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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언어번역기] 투쟁 때문만은 아니다? 황교안의 이유 있는 ‘민생 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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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언어번역기] 투쟁 때문만은 아니다? 황교안의 이유 있는 ‘민생 투어’

입력
2019.05.08 15:15
수정
2019.05.08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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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투어’는 대통령을 꿈꾸는 정치인의 필수 코스가 돼버렸다. ‘국민 속으로 민생투쟁 대장정’을 시작한 황교안(오른쪽) 자유한국당 대표가 7일 부산도시철도 1호선에 올라 시민들과 대화를 하고 있다.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도 2017년 대선을 앞두고 ‘걸어서 국민 속으로’ 뚜벅이 유세를 한 적이 있다. 안 전 대표가 당시 동대구역에서 시민들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 뉴스1ㆍ연합뉴스
‘민생투어’는 대통령을 꿈꾸는 정치인의 필수 코스가 돼버렸다. ‘국민 속으로 민생투쟁 대장정’을 시작한 황교안(오른쪽) 자유한국당 대표가 7일 부산도시철도 1호선에 올라 시민들과 대화를 하고 있다.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도 2017년 대선을 앞두고 ‘걸어서 국민 속으로’ 뚜벅이 유세를 한 적이 있다. 안 전 대표가 당시 동대구역에서 시민들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 뉴스1ㆍ연합뉴스

‘민생투어’는 정치권에서만 쓰는 특이한 말이다. 처음 정치부에 갔을 때 ‘뭐, 이런 당연한 일을 거창하게 하나’란 생각이 들어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출입기자 수십 명에, 당직자, 방문 지역의 국회의원까지 총출동하는 데다 그 모습을 카메라로 찍기까지 하는 자리에서 누가 진짜 속마음, 즉 민심을 말할까 싶어서였다.

직접 민생에 들어가 민심을 들어본다는 긍정적인 취지에서 비롯됐지만, 그만큼 정치가 민심을 모른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래도 1997년 대선을 앞둔 김대중(DJ) 전 대통령도, ‘정치 9단’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도 했으니 민생투어는 유구한 역사를 지녔다.

 ◇민생투어에는 이유가 있다 

잊을 만하면 뉴스에 등장하는 민생투어. 정치인들은 언제 민생투어를 할까. 국회가 열려 쟁점법안을 갖고 여야가 맞붙었거나, 국정감사가 있는 정기국회 같은 때는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랬다가는 ‘일도 않고 밖으로만 돈다’는 비판을 들을 게 뻔하다. 민생투어는 기본적으로 품이 많이 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역을 결정하고, 방문 전 사전 점검을 하고, 주요 당직을 맡은 의원들에, 사무처 당직자, 기자들까지 대규모 인원이 이동하기까지 보이지 않는 노력이 많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여유로울 때 택한다.

최근 전국을 도는 민생투어를 시작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도 그런 경우다. 여당의 선거제 개혁ㆍ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 처리에 반대하고 있다는 걸 감안한 듯 이름을 ‘국민 속으로 민생투쟁 대장정’으로 붙였지만, 아마 대여 투쟁 국면이 아니었어도 선택했을 카드다.

국회 안의 투쟁을 나경원 원내대표가 이끄는 상황에서 국회의원이 아닌 원외 당 대표는 딱히 할 일이 없다. 장외투쟁을 시작하는 것도 민심의 피로도나, 퇴로 마련을 생각하면 녹록지 않은 일이다. 그런 때 민생투어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전국을 돌며 지지층을 결집할 수 있는 좋은 선택지다. 정치 경험이 부족한 황 대표에게는 훌륭한 현장학습이기도 하다. 한 의원은 “버스나 지하철에서 안면도 없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말을 던지고 얘기를 이어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난 서민적이야’ 이미지 변신 

김무성 자유한국당 의원은 대표 임기를 마친 2016년 8월 ‘나홀로 민심투어’를 떠났다. 김 의원이 당시 머물렀던 전북 남원시 운봉읍 화신 마을회관에서 잠들기 전 빨래를 하고 있다.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도 ‘100일 민심대장정’으로 유명하다. 2006년 6월부터 시작해 전국을 돌며 삶의 현장에 뛰어들어 땀을 흘렸다. 손 대표가 당시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활어를 옮기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무성 자유한국당 의원은 대표 임기를 마친 2016년 8월 ‘나홀로 민심투어’를 떠났다. 김 의원이 당시 머물렀던 전북 남원시 운봉읍 화신 마을회관에서 잠들기 전 빨래를 하고 있다.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도 ‘100일 민심대장정’으로 유명하다. 2006년 6월부터 시작해 전국을 돌며 삶의 현장에 뛰어들어 땀을 흘렸다. 손 대표가 당시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활어를 옮기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반전이 필요할 때도 민생투어가 효력을 발휘한다. ‘연출’을 최대한 자제하고, ‘나홀로’, ‘발길 닿는대로’를 강조해야 더 효과가 있다. 지난 대선 막판 지지율 하락으로 고전하던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가 택한 ‘뚜벅이 유세’가 대표적이다. 배낭 메고 버스, 지하철을 누비고 다니는 안 전 대표의 모습은 ‘이런 면이 있었어?’라는 반전을 줬다. 인지도가 높아 홀로 다녀도 어디에서든 알아보니 아마 안 전 대표는 ‘효과 만점’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안 전 대표는 당시 “뚜벅이 유세 열풍이 일고 있다”며 만족스러워 했다. ‘진작 할 걸 그랬다’ 싶었던 모양이다. 대통령의 꿈을 이루진 못했지만, 이미지 변화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

김무성 전 새누리당(현 한국당) 대표도 풍채가 주는 고압적인 분위기를 민생투어로 깬 적이 있다. 대표 임기를 마친 2016년 8월 폭염 속에 혈혈단신으로 전국 곳곳을 돈 것이다. 농사를 돕고, 잠은 마을회관에서 자며, 식사는 주민들의 밥상에 껴서 해결했다. 밤엔 속옷까지 빨아 널어두고 잠들었다. 런닝셔츠 차림으로 주저 앉아 손빨래를 하는 사진이 공개돼 ‘난닝구 김무성’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부자당’, ‘웰빙당’으로 불렸던 새누리당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서민행보였다.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역시 100일이나 민생투어를 한 적이 있다. 경기지사 임기를 마친 2006년 6월 시작한 ‘100일 민심대장정’이다. 삼척에선 갱도를 찾아 채탄을 하고, 여수에선 돌산갓을 다듬고, 인제에서는 수해 복구를 도왔다. ‘삶의 현장에 뛰어든다’는 컨셉이었다. 실제 손 대표가 하도 열심히 일하는 바람에 곁을 지키던 보좌진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일손을 보탰다는 후문이다. 검게 그을린 채 수염이 수북해진 얼굴로 방방곡곡을 돌며 그는 대중에게 대선후보로 각인됐다.

 ◇결국은 선거용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취임 직후인 올해 3월에도 민생탐방을 했다. 지난 3월 19일 황 대표가 서울 서교동 홍대 삼거리에서 어묵을 사먹고 있다. 연합뉴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취임 직후인 올해 3월에도 민생탐방을 했다. 지난 3월 19일 황 대표가 서울 서교동 홍대 삼거리에서 어묵을 사먹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 이 민생투어는 결국은 ‘표몰이’다. 장삼이사 국회의원이 하면 선거운동이고 대통령을 바라보는 대선 후보나 당 대표가 하면 민생투어가 되는 게 정치문법이다. DJ는 1997년 대선을 앞두고 한 달간 전국을 도는 ‘버스 민생투어’를 했고, 역시 용꿈을 꿨던 JP는 민생 현장을 도는 ‘대중 속으로’ 투어를 했다.

이후에도 큰 선거를 앞두고 정당들은 앞다퉈 민생투어를 해왔다. 황 대표가 시작한 민생투어도 짧게는 내년 총선, 길게는 다음 대선을 바라본 행보다. 게다가 지금은 지지층을 최대한 결집해야 할 때다. 대선이 다가올수록 정당들이 서로 민생투어를 두고 ‘사전선거운동’이라며 공방을 벌이곤 했던 이유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민생투어에는 커다란 함정이 있다. 정치권 인사들의 표현을 빌리면, “뽕(마약) 맞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민생투어를 하면 수많은 인파의 환영을 받는다. 함께 사진을 찍자고 달려들고, 악수를 하려고 몰려들기도 한다. 아무리 싫은 정치인도 외면하고 말지, 대놓고 싫은 소리는 삼가는 게 보통 한국 사람의 성정이다. 물론 황 대표의 부산 민생투어 때처럼 시민단체나 반대진영의 시위가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 인파가 다 표는 아니다. 선거를 치러본 정치인들이 너도 나도 “내 눈 앞에서 몰려들고 악수하는 사람들이 모두 나를 찍는 건 아니다”라고 되뇌는 이유다. 대선에 패배한 정치인들의 영원한 숙제는 ‘가는 곳마다 나를 이렇게 반기고 좋아한다는데 왜 지지율은 그것 밖에 안 나왔을까’이다.

그러니 민생투어의 아이러니는 여기서 비롯된다. 민생투어로 진짜 민생, 민심을 알 수 있는 거라면 정치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사실 말이다.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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