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신임 부사의 놀라운 일 처리 
다산의 '여유당전서'에 실린 '장천용전' 부분. 한국고전번역원 제공
 ◇곡산 백성이 안도의 한숨을 쉬다 

이계심 석방 사건이 화제를 몰고 온 가운데, 곡산 백성의 눈길이 새 부사에게 일제히 쏠렸다. 고마고(雇馬庫)는 백성에게 세금 외에 가외로 거두는 일종의 기금으로, 공무로 보내는 인편이나 말에 드는 비용을 민간에서 거두는 것이다. 이것이 갖은 폐단의 원흉 중 하나였다. 다산은 1년에 900냥이나 되는 이 비용 지출을 부임 직후 바로 폐지해 버렸다. 이 첫 번째 명령이 알려지자 백성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음은 보민고(補民庫) 문제에 손을 댔다. 이 또한 한 해에 1,000냥이 넘는 거액을 추가로 징수하고 있었다. 이유를 묻자 감영에서 꿀에 부과하는 세금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감사가 봄가을로 백밀(白蜜) 세 말과 황밀(黃蜜) 한 섬을 징수해 가는데, 감영의 아전들이 두 배씩 징수해 가면서도 지급 액수는 공문에 있는 숫자대로만 지급해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축난 금액을 보전하려면 어쩔 수가 없다는 대답이었다.

다산이 말했다. “앞으로는 공문에 적힌 숫자와 빛깔대로만 보내라.” 아전들이 대답했다. “저 승냥이와 이리보다 더한 감영의 아전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해오던 대로 하시지요.” “일단 가서 살펴 보거라.” 감영으로 간 아전들은 예상대로 문서 수령을 거부당했다. 비장(裨將)이 감사에게 아뢰자 감사가 뜨끔해서 말했다. “저 사람은 고을 백성을 등에 업고 있고, 나는 내 입 밖에 없으니 다툴 문제가 아니다”하고 그대로 받게 했다. 감사는 다산이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으므로 공연한 문제를 만들 생각이 없었다. 보민고 문제의 해결로 해마다 1,000냥이 남게 되자 곡산부의 회계에 갑자기 여유가 생겼다.

다산의 일처리는 거침이 없었다. 곡산 백성 김오선(金五先)이 시장에 소를 사러 갔다가 칼을 맞은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근처 도적에게 살해된 것이었는데, 처자식과 마을 사람들이 후환이 무서워 입을 다물고 시신을 그냥 매장했다. 뒤늦게 이 말을 전해 들은 다산은 직접 그 마을로 달려가 현장 조사를 했다. 돌아오는 길에 김오선이 살던 마을에 들러 물었으나 다들 쉬쉬 하는 통에 진상을 밝힐 수가 없었다.

밤중에야 단서를 얻어, 토졸(土卒) 수십 명을 보내 도적의 얼굴을 아는 자를 잡아오게 했다. 계략을 일러주고 노인령(老人嶺) 아래에서 엄습해, 김오선을 죽이고 소를 빼앗은 김대득(金大得)이란 자를 체포해 왔다. 다산은 곡산부 문 앞 저자에서 곤장을 쳐서 김대득을 죽였다. 겁을 먹은 도적 떼가 소문을 듣고는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부임한 직후 일어난 이 몇 번의 일로 새 부사에 대한 백성들의 환성과 찬사가 일제히 쏟아졌다.

 ◇너희가 주인이다 

1797년 9월, 낡아 퇴락한 곡산 정당(政堂)의 벽채가 무너져 내렸다. 수리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다산은 이렇다 저렇다 아무 대꾸가 없었다. 어느 날 다산은 아전을 불렀다. “이것이 정당의 설계 도면이다. 이대로 작업을 진행하거라.” 아전이 들여다보니, 건물의 세부 설계도면뿐 아니라 소요되는 재목도 종류에 따라 구분해서, 베어 와야 할 나무의 숫자까지 정확하게 적혀 있었다. 다들 입을 딱 벌렸다. 여기에 더해 다산은 수원 화성 공사에 투입되었던 유형거와 삼륜거의 도면을 주어 그대로 만들게 했다.

수레가 만들어지자 그날로 작업이 시작되었다. 아전과 장교를 보내 하루 만에 재목 베어 오는 일을 다 마쳤다. 때마침 매서운 추위로 개울과 땅이 얼어붙어 어렵지 않게 운반해서 읍으로 가져왔다. 수레에 실려 재목이 도착하자, 다산은 다시 아전과 장교들을 불렀다. “건물이 무너지는 것은 터를 굳게 다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당 건물은 규모가 있어야 한다. 다만 너무 화려해서는 안 된다. 이 집은 너희가 주인이다. 나는 임기가 끝나 떠나면 그만인 사람이다. 백성들은 가끔 일 있을 때만 들어오고, 산골 사는 백성은 평생 들어올 일도 없다. 너희 집을 너희가 짓는 일이니 직접 힘을 쏟아야 한다.”

이후 나무를 말리고 다듬는 석 달 동안 터를 다지기 위한 달구질이 그치지 않았다. 흙도 석회와 가는 모래, 그리고 황토를 고루 섞은 삼화토(三和土)만을 쓰게 했다. 백성들은 신임 부사의 기민한 일처리에 놀라고, 애정 어린 당부에 감격해 서로 도와 짧은 시간 안에 백성의 힘을 뺏지 않고 일을 마쳤다. 반년 뒤 곡산부에는 번듯한 정당 건물이 우뚝하게 솟았다.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새 정당 곁에는 연못을 파고 정자도 세웠다. 어느 날 달밤에 정자에 나가 앉아있던 다산이 혼잣말을 했다. “이럴 때 퉁소 소리를 들으면 한결 운치가 있겠다.” 아전 하나가 나서며 말했다. “읍내에 장천용이란 자가 퉁소를 잘 붑니다. 하지만 관아에는 오려 하지 않으니 붙잡아 올까요?” “붙잡아 올 수야 있겠지만, 그래서야 퉁소를 불려 하겠느냐? 그저 내가 왔으면 하더라고 전하기만 해라.” 그러자 신통하게 장천용이 왔다. 하지만 그는 이미 엉망으로 술이 취한 상태였다. 맨발에 옷에 띠조차 두르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술을 내오라고 야단이었다. 몇 잔을 마시더니 아예 인사불성이 되어 드러누워 버렸다.

다음날 맨 정신에 불러 술 한 잔을 내리자, 그가 말했다. “퉁소보다 그림을 잘 그리옵니다.” “비단을 가져오너라.” 거침없이 쓱쓱 긋는 붓끝에서 온갖 사물이 피어났다. 믿을 수 없는 솜씨였다. 그리고는 술을 달라더니 다시 엉망으로 취해 돌아갔다. 퉁소를 듣자고 이튿날 다시 찾았으나 그는 벌써 금강산 여행을 떠났다는 전언이었다.

술주정뱅이에다 불손하기 짝이 없는 천민이었지만 다산은 그의 재능을 아껴 대우하고 존중해주었다. 그는 제멋대로 굴고 거리낌 없이 행동했으나 다산 앞에서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뒤에 다산이 곡산부사를 그만두고 서울로 돌아가자, 몇 달 뒤 그는 정성껏 그린 산수화 한 폭을 다산에게 보내 그간 감사했다는 뜻을 전했다. 다산은 그를 위해 ‘장천용전(張天慵傳)’을 남겼다.

그 글 끝에다 다산은, 못 생긴데다 사지가 뒤틀려 살림도 못하고 자식도 못 낳는 그의 아내 이야기를 소개했다. 그녀는 성품마저 못되어, 늘 누워서 장천용에게 욕을 퍼부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아내를 끔찍이 위했으므로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고 썼다. 아마도 다산의 뜻은 장천용보다 잘 살고 신분이 있는 사람도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를 지키지 않는데, 나는 그가 그 같은 아내를 버리지 않고 위하는 마음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듯하다.

 ◇대체 어쩌시려고요? 

1797년 겨울 황해감사가 비밀공문을 다산에게 보냈다. 곡산부에 속한 토산 고을의 장교가 도적을 잡아 오던 중 도적떼가 들이닥쳐 도적을 풀어주었다는 얘기였다. 게다가 장교를 자기들 소굴로 끌고 가서, 여러 두령이 모인 가운데 장교의 죄를 꾸짖고 돌려보냈다는 토산 현감의 보고서가 함께 도착했다. 심지어 이튿날 새벽에는 50~60명의 도적 떼가 관아로 쳐들어와 소동을 부리기까지 했으니, 곡산부사가 도적의 이 같은 변고를 책임지고 진압해 체포하라는 명령이었다.

공문을 본 장교와 아전들이 동요했다. 진압 계획을 세우려 하자, 다산이 제지했다. 대신 삐쩍 마른 아전 한 명과 장교 한 명을 불러 도적의 소굴로 다녀올 것을 명했다. 두 사람이 울며 살려달라고 빌었다. 다산이 말했다. “염려 마라. 포승줄도 필요 없고 그저 빈 몸으로 가거라. 내 뜻을 잘 전하고 적장에게 이리로 오란다고 하거라.” 다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대체 어쩌시려고요?” 다산은 태연했다. “두고 보면 안다.”

과연 사흘 만에 앞서 떠났던 두 사람이 적장 10여명과 함께 왔다. 조사해보니 그저 평범한 일반 백성이었다. 다산이 말했다. “너희는 죄가 없다. 집으로 돌아가거라. 대신 저 토산의 장교를 잡아 오너라.” 그리고는 붙들려온 토산 장교에게 다짜고짜 곤장을 되게 쳤다. 다들 놀라 외쳤다. “대체 왜 이러십니까?” 다산이 대답했다. “태평한 세상에 어찌 백성이 장교를 끌고 가서 죄를 주고, 관아를 침범하는 일이 있겠느냐? 나는 처음부터 이 일이 무고인줄 알았다.” 토산 장교가 평소 못 마땅해 하던 그곳 백성에게 분풀이를 하려고 없는 일을 잔뜩 지어내 도적 떼로 내몰려고 지어낸 사건이었다. 백성들이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기미를 먼저 알다 

1799년 1월에 갑자기 전국적으로 유행성 독감이 돌았다. 전염성이 강해서 감기에 걸린 노인들이 대부분 죽어 나갔다. 이 병으로 전국에서 12만 8,000명이 죽었다고 ‘조선왕조실록’ 1월 3일자 기사에 적혀있다. 다산도 이 병을 호되게 앓고 겨우 회복되었을 정도였다. 하루는 다산이 뜬금없이 관리를 불러 물었다.

“황제의 칙사가 오게 되면 가장 걱정스런 일이 무엇인가?”

“돗자리입니다. 황해도에서는 배천(白川)의 강서사(江西寺)에서만 용수석(龍鬚席)이 나는데, 칙사가 올 때마다 도내의 사람들이 머리를 싸매고 달려가 사는 통에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곡산은 배천과의 거리도 도내에서 가장 멉니다.”

“알았다. 너는 지금 바로 떠나 강서사로 가서 용수석을 사가지고 오너라.”

관리가 고개를 갸웃하며 떠났다. 그가 돗자리를 사가지고 돌아오자마자, 중국 황제의 붕어(崩御)를 알리는 칙사가 온다는 기별이 당도했다. 족집게 점쟁이다! 다들 놀라서 술렁거렸다. 다산이 말했다. “이 병이 의주 쪽으로부터 감염되어 온 것을 보면 중국에서 온 듯했다. 황제가 나이가 많았으니 이런 일이 있을 것으로 짐작했더니라.”

곡산에 머문 2년 동안 이런 예는 다 적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다산의 일 처리는 늘 허를 찔렀다. 관아에서 소란을 떨다 달아난 수괴를 오히려 칭찬한 후 무죄 방면하고, 도적 떼를 잡아넣을 줄 알았는데 도리어 포교를 매질했다. 건물을 짓자 하면 딴청을 하다가 목재 계산까지 다 끝낸 설계 도면을 내놓았다. 술주정뱅이 천민 예술가의 역량을 평가해 오히려 그의 존경까지 이끌어냈다. 돌림병이 온 방향을 보고 황제의 죽음을 미리 알았다.

그는 늘 이랬다. 의표를 찌르고 예상을 빗겨갔다. 하지만 모두들 그 결과에 놀라고 과정에 감탄했다. 그 바탕에는 늘 백성에 대한 사랑이 깔려 있었다. 핵심 가치를 세우고 합리적 절차로 진행해 누구든 승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곡산 시절 다산의 활약은 실로 눈부신 데가 있었다. 각종 아전의 비리와 못된 관행이 발을 붙일 수 없었다. 늘 허덕이던 재정이 충실해졌다. 시달림만 당하던 백성들이 처음으로 국가로부터 존중 받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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