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동물 시장
※인사할 때마다 상대를 축복(슬라맛)하는 나라 인도네시아. 2019년 3월 국내 일간지로는 처음 자카르타에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는 격주 목요일마다 다채로운 민족 종교 문화가 어우러진 인도네시아의 ‘비네카 퉁갈 이카(Bhinneka Tunggal Ikaㆍ다양성 속에서 하나됨을 추구)'를 선사합니다.
신기함은 잠시, 애절함이 길다. 빤히 응시하는 녀석들의 커다란 밤색 눈망울을 떨칠 수 없다. 길이 60㎝, 너비 35㎝, 높이 45㎝ 녹슨 철창 안에 구겨진 생명체는 숨만 쉬는 물체에 가깝다. 기역(ㄱ)자로 꺾어진 100m 남짓 시장은 거대한 조립 감옥 같았다. 수백 종의 동물들은 인간에게 포획된 죗값(?)을 치르고 있었다. 자카르타 자티네가라 지역에 위치한 동물 시장(pasar hewan)의 지난달 22일, 25일 풍경이다.
열대 우림 동물의 보고(寶庫)라는 명성답게 인도네시아 동물 재래시장엔 한국에서 온 기자가 처음 보거나 낯선 짐승이 많았다. 세일핀리자드(하이드로사우루스), 큰짧은코과일박쥐, 슈가글라이더… 그들의 존재는 값으로 매겨졌다. 각각 35만루피아(2만9,000원), 40만루피아(3만3,000원), 17만루피아(1만4,000원) 식이다. 에누리가 가능하다는 친절한 설명이 따라붙었다.
어떤 녀석들은 인도네시아 이름을 듣고 검색해 봐도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포유류 파충류 양서류 어류 조류 곤충으로 분류해 가짓수를 세려던 계획은 시장 초입에서 접었다. 상인은 “200종은 훨씬 넘을 것”이라고 했다. 평일 낮 시간인데도 꽤 붐볐다.
언뜻 너구리처럼 보이는 동물이 눈을 당겼다. 세상에서 가장 비싸고 귀하다는 루왁 커피(Kopi Luwak)의 그 루왁(사향고양이)이라고 했다. 상인은 “50만루피아(4만1,000원)에 사 가면 집에서 루왁 커피를 만들어 마실 수 있다”고 꼬드겼다. “싫으면 하루에 바나나 두 개만 먹이면 된다”고 덧붙였다. 알려진 대로 루왁 커피는 사향고양이가 배설한 커피콩으로 만든다. 사향고양이의 소화기관을 거치면서 커피 열매는 위산과 효소 작용으로 발효 상태가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원래 루왁 커피는 빈자(貧者)의 커피였다.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배하던 네덜란드가 커피 농장을 경영하던 17~18세기, 수확량 대부분은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으로 팔려갔다. 이미 커피 맛을 경험한 인도네시아인들이 정작 커피를 구할 수 없자 산과 들에서 사향고양이 똥에 섞인 커피콩을 주워 마신 게 원조다. 1990년대 초 커피 무역업자들이 서구에 소개하면서 인기를 끌게 됐다.
사향고양이가 1㎏의 커피 열매를 먹으면 30g의 루왁 원두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자 사향고양이를 대량 포획해, 좁은 철창에 가두고, 강제로 커피 열매를 먹이는 동물 학대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말하자면 동물 시장의 사향고양이는 루왁 커피의 가정용 소량 생산을 위한 도구, 즉 ‘살아있는 커피 머신(기계)’으로 홍보되고 있는 셈이다.
관심을 보이자 상인이 생후 두 달 된 몸길이 30㎝ 사향고양이를 철창에서 꺼내 보였다. 밖으로 나온 사향고양이는 이미 감금 생활에 적응된 듯 자꾸만 철창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상인은 “얼마 전 한국 사람이 10여마리를 사갔다”고 소개했다. 놀라 묻자 “숲에 다시 풀어주려고 한다더라”라고 답했다.
큰짧은코과일박쥐도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길이 70㎝가 넘는 몸이 45㎝ 높이 우리 안에 구겨진 채 매달려 있었다. 다른 상인은 “천식에 (효과가) 좋다”라며 “그냥 가져가면 40만루피아지만 끓여먹을 수 있게 (즉석에서) 손질한 살코기는 50만루피아(4만원)”라고 했다. 그 곁에는 목줄을 한 원숭이 한 마리가 제대로 서기도 힘든 철창 안에서 흥정하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국에선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하늘다람쥐는 팔려나가기 위해 수시로 철창 밖으로 나와 하늘 높이 던져졌다. 네 다리를 쫙 펴며 활공하는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서다. 병아리들은 사람에게 팔리는 대신 점심식사용으로 뱀 우리에 들어가야 했다. 시장에서 가장 비싸다는 이구아나(16만원), 아이들이 좋아한다는 토끼와 고양이, 온갖 종류의 낯선 물고기와 새들도 있다.
멸종위기종으로 분류돼 판매가 금지된 “오랑우탄이나 코모도왕도마뱀은 없느냐”고 묻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잔뜩 경계하더니 이후엔 사진 촬영도 막았다. 어쩔 수 없이 사흘 뒤 시장을 다시 찾아가야 했다. 한 현지인은 “그런 동물들은 블랙마켓(암시장)에서도 은밀히 거래될 정도”라며 “묻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라고 조언했다.
동물 불법 판매나 밀수는 인도네시아에서 흔한 뉴스다. 올 3월엔 약을 먹여 의식을 잃게 한 오랑우탄을 밀반출하려던 러시아인이 붙잡혔고, 그 얼마 뒤엔 코모도왕도마뱀 41마리를 해외로 빼돌리려던 일당이 경찰에 검거됐다. 돼지코강거북, 천산갑, 엄브렐라유황앵무 같은 세계적인 멸종위기종들이 식용, 약용이나 보신용, 관상용 등으로 몰래 팔려나가고, 그 과정에서 수없이 죽어가고 있다. 한반도의 9배 면적, 문명이 닿지 않은 열대 우림, 1만7,000여개의 섬이 산재한 지리적 여건상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그만큼 많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인간의 탐욕이 밀렵을 부추긴다.
인도네시아 동물 시장의 모습도 어쩌면 그런 현실이 투영된 것인지 모른다. 함께 시장을 둘러 본 회사원 헤르만(37)씨는 “동물 밀수 단속은 꾸준히 하고 있지만 재래시장의 환경은 여전히 개선되지 않는 것 같다”라며 “이것이 인도네시아의 현재지만 차츰 나아지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동물들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만 부끄러워 멈추고 말았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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