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저는 지방에서 두 딸을 키우는 엄마예요. 올해 고3인 둘째는 태어나서부터 항상 주위에서 예쁘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어요. 어렸을 때부터 키도 큰 편이어서 주위에서 미스코리아나 모델 하란 얘기도 많았어요. 중3 때부터 모델 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해서 1시간 이상 떨어진 부산으로 학원을 보내기도 했어요. 학원 수료 후에는 모델 활동도 꽤 했고,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촬영을 하러 가기도 합니다.
딸이 저와 마찰을 빚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부터였어요. 외박문제와 늦게 귀가하는 것 때문에 툭하면 싸웠고, 싸우고 나서 딸은 자해를 합니다. 지난해 여름, 딸의 허벅지 양쪽이 모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더군요. 딸이 자해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무슨 일이냐고 다그쳐 물어도 말이 없더군요. 지난해 10월 딸은 친구들과 서울에서 열리는 패션위크에 1박 2일로 다녀오겠다고 하더군요. 당시에 친구들과 나체로 촬영하질 않나, 어울리는 남자 애들도 있어, 너무 걱정돼 외박은 절대 안 된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다른 친구들은 외박도 잘하고, 여행도 가는데 왜 나는 안 되냐”며 대들더라고요. 싸우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딸이 칼로 자신의 팔을 가늘게 여러 번 그어 놨습니다.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제가 “혹시나 네가 술 먹고 안 좋은 일을 당해서 임신이라도 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으니 “낙태하면 되지”라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을 하더군요.
최근에는 자기 생일에 비슷한 시기의 생일인 언니들과 밤새도록 파티를 하겠다고 저한테 말하더군요. 저는 죽어도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어요. 딸은 “엄마가 안 된다 해도 안 들어오면 간 줄 알라”고 했고 저도 “너 가면 다시는 엄마 못 볼 줄 알라”며 서로 싸웠습니다. 이후 딸은 문자로 ‘이번엔 내가 양보할 테니 다음 번에 외박할 때는 무조건 허락해줘’라고 했어요. 그러고 새벽에 자신의 팔을 또 그었습니다. 아침에 저는 아이에게 빌다시피 ‘제발 그러지 말라’고 울면서 부탁했어요.
딸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검사도 받았어요. 우울증에 스트레스가 엄청나다고 하더군요. 상담도 받아보고 싶지만 아이는 한번 받더니 자기는 할말도 없고, 듣고 싶지도 않고, 고칠 생각도 없다고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라는 얘기만 합니다.
딸은 학교 친구들과는 아무 교류가 없어요. 집에 와서는 잠잔다고 하고 불을 끈 방에서 휴대폰만 끼고 있습니다. 아니면 피눈물을 흘리는 나체 그림을 그리고, 공상에 빠진 듯한 어두운 글을 씁니다. 아무리 좋게 얘길 해도 “새벽은 오롯이 나만의 시간이니 참견 말라”고 선을 긋습니다. 딸에게 뭘 하고 싶으냐고 물어보면 “졸업하면 집 나가서 서울 아는 언니하고 같이 살 거야.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먹고 살면 돼”라며 수시모집이 끝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왜 이렇게 집에 오면 우울해하냐고 물어보면 “혼자 있으면 편한데, 집이란 게 꼭 들어와야 하는 강박관념이 있는 게 싫다”고 합니다. 도대체 아이를 어떻게 지도해야 좋을까요. 남편과 저는 요새는 맘을 비우고 웬만하면 맞춰주고 싸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그러면 정말로 엇나갈 것 같이 불안합니다.
최민영(가명ㆍ46ㆍ회사원)
민영씨, 사연을 읽으면서 의사이기 전에 저도 아이를 키웠던 엄마로서 당신이 얼마나 깊이 걱정하고 있을지 마음이 몹시 아팠어요. 자식으로 인한 마음의 고통은 파도가 밀려오듯 좌절과 후회와 애끊는 아픔이 밀려오지요. 하지만 당신의 깊은 걱정만큼 둘째 딸도 너무나 힘들고 괴로울 거예요.
자해는 사춘기의 반항이나 과시적 태도가 아니라 마음이 너무나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럽다는 얘기예요. 당연히 아이가 우울하고, 불안정하지요. 정신의학적으로 판단하면 치료가 시급히 필요한 ‘응급’ 상황입니다.
아이는 지금 ‘내가 누군지’ 혼란스러워 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동그란 사람들과 있으면 동그라미이고, 네모난 사람들과 있으면 네모 같이 스스로를 느껴요. 그러다 혼자 남겨지면 아무런 형태가 느껴지지 않아요. 텅 빈 그릇처럼 마음이 공허해지죠. 이건 주위에 사람이 없어서 외로운 것과는 달라요. 밖에서는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기분이 무척 좋지요. 그래서 그 공허감을 잠시 잊지만 자기 방에 혼자 있으면 자신이 누군지 모르겠고,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워요. ‘나’라는 정체성에 혼란을 느껴요.
다른 예를 들면, 신선한 포도 한 송이가 있어요. 포도송이는 덜 익은 포도알이나 껍질이 벗겨진 포도알도 있죠. 그렇지만 대체적으로 신선하면 사람들은 ‘신선한 포도송이’라고 느껴요. 인간도 그래요. 부족하고, 미숙한 부분들이 있지만 장점과 개성으로 이를 보완하고, ‘그냥 괜찮은 신선한 포도송이’로 살아가죠. 하지만 민영씨의 딸은 자신을 포도송이가 아닌 포도알로 생각해요. 부분이 모여서 전체가 되는데 자신을 전체로 느끼기보다는 부분으로 느껴요. 누구나 자신이 이상적으로 느끼고 받아들이는 자기(self)와 현실에서의 자기가 딱 맞아떨어지진 않아요. 현실의 자신은 미숙하고, 싫은 모습일 때도 있고, 마음에 안 들기도 하고, 한심하거나 초라한 모습일 때도 있기 마련이죠.
민영씨의 딸은 출중한 외모에 예술적 재능도 풍부하고, 매력적일 거예요. 하지만 모델 학원에 다니면서부터 이상적인 자기와 현실의 자기에서 상당한 차이를 느꼈을 거예요. 이상적인 자기의 모습에 근접할 때는 굉장히 만족하지만, 현실의 자신이 만족스럽지 못할 때 그 격차가 너무 크게 느껴지고 견디질 못해요. 존재감이 낮아지고, 매우 공허하고, 우울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상적인 기준을 낮추거나, 이상에 근접하기 위해 노력해서 차이를 줄여요. 하지만 아이는 이런 게 잘 안 됐을 거예요. 왜냐하면 자신의 부분마다 기준이 다르고 기준이 높아서, 그것들이 모여서 하나가 된 자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이런 경우에 상대의 아주 사소한 거절도 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자신뿐 아니라 상대도 ‘하나의 인격체’로 받아들이지 못해요. 상대가 마음에 안 드는 면이 있으면, 상대도 불완전하고, 좋은 면과 의도가 나쁘지 않다는 것을 통합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죠. 상대가 별 의도 없이 거절해도 거절했다는 것에만 분노하고, 상대를 매우 나쁜 사람으로 생각해요. 엄마가 ‘외박하지 마라’고 말하는 것을 아이는 매우 큰 거절로 받아들였을 거예요. 본인이 원하는 사소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거절로 받아들이고 심지어는 버렸다고 생각하니 너무 힘들겠지요. 엄마에게 경고하죠. ‘이번에는 내가 양보할 테니(봐줄 테니), 다음에는 무조건 허락해 줘(거절하지마)’라는 거죠. 자해로 고통을 표현하면서 다음에는 자신의 요구를 절대 거절하지 못하게 차단합니다. 자해 후에 엄마가 울고, 매달리면서 자신에게 집중하는 반응은 딸이 느끼는 정체성의 혼란과 거절에 대한 고통을 일시적으로 상쇄해 줬을 거예요.
아이가 왜 이렇게 힘들어진 걸까요. 예쁘고 재능도 많은 딸은 어렸을 때부터 주목받는 삶에 익숙했을 거예요. 성장과정에서 제대로 된 칭찬을 받는 것도 중요해요. 주위의 주목을 받으면 부모는 아이에게 이를 잘 받아들이는 법을 알려줘야 해요. ‘딸아, 예쁜 건 너의 큰 장점이야. 너무 고마운 일이지만 엄마는 평소에 네가 뭐든 열심히 하는 태도가 더 예쁘고, 다른 사람에게 따뜻하게 대하는 네 마음이 더 아름답다고 느낀다’는 식의 얘기도 함께 해줘야 해요.
청소년이 되면 예쁜 친구도 좋지만, 다양한 특징을 가진 친구들을 사귀고, 친분이 쌓이고, 그런 과정에서 서로 맞춰가요. 하지만 딸은 평범하게 또래와 어울리기보다 런웨이에서 주목받는 모델의 길로 들어섰어요. 어른들의 세계에 너무 일찍 발을 들여놨죠. 그래서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이 늘 충족되지 못했죠. 부모가 ‘모델이 되고 싶다면 경험해 보는 건 좋아. 하지만 네 나이에 학교에서 친구들과 급식도 같이 먹고 지루한 공부도 해가는 과정도 중요하니 학교 생활과 모델 활동에 균형 잡는 것도 생각해봐. 네가 비교적 어리니, 모델 일을 하다 행여나 상처받거나, 힘든 일이 있을 수도 있어’라고 말해 주는 게 좋아요.
그저 잘한다고, 하고 싶다고 무조건 허락해 주고 먼 거리를 데려다 주는 것이 청소년기 자녀를 위한 건 아닙니다. 잔소리를 하고 통금시간을 정하고 휴대폰 사용시간을 정하는 것도 부모의 역할이지요. 어떤 부모가 자녀가 지나치게 휴대폰을 끼고 있는데 그냥 두며, 외박을 아무렇지도 않게 허락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에게 인생의 중요한 것을 의논하고, 이를 통해 가치관을 잘 형성하게 도와주고, 힘든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극복할 힘을 길러주는 것이 더 중요해요.
민영씨의 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고통의 깊이는 깊은데 사사건건 따지고, 허락 여부로 밀고 당기고, 걱정하면서 울고 매달리는 엄마에게 변명하고, 우기고, 협박하느라 내면의 고통에는 접근도 못하고, 에너지를 다 소모합니다. 그러면서 ‘엄마는 나를 절대 이해 못해’라고 생각하고, 이를 거절로 느끼고, 관계를 단절하고 싶어하고, 뒤따라오는 우울과 공허함에 몸서리를 치는 게 아닐까요?
자해를 하면 대뇌신경전달물질의 영향으로 자해하는 그 순간 진정되고 해소되는 느낌이 들어요. 이 때문에 극도로 불안하고 괴로운 아이들은 아플 걸 알면서도 자해를 반복적으로 하기도 해요. 이렇게 극단적인 방법으로 부모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굉장한 주목과 관심을 끌어내기도 하고요.
민영씨, 딸은 아주 세심하고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해요. 내면의 불안정함을 줄이고 자신의 여러 가지 모습을 통해 자신을 하나의 인격체로 느끼게 해주는 전문가의 치료 말이에요. 당신이 노력해야 할 것도 있어요. 지금 딸에게는 외박하고 안 하고, 서울에 가고 안 가고 이런 문제는 중요하지 않아요. 자해하는 아이에게 ‘이번에는 안 갈 거지?’, ‘하루만 자고 올 거니?’ 이런 말다툼은 무의미해요. 외박하겠다고 하면 ‘기본적으로 엄마는 네가 안 갔으면 좋겠지만, 굳이 가겠다면 네가 사리분별을 할 것이라고 믿어. 다만 네가 성인이 아니니 부모로서 너를 사랑해서 하는 얘기야. 다녀오되 가서 조심하고, 연락도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해 신뢰와 사랑을 보여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릴 거예요 그러나 이런 과정을 통해서 딸은 혼란스러운 세상, 귀찮은 책임, 불안한 미래, 불안정한 ‘나’ 로부터 오는 마음의 고통을 조금씩 회복할 수 있을 거예요.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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