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법린 선생이 전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했음을 알려주는 1928년 1월 17일자 중외일보. 독립기념관 제공
◇ 제목 ‘한국에서 일본제국주의 정책 보고’

- 연설 : 김법린 선생

- 일시 및 장소: 1927년 2월 10일 벨기에 브뤼셀 에그몽궁전. 세계피압박민족반제국주의대회

- 자료제공: 조준희 국학인물연구소장 (사료 발굴자)

- 심영섭 주한프랑스대사관 공보참사보좌관 번역

내외귀빈 여러분,한국에서 일본제국주의 정책에 관한 발표를 시작하기에 앞서 일본제국 주의가 무엇인지 상기 시켜드리고자 합니다.

일본은 국가의 가장 고귀한 임무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영토 확장을 하는 것이라는 보편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같은 확장은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거나 도덕적 이상에 반(反)하더라도 실현만 가능하다면 자신들에게는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입니다. 이 영토확장 자체가 가장 큰 재산이며 모든 인간적 가치는 이에 의해 희생될 수 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 신념의 기원은 일본의 지적 능력이 발달하기 시작한 초 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서기 200년에 이미 신공(神功)왕후가 한반도를 침략하려고 시도한 바 있었습니다. 한반도 침략의 구상은 16세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또 다른 시도를 할 때까지 줄곧 이어져왔습니다. 일본의 어지러운 정국 때문에 몇 년간 침략을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19 세기 초 겐로라 불리는 정치가 중 가장 존경 받던 인물인 요시다 쇼인이 일본의 기질을 가장 비양심적인 제국주의로 전도하면서 침략구상이 다시 되살아났습니다. 종신고문인 겐로에는 이노우에,이토, 야마가타 등이 있었습니다. 요시다 쇼인은 훗카이도의 개항, 캄차카 및 쿠릴 열도의 점령, 류큐 열도의 편입, 만주의 부분적 점령, 대만과 한국 및 일본간 관계수립을 조언했습니다. 여기에는 한반도에 권력을 행사하고 점진적인 위협을 보여줄 의도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근대 일본의 엄청난 제국주의 프로젝트입니다.

여러분들 모두 1894년 중국과 1904년 러시아에서 거둔 뜻밖의 승리에 도취된 일본이 어 떤 비열하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이 같은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겼는지 아실 겁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탐욕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음의 어마어마한 프로젝트 두 개를 더 구상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이민장려로 미국대륙과 대서양 섬에 상황이 허락하는 한 이민을 많이 하여 평화적인 침투라는 구상이 실현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해외영토 확장 정책입니다. 두 번째는 중국의 서쪽영역에 침투하여 중국 의 해체를 용이하게 하고 대립정당을 창설하여 중국전체가 실질적으로 일본의 지배하에 놓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몽골에도 침투하여 이 거대한 국가에 보호령을 행사하면서 가능한 한 시베리아로부터 많은 경제적 이익을 강탈한다는 대륙정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일본제국주의의 야심찬 계획의 세 기둥이었습니다. 첫 번째 계획은 이미 이루어진 바 일본은 악착스럽게 나머지 두 계획을 이루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1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중국에 요구하였던 21개조 요구의 모욕적인 슬픈 기억을 상기시킬 필요가 없을 것으로 압니다.

이 같은 공격적 정책의 최종 목표가 무엇이겠습니까? 일본 관례법의 초반에 명시된 바와 같이 타인을 희생시키며 영토확장을 하는 것이 전 인류의 가장 큰 업적입니다. 일본의 폭력은 일본인과 일본의 이익만을 위 한 정복의 목표인 것입니다.

이 같은 주장을 명확하게 하고 증명하기 위하여 이제부터 한국에 대한 일본의 폭력성과 1910년부터 일본의 한국점령이라는 두 가지 시각에서 한국에서 일본정책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1, 한국에 대한 일본의 폭력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일본은 먼저 한국 국내 정치에 간섭을 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로 1885년부터 서울에서 반일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일본은 중국에 보상을 요구하였는데 그 이유는 폭동에 중국군이 가담한 것으로 추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본과 중국의 협상은 1885 년 텐진 협정 체결로 일단락됨으로써 양국은 한국에서 일중 군대의 철병을 약속하였고 한쪽이 다른 쪽에게 미리 알리지 않은 상황에서는 파병하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추후에 한국의 부패정권을 상대로 봉기가 일어났을 때 이 부패정권은 중국정부의 도움을 받아 반란을 진압하였습니다. 그런데 반란이 진압된 이후에도 두 강호는 각각의 군대를 철수시키려 들지 않았습니다.

중국이 한국정치에 내정간섭을 거부한 이후 일본은 중국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하고 승리를 거둠으로써 조선에 최고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정책은 한국인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으며 특히 명성황후는 일본의 내정간섭에 반대하고 일본의 음모를 모두 좌절시켰습니다. 1895년 명성황후는 궁에 난입한 일본군에 의해 공식적으로 처형을 당하는 비극적인 시해를 당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일본은 한국 내 일본 저항세력을 무력화시켰지만 결과적으로 한국민 전체를 적으로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한국에 대한 러시아의 탐욕이 드러났을 때는 한반도 전체가 북의 침략으로부터 한 사람인양 뭉치기도 하였습니다.

일본에게는 개입할 수 있는 호기였고 한국은 ‘동아시아의 수호자’와 일 시적인 화해를 해야 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1904년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었고 일본에게 한국은 군사작전기지가 되었습니다. 장비와 인력 면에서 한국은 일본에게 매우 유익했습니다.

러일 전쟁 초기에 일본은 세계에 한국의 정치적 독립성과 영토의 보존을 위해 싸운다고 선언했습니다. 한국에는 그 같은 내용으로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약속을 하였습니다. 1904년 2월 23일 체결된 한일의정서 제3조를 보면, “대일본제국 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확실히 보증할 것”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같은 의정서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군사작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한국의 우편과 통신에 대한 통제가 일본에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하자마자 한국과 공식적으로 맺었던 의정서 과 전세계에 했던 선언을 파기하고 총검을 들이대며 한국을 손아귀에 넣었습니다. 황제와 대신들의 강력한 거부,국민의 탄원서와 통곡,자살로 이어진 탄식, 일본 군 당국 앞에 무력한 온 국민이 주도하는 투쟁 속에서 1905년 11월 17일 일본군의 총검과 대포의 힘으로 을사늑약이 맺어졌습니다.

420년 동안 이어져온 주권국가로서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2000만 국민의 분노와 저항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여러분에게 더 길게 말씀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우리처럼 국제 범죄의 야만적인 공격을 당한 경험의 수위에 따라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고종황제는 자주권 회복을 위해 세계 강국에 호소를 할 목적으로 1907년 헤이그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순진한 행동이었습니까! 고종황제의 특사는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고 일본당국은 이 사건을 빌미로 한국에서 더 단호한 정치를 펼쳤습니다. 고종은 의지가 약한 황태자에게 양위할 것을 강요 당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일본 정부의 도구 역할을 하던 조정의 대신들과 당시 조선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 사이에서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조약의 핵심 내용은 조선통감에게 조선 행정권을 이양한다는 것으로 을사늑약에서는 외교권과 외교문제의 해결 만 이양하기로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신협약안의 두 조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2조 조선 정부는 조선통감의 사전 승인 없이 어떠한 법령,행정명령,규정을 공포할 수 없으며 중요한 행정 조치도 취할 수 없다.

제4조 조선의 전 고위공무원의 임명 및 해임은 조선 통감의 승인 하에 이루어진다.

위 조항들이 얼마나 특정적이고 무례한지 보셨을 겁니다. 그 이후에는 조선 군을 해산시켰고 이에 온 국민은 의병을 조직하며 이 파렴치한 소행에 항의를 제기하였습니다. 이 유명한 의병들의 영웅적인 자취는 전국 곳 곳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들은 곳곳에 숨어서 적절한 시기에 일본 군대와 싸울 준비를 했습니다.

이제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길고도 점진적인 폭력의 마지막 범죄행위를 말씀드리는 일이 남았습니다. 1909년 안중근이라는 용감한 한국 젊은 이가 이토 히로부미-침략을 주도하고 한국에서 일본 제국주의 정책을 펼쳤으며 당시에는 만주에 대한 끝없는 탐욕을 채우려 러시아 첩보원과 음모를 꾸미고 있던-를 정당하게 사살한 이후 일본은 의정서 체결 당시 전 세계와 한국민에게 했던 마지막 공식 약속을 급하게 파기하였습니다. 의정서 체결은 다소간 일시적인 것으로 한국 정부가 제자리를 잡아 아시아 의 평화를 더 잘 보전할 때까지 한국을 통치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1910년 8월 29일 데라우치 마사다케에 의해 한국은 일본에 합병되어 일본의 주(州)로 전락하였으며 초대 총독으로 임명된 데라우치는 인류의 양 심 앞에 부끄러울 만한 피로 물들인 행정 통치를 시작하였습니다.

2. 일본의 한국점령

총독의 연간 보고서는 철저하게 파렴치한 위선으로 합병 이후 지속적인 한국의 발전을 세상에 보여주었고 성공적인 행정을 자랑하였습니다. 또한 특정 부류의 외국인들이 내놓은 표면적인 관찰결과는 순진하게도 공식 보고서의 일부 진실을 뒷받침해주었습니다. 오늘날의 한국이 20년 전 한국과 같지 않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천황의 각별한 신하들의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정책으로부터 얻은 피로 얼룩진 교훈으로 국가 인식이 깨어났다는 의미의 정신적 발전을 제외하고라도 침략을 위한 철도와 도로 건설이라는 물질적 개발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자주권을 회복하지 않은 이상 일본이 이 같은 개발에 대해 자랑할 권리가 있다 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통치를 했더라도 다른 현대적 국가들이 해외무역의 증가와 산업에 과학을 접목시켜 발전하듯이 한국도 발전하지 않았을까요? 한국의 발전은 어떤 식으로 누구의 이득을 위해서 이루어졌습니까. 다시 말해 어떤 정신으로 한국이 통치되었습니까? 이와 같은 질문에 한국에서의 일본 행정의 다양한 절차를 간략하게 분석하여 답변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a) 행정조직

행정조직의 형태와 원칙은 다른 제국주의 정부의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살펴볼 필요가 없겠습니다. 단 가장 특정적인 부분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아무런 의회기구가 존재하지 않는 한국에서 가장 높은 권력을 지니고 있는 총독이라는 직책은 매우 흥미로운 것입니다. 한국 헌법에 따르면 이 직책은 대개 일본 해군사령관이 맡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는 일본 의회 앞에 책임이 없으며 천황에게만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일본이나 한국에서 그의 정책을 비판할 수 있는 기관은 전혀 없으며,그의 정책에 반대하는 소리를 내려는 일본 또는 한국 신문들은 모두 정간되거나 다른 주인에게 매매되었습니다.

일본은 군사정신으로 무장한 채 한국에 힘을 과시하였습니다. 모든 공무원들은 일본군의 것과 구분이 안 되는 정복을 착용하고 칼을 차야 합니다. 또한 공무원 대신에 계급이 다양한 군인들을 훈련시켰는데 이는 총독부터 정부병원의 의사와 각급 학교의 교사에까지 적용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420년 동안 위대한 도덕적 문화 속에서 생활했던 평화적이고 정직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국민이,일상적으로 당하는 수도 없는 끔찍하고 더러운 폭력적 상황들이 얼마나 힘겨웠겠습니까.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였을 당시에 주둔군은 2개 사단이었는데 1915~1916년 사이에 2개 사단이 증파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증강은 불필요한 것으로 현 정부에 대항하는 어떠한 저항 움직임도 진압할 수 있을 정도로 경찰과 헌병의 수가 많았습니다. 1915년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경찰과 헌병 본부가 273곳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일본 정부가 세운 병원이 나 학교 같은 자선 기관의 수-각각 14개와 386개-와 비교하면 놀라울 정 도로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공공 여론과 언론을 무시하는 정책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다음은 일본의 유력 신문이 보도한 찬사로 가득한 개탄입니다. “언론에 대한 데라우치의 대응 정책은 정말 효율적이었다. 가장 유력한 신문을 모두 짓밟았을 뿐 아니라, 가장 약한 신문을 복종하도록 만들었다. 여론이 자유롭게 분출 될 수 있는 모든 출구를 봉쇄했으며 바깥 세상에 한국의 실제 상황을 모르도록 했다."(『도쿄 아사히. 1916년 10월)

b) 사법행정

일본은 한국을 일본 국민과 같은 법으로 통치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법에 따른 통치는 단순한 형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법의 적용에 있어서 특별법이 일반법에 우선한다는 법적인 원칙에 따라 6개의 일본법은 방대 한 양의 특별법이 적용되는 상황에서 완전히 무용지물이었습니다. 더군다나 특별법이건 일반법이건 간에 이 법은 일본인이 만든 것으로 한국민을 전혀 모르며 한국의 역사,전통적 기관,관습과 특히 한국민의 감정을 전혀 모르는 이들이 만든 것이었습니다. 일본법이 한국인에게 맞는다고 치더라도 적용 자체가 편파적이었습니다. “한국의 음모”라고 불리는 유명한 소송만 보더라도 한국인이 법으로 어떻게 보호를 받는지 잘 보여줍니다. 데라우치를 해치려는 음모를 꾸였다는 추정만으로 결백한 농민, 젊은 학생과 수많은 지식인들을 체포하는 것은 너무 과한 일입니다. 신중한 사람 이라면 그 누구도 자백을 얻어내기 위해 조직적으로 고문을 했다는 모순 적인 소식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불행히도 이 같은 소문은 사실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고문 받은 123명의 포로들은 현재 석방되었는데 그들은 모두 각각 어떠한 고통을 당했는지 이야기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정치 반대자는 이처럼 일반 죄수들과 같이 고문을 당했고 대개는 법원의 사전 심의도 없이 소위 “특별법”에 따라 헌병대에서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한국인에게는 개인의 자유가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개인 서신은 검열받았고 개인 주택은 파렴치하게 폭력적으로 아무 때나 수색을 당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자유롭게 통행할 수도 없었습니다. 당국에 이동하는 목적지와 이유를 알려줘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해가 지날수록 구금자의 수는 늘어만 갔습니다. 공식 수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1911년 1만6,807

1912년 1만9,499

1913년 2만1,846

1914년 2만4,434

1915년 2만7,255

1916년 3만2,836

c) 교육

한국에 적용된 교육방식의 일반적인 경향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인 들은 무지하게 내버려둬야 하며 교육을 많이 받으면 안 된다. 그리고 한국인들의 교육이라는 것은 단지 형식적으로 있는 것이다." 다음의 사실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1917년 관보를 살펴보면 한국인을 위한 공 립학교의 수는 526개로서 주민 31,650명당 한 곳인데(당시 한국인구는 16,648,129명), 일본인들을 위한 학교는 367개고 일본주민 874명당 한 곳 꼴이었습니다.(일본 주민 수는 320,938명)

자세한 통계수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학교 (학생 수)

보통학교 441개 (8만 1,845명)

고등보통학교 7개 (1,791명)

농업,상업,공업학교 74개 (2,029명)

의학교 1개 (253명)

법률학교 1개 (138명)

공업학교 1개 (282명)

농업학교 1개 (72명)

총 526개교 (8만6,410명)

일본학교 (학생 수)

소학교 342개 (3만7,911명)

중학교 3개 (1,478명)

여자고등보통학교 10개 (1,648명)

고등상업중학교 7개 (899명)

동양척식학교 l개 (18명)

상업기술학교 l개 (513명)

총 367개교 (4만2,467명)

한반도 내 한국인구와 일본인구에 있어서 교육분야에 커다란 불평등이 존재하는 비율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는 같은 해에 일본인을 위해서는 59개 학교를 신설한 반면에 한국인을 위해서는 단 25개 곳을 신설하였습니다. 일본인과 같은 교육여건을 마련하려면 한국인 학교는 526개가 아니라 1만 9,048개가 필요한데 말입니다. 또한 통계수치를 얼핏 봐도 알 수 있듯 이 고등 교육이 거의 사라졌다는 사실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의 모든 학교에서 교육은 일본어로 진행되었습니다. 1908년에 공립학교에는 233명의 한국인 교사가 있었던 반면에 일본인 교사는 63명이었습니다. 1913년에 한국인 교사는 1138명이고 일본인 교사는 458명이었는데 다시 말해 5년간 한국인 교사의 증가율 대 일본인 교사의 증가율은 4.88대 7.2였습니다. 한국인 학생은 학과 과정 중 삼분의 이를 일본어를 배우는데 할애해야 했는데 대개 일년이 지나면 어느 정도 습득이 가능했습니다. 일본인과 한국인을 교육하는데 있어서 차별을 둘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요. 두 학교에 서 가르치는 주제가 양과 수준에 있어서 다르다는 것 외에도, 한국의 남학교에서는 한국 역사와 지리 교육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외국어 또한 금지되었습니다. 교과과정은 일본 역사, 지리와 문학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한일 합병 이후, 일본을 제외한 다른 나라로 유학간 한국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설령 위장을 하여 떠났다 하더라도 귀국을 할 수 없었는데 그의 이름이 ‘위험 인물’ 명단에 등재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 모두는 정부 형사의 감시를 받기도 했습니다.

한국인들은 고위직에 진출하기 위한 시험을 치를 수가 없었습니다. 몇 명의 사법 공무원이 있긴 했는데 이들은 판사라기보다는 통역관으로 일했습니다. 이들에게는 검찰관의 업무에 관여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또한 어 떠한 한국인 판사도 일본인의 소송을 다룰 수 없었습니다. 한국인 검사의 봉급은 일본인 동료에 비해 약 삼분의 일에 불과했는데 같은 학교에서 수학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봉급 외에도 상당한 액수의 수당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인들은 정부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었고 그들의 이해관계 대개는 사활이 걸린 에 반하여 이루어진 정책을 비판할 권리도 없었습니다. 다음에는 1924년 총독부 공무원의 공식 수치입니다.

공무원 수 (봉급)

일본인 3만433 (3,252만 9,575엔)

한국인 1만9,920 (1,035만 2,960엔)

같은 해 한국인구의 통계수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인 41만 1,595

한국인 1,761만 9,540

일본인 공무원의 비율은 수치가 명확하게 보여주듯이 일본인 인구의 십분의 일인데 비해 한국인 공무원 수는 한국 인구의 천분의 일이었습니다!

d) 경제 정책과 식민지화

먼저 한국에는 경제적 자유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거의 모든 부유층 가구에는 일본인 조사관이 상주하여 재산과 재무 경영을 감시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은행(모든 은행은 일본은행이었음)에 예금이 있던 한국인들은 은행장에게 돈의 목적과 사용용도를 알려주기 전에는 막대한 금액을 인출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역이나 기업의 자유로운 운용에 대한 공식적 인 속박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상인이든 기업인이든 모두 개업을 하기 위해서는 총독에게 사전 승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승인은 느리고 억압 적이었기 때문에 수천 개의 사업체들이 생기기도 전에 사멸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부동산의 의미가 매우 중요하고 한국적 애국심의 한 요소 이기도 합니다. 농민들에게서 볼 수 있는 이 같은 본능은 일본 식민정책 에 장애가 되었습니다. 가장 좋은 경작지들이 한국인 소유였기 때문에 일본정책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이들 토지수용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1908년 일본정부의 지시 하에 회사가 설립되었는데(회사의 자산은

1,000만엔으로 그 중 6만엔은 당시 한국정부로부터 받아낸 채권이었고 가장 좋은 공유지였음), 일본정부는 국고에서 연간 250,000달러를 선취하여 이 동양척식회사에 지원하였습니다.

1919년 1월 26일 뉴욕타임즈 기사를 보면 이 회사의 설립 목적은 일본 에서 스스로의 능력으로 자립할 수 없는 일본사람들을 한국의 식민지화에 이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에게는 한국으로의 이주비가 지급되었고 주택과 경작지, 식량, 종자 등이 제공되었습니다. 이 회사는 한국농부의 토지를 헐값에 매수하였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여기서 일본정부가 개입을 하게 됩니다. 아시아적인 방식으로 개입을 하는데,모든 금융조직이 정부 감시 하에 놓이는 조선은행에 집중이 됩니다. 영국은행이나 미국 재무부, 프랑스 중앙은행과 견줄만한 이 막강한 조직은 매개체인 지점을 통하여 나라의 모든 화폐를 끌어 모으고 토지의 가격을 하락시켰습니다. 다른 한 편 한국인들은 세금을 내고 일상생활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토지를 매각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토지 가격의 하락은 급격하게 이루어졌고 매각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은행직원들은 실제 가격의 오분의 일 가격으로 토지를 매입하였습니다.

“한국의 가장 비싼 토지의 오분의 일 이상이 일본 이민자의 손으로 넘어갔는데 이들은 은행의 조작에 의해서 땅을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십 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3만5,000 일본인 가족이 한국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토지를 매각한 한국 농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상업을 하던가 산업분야에 종사할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끔찍한 기업 승인 정책의 어려움을 극복했을까요? 불행히도 그들에게는 하나의 출구 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조국을 떠나 생계와 정신적인 자유를 위해 막막한 북만주의 먼 고장으로 이주를 했습니다. 최근의 정보에 의하면 1926년 11월 중순 이후부터 한국을 떠난 이들이 하루에 수백 명이라고 합니다. 만주에 거주하는 한국인 농부수가 백만 명에 달한 지 오래입니다. 요약하면 한국인의 축출과 일본인의 무제한적 이민이 동양척식회사 정책의 핵심이었습니다.

e) 노동

노동자가 정부의 정책으로 가장 많은 고통을 겪었는데 이는 노동자가 임금 없이 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특정적인 예를 들자면 정부는 새로운 도로를 건설했는데 산업이나 무역을 개발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군사작전과 경찰의 통행 용이성을 위해 도로를 건설한 것이었습니다. 어떠한 배려나 동정심도 없이 정부는 토지를 수용하기 위하여 법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노동자들은 임금도 받지 못한 채 이 도로들의 건설에 투입되었습니다. 불쌍한 무급 노동자나 농민들이 일하기에 불편한 날이든 아니든 간에 그들은 당국이 요구하는 날에 일해야 했습니다. 도로건설은 다음과 같은 정신으로 이행되었습니다. 국민에게 행해진 어떠한 피해나 부당행위와 관계없이 계획이 세워졌고 명령이 하달되었으며 일할 사람들이 소집되었고 그들에게 일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그들이 하소연을 하면 견책을 받았고 애원을 하면 채찍질이 가해졌으며, 저항하는 이들은 투옥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도로를 건설하여 일본 군대가 더 쉽게 전개하고, 도로 건설을 다그치기 위해 한국에서 더 편하게 행군할 수 있도록 해주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의 생활상은 해가 갈수록 비참해졌습니다. 1924년의 통계에 따르면 한국농민의 연간 소득은 12엔을 조금 넘는 수준으로 대략 120프랑 정도에 불과합니다. 하찮은 금액으로 천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각각 일 년 동안 생활해야 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이 합병 이후 일 본의 통치로 이루어진 주요 사실입니다.

우리의 분석을 더 깊이 하지 않더라도 한국에서의 일본 식민 제국주의 정책은 국제 사범 정책 중 가장 범죄적이고 부끄러운 것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졌습니다. 이제 문명과 인류를 더럽히고 타락시키는 이 같은 수치와 범죄를 씻어내고 처벌할 때가 되었습니다!

관련기사 다시 부르는 3월의 노래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사회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