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기와 전도사’ 유창종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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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종 변호사가 2일 서울 종로구 부암동 유금와당박물관에 전시된 고구려 귀면와(도깨비 기와) 앞에서 삼국시대 기와의 특성을 설명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검찰의 꽃이라는 검사장을 지냈다면 검사로서는 최고의 영예가 아닐 수 없다. 검사장 출신이라면 은퇴 이후에도 잘 나가가는 변호사로 승승장구할 수 있으며, 종종 정치권이나 학계로 옮겨 변신에 성공하는 경우도 있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과 서울중앙지검장까지 역임한 유창종(74) 변호사도 처음에는 대형 로펌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나 검찰 재직할 때부터 취미를 붙였던 기와 연구를 발판으로 지금은 기와 전도사로 변신했다.

유 변호사는 초년병 시절부터 수사 검사로 이름을 날렸다. 1974년 초임 검사로 부임한 지 한 달도 안돼 전국 자동차 보험 사기단을 일망타진해 ‘자해공갈단’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고, 거북선에 실린 대포라던 국보 ‘별황자총통’이 가짜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후 슬롯머신 사건, 영생교 사건 등 굵직한 사건을 도맡았다. 1989년 대검 초대 마약과장, 2001년 대검 초대 마약부장을 지내 검찰 조직에서는 ‘마약수사의 대부’로 불렸다. 한편으로는 “검찰의 수사권은 장군의 칼과 같이 절제와 위엄을 지켜야 한다”면서 “인권 보장을 위해 직접 수사는 줄이고 수사 지휘를 강화해야 한다”고 촉구했던 개혁가이기도 하다.

이처럼 검찰 조직에서 잘 나가던 검사가 박물관장이 되어 기와 연구를 업으로 삼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2일 서울 종로구 부암동 유금와당박물관에서 만난 그는 “기와는 내 인생의 스승이자 은인”이라면서 “인생 2모작을 위해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유창종(가운데) 변호사가 청주지검 충주지청 검사로 재직하던 1978년 9월 충주 지역 향토문화 연구모임 '예성동호회'를 만들고 현판을 다는 모습. 유금와당박물관 제공
 ◇와당 수집에 빠진 ‘기와 검사’ 고구려 비석 발견하다 

유 변호사가 기와 사랑에 빠진 것은 청주지검 충주지청 검사로 근무하던 1978년 8월, 충북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중앙탑 주변 밭에서 문양이 새겨진 기와인 ‘와당’을 주우면서다. 이날 발견한 ‘6엽 연화문수막새’에는 여섯 잎의 연꽃 무늬는 신라, 회백색의 고운 흙은 백제, 웅건한 기상은 고구려까지 삼국의 특색이 모두 담겨 있었다. 당시 유 변호사는 “어느 나라의 수도도 아니었던 충주에 이렇게 품격 높은, 삼국의 특색을 모두 담은 와당이 남아있는 이유가 뭘까”라는 호기심을 가졌다고 한다. 백제 땅이었다가 고구려 장수왕, 신라 진흥왕에 차례로 정복된 ‘중원문화권’에 삼국시대 문화가 어우러졌다는 깨달음을 얻은 그는 주말이면 향토문화 애호가들과 성터와 절터를 다니며 기와 수집에 나섰다. 틈틈이 나선 답사 길에 고려시대 예성(충주성) 성돌이나 나중에 보물로 지정된 마애불상군을 발견하는 성과도 있었다.

우연찮은 기회에 역사적 대발견도 했다. 1979년 2월 의정부지검 발령을 앞두고 충북 충주시 중앙탑면 용전리 입석마을로 떠난 마지막 답사에서다. 마을 입구 논두렁에 세워진 비석을 살펴보던 일행 한 명이 “야, 이거 글자 아냐?”라고 외쳤다. 글씨 없는 비석으로만 알았는데 석양 빛에 글자의 흔적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후 정식 조사 결과 5세기 장수왕 무렵 고구려가 영토 확장을 기념해 세운 비석으로 밝혀졌다. 한반도 유일의 고구려 비석으로 인정받아 국보 205호로 지정됐고, ‘중원고구려비(충주고구려비)’라는 이름으로 각종 역사교과서에도 실렸다.

기와 수집에 발품을 팔고 다닌 그에게 ‘기와 검사’라는 별명이 붙었고 그는 그 걸 운명으로 여겼다. “와당 몇 점을 가지고 제작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추적하는 과정이 증거 몇 개로 실체적 진실을 발견해나가는 검찰 수사 과정과 닮아 와당 연구에 빠져들었다. 역사와 문화, 철학이 함께 녹아있는 와당이 이후 삶의 지표가 됐다.”

유창종 변호사가 청주지검 충주지청 검사로 재직하던 1979년 2월 충북 충주 중앙탑면 용전리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한 중원고구려비를 살펴보고 있다. 유 변호사의 모습은 비석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유금와당박물관 제공
 ◇2년치 연봉 걸고 기와 환수…국내 최초 와당박물관으로 결실 

충주를 떠난 이후에도 유 변호사의 기와 사랑은 계속 됐다. 매달 부여, 경주, 서울 인사동의 골동품 가게를 다니며 한중일 3국의 와당을 사 모았고, 대검 중수부장으로 있던 2002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와당 1,837점을 기증해 ‘유창종 전시실’을 탄생시켰다. 2003년 법무법인 세종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 뒤에도 와당 수집은 멈출 수 없었다. 검찰에 있을 때보다 늘어난 수입으로 주말마다 일본과 홍콩, 중국, 태국 등지를 돌며 많게는 수백 점의 와당을 한꺼번에 구입했다.

골동품 업계에서 와당을 수집하는 큰 손으로 알려지자 2003년 특별한 제안이 들어왔다. 도쿄의 고미술 가게 대표가 세계 최고 수준의 한국 와당 1,301점으로 구성된 ‘이우치 컬렉션’을 인수하겠냐고 의사를 타진해 온 것이다. 이우치 컬렉션의 명성을 알고 있던 유 변호사 부부는 제안을 받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고 했다. “2년치 연봉을 줄 테니 팔라”고 답한 뒤 일주일간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유 변호사는 약속대로 2년 뒤 이우치 컬렉션을 인수, 일본에 건너간 우리 옛 기와들을 환수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와당을 수집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우치 컬렉션 외에도 평생 모은 한중일 와당 4,000여점, 복식미학을 전공한 부인 금기숙(67) 디자이너가 모은 중국 도용(무덤에 묻은 흙인형) 2,000여점 등을 보관하는 게 큰 문제였다. 고민 끝에 남은 재산을 털어 박물관을 세우기로 한 것이 2008년. 국내 최초 와당 전문 박물관은 유 변호사 부부의 성에서 이름을 따 ‘유금와당박물관’로 출발했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위치한 박물관은 현재 공동 관장인 유 변호사 부부의 연구 및 강의 장소로도 쓰이고 있다. 평창올림픽 개ㆍ폐막식 의상을 감독하며 전 세계의 찬사를 받은 부인 금씨의 패션 아트 작품들도 함께 전시 중이다. 유 변호사는 “최고 권력자의 궁궐 기와에 당대 최고 예술가들이 새긴 와당을 통해 삶을 이해하고 죽은 자의 무덤을 치장하기 위해 함께 묻힌 도용을 통해 죽음을 이해할 수 있다”면서 “박물관을 통해 노후를 즐기고 그 동안 깨우친 바를 실천할 수 있는 터전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유창종 변호사가 2일 서울 종로구 부암동 유금와당박물관 앞에서 박물관을 열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배움에 나이는 없다…글로벌 ‘와당 전도사’를 향한 도전 

기와 박물관은 시작에 불과했다. 유 변호사는 한국 와당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겠다는 포부로 전세계 와당 전도사를 자처하고 있다. 2005년 시작한 중국어 공부를 토대로 2009년 중국 중앙미술학원(대학)에서 특강을 하면서 첫 번째 도전에 성공했다. 일본어도 새로 배워 일본 대학에서 특강을 진행했으며 와당에 대해 쓴 저서가 일본에 번역 출간되면서 일본을 상대로 한 두 번째 도전에도 성공했다. 최근에는 미국 대학에서 와당 전시 및 특강을 진행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또 다른 도전을 준비 중이다.

유 변호사는 와당을 통해 깨달은 문화, 역사, 철학, 종교에 대해 총 4권의 책을 쓰겠다는 목표도 가지고 있다. 2008년 동아시아 와당 문화에 대해, 2016년 와당을 통해 살펴 본 한국 고대사에 대해 책을 펴내 이미 절반은 이뤘다. 동북아역사재단 주최 상고사 토론회에 초청돼 재야 사학계의 낙랑군 요서ㆍ요동설을 반박하는 주제 발표를 하기도 했다. 그는 “와당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젊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거나 한국 미술사 연구를 위해 유학 온 학생들을 돕고 있다”면서 “스스로 즐기면서 깨우친 것을 남들과 나누고 싶다”고 했다.

유창종 변호사가 2일 서울 종로구 부암동 유금와당박물관에서 노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인생은 100년짜리 지구여행, 풍성하게 경험해야” 

유 변호사의 인생은 끊임없는 도전의 연속이다. “인생이란 100년짜리 지구여행을 온 것이니 즐겁고 행복하게 여행을 즐기기 위해서는 주제를 정해 풍성하게 경험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인데 이를 위해서는 4가지 수칙이 필요하다고 했다. ‘풍성한 경험’을 위해 격조 높은 문화를 즐기고, 삶과 사고의 시공을 넓혀야 하며, 자기 능력과 개성에 맞는 삶을 영위하며, 남을 배려하고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검사들에게 인생의 목적이 뭐냐고 물었다가 ‘검사장’이라는 대답이 나오면 ‘검사장이 된 이후에는 뭘 할거냐, 덜 떨어진 생각 말라’고 조언했다는 유 변호사는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인생의 목적을 분명히 정해야 하고 능력, 용기, 지혜, 끈기를 가지고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인생 2모작에 대한 계획적 준비도 조언했다. “인생 2모작은 미리 준비할수록 좋다. 늦었다고 후회할 이유도 없다. 이미 지나간 시간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나간 시간에 축적한 잠재적 능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고민한다면 60, 70살에도 인생은 절대 늦지 않았다.” ‘늙었으니 못 한다’가 아니라 ‘경험이 많으니 이런 것을 해보겠다’며 노년에 걸맞는 인생 설계를 세우고 실천하자는 게 그의 지론이다.

유 변호사는 “여행을 즐길 때도 시작과 끝맺음이 있듯이 늙고 죽는 것은 모든 사람이 겪는 자연적 현상이니 즐겁게 받아들여야 한다”면서 인생의 여행에 대한 소회도 들려줬다. “죽음은 다른 생으로 가는 하나의 통로에 불과하다. 번데기가 나비가 되듯이 나이 들어 떠나는 날까지 주어진 지구여행을 열심히 즐기는 게 최선이다.”

정반석 기자 banse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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