정창화는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 2004년 파리 시네마 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아 전작들의 회고전을 가졌고, 2005년 ‘죽음의 다섯 손가락’은 칸국제영화제 클래식 부문에서 루이 말의 ‘도깨비불’(1963), 마틴 스코세이지의 ‘라스트 왈츠’(1978)와 함께 초청되며 클래식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한국 액션영화의 대부’ 정창화의 명예가 마침내 회복되는 순간이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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