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오후 선거제 개혁 패스트트랙 처리를 위한 정치개혁특위 전체회의장 앞에서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와 의원들이 패스트트랙 안건이 통과되자 회의장 밖에서 항의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29일 밤 우여곡절 끝에 선거제 개혁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법안, 검경 수사권 조정 법안이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에 올랐다. 하지만 최장 330일이 남아, 갈 길은 멀고 험하다. 대치 정국에서 패인 생채기도 깊다. 대규모 고발전에 야당의 장외투쟁까지 당분간은 냉각기가 불가피해 보인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여야가 총선을 앞두고 숨겼던 속내와 말하기 불편했던 진실도 고스란히 노출됐다. 대화 국면이 열리면 여야 모두 되새겨야 할 대목이다.

현행 소선거구제는 승자독식 구조로 표의 비등가성이 가장 큰 문제로 꼽힌다. 가령 20대 총선 기준으로 더불어민주당은 25.5%의 정당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실제 의석은 41.0%를 차지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유한국당도 마찬가지다. 낮은 득표율로도 당선이 되고, 1등에게 간 표가 아니면 모두 사표(死票)가 되는 구조다. 지난해 11월 한국일보가 연재한 ‘민심 왜곡 그만! 선거개혁 마지막 기회’라는 기획 시리즈물의 결론도 현행 병립형 단순비례대표제를 비례성과 대표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작은 당이 의석 수를 늘리려면 거대 양당은 기득권을 놓아야 한다는 점이다. 현재로선 표의 등가성을 높이면 정의당(지역구 1석ㆍ비례대표 5석)이 수혜를 가장 많이 받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그 효과는 적지 않다. 민주당, 정의당, 민주평화당을 잇는 진보개혁 블록이 형성돼 한국당은 제1야당의 위상이 약해지고 범여권으로 운동장 자체가 기울 수 있다. 민주당 의원들조차 “새 선거제도가 민주당에게는 손해지만, 한국당에게는 재앙”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게 현실이다. 야당이 ‘독재 타도’ 구호를 외친다고 ‘독재정권의 후예들이 어따 대고…’식으로 응수해선 풀 수 없는 문제다.

선거제는 게임의 규칙이다. 제1야당을 빼놓고 선거의 룰을 정하는 게 정상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당이 자초한 측면이 있다. 소득주도성장 기조가 흔들리고 북미 비핵화 협상이 교착되자 기세가 오른 한국당은 여당의 개혁 입법을 모두 막겠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제왕적 대통령제 하에서 정권이 안 되기만 바라는 게 제1야당의 속성이라곤 하지만 무조건 안 된다는 한국당 태도는 임계점을 넘어섰다. ‘자유한국당 정당해산’ 국민청원에 130만명이 서명한 이유를 곱씹어봐야 한다.

선거제 개혁을 주도한 정의당,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도 부담스러워하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국회의원 정수를 지역구 225명, 비례대표 75명 등 300명으로 정하고, 권역별 50%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한다는 내용의 선거제 개혁안은 알파고도 풀기 힘든 난제라는 비아냥을 듣는다. 법안에 의석 배분 산식(算式)이 6개나 포함됐을 정도다. ‘놀고 먹는 국회가 뭐가 예쁘다고 의석 수까지 늘려주냐’는 여론에 밀려 의원정수 확대까지 나아가지 못한 게 패착이었다. 그 바람에 선거제 패스트트랙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도 함께 올라탔다. 줄어드는 지역구 28곳은 물론이고 통폐합이 거론되는 인근 지역구까지 여야를 가리지 않고 줄잡아 수십명의 의원이 본회의장에서 반대표를 던질 수도 있다. 내년 4월 총선에 닥쳐서 본회의 통과를 시도한다면 충돌은 더 커질 것이다.

기대와 우려를 안고 ‘패스트트랙 열차’는 출발했다. 한쪽에선 “촛불혁명 시민의 요청이 법제화되기 시작하는 것”이라며 반기고, 다른 한쪽에선 “좌파독재가 시작됐고 민주주의는 죽었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여론의 지지를 받는 오랜 개혁 과제들이었기에 겨우 출발했을 뿐, 개혁 열차가 어느 방향과 어떤 속도로 가야 할지는 지금부터 정해야 한다. 전쟁을 문명화한 게 정치라고 했다. 권력을 놓고 때로는 사납게 싸우지만, 가능성의 공간을 창출하면서 갈등을 조정하는 것도 정치니 일단 기대를 걸어본다. 하지만 남은 기간에도 여야가 대결 구도에서 못 벗어난 채 쌈박질만 하고 있다면? 분명 국민 심판의 날은 패스트트랙보다 더 빨리 찾아올 거다.

김영화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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