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모디 총리 집권 후 위협 급증… 폭력사태, 불안감에 역탈출 현상도
인도 델리시 남부 외곽의 오클라에는 ‘마단푸르 카다르(이하 마단푸르)’라는 구역이 있다. 2000년 인도 당국이 도심 슬럼가 주민들을 외곽으로 강제 이주시킬 때 형성된 슬럼 구역이다. 이 마단푸르에 로힝야 난민 캠프 두 곳이 자리잡고 있다. 델리 전역에는 4개의 캠프에 약 800명의 난민이 수용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 전역의 로힝야 난민 규모는 유엔 등록 1만8,000명을 포함, 통상 4만명가량으로 거론된다. 그러나 정확한 수치를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다. 인도의 로힝야 난민 단체인 ‘로힝야 인권 이니셔티브(ROHRINGYA)’는 5,000~6,000명이 2012년 라카인주 폭력 사태를 피해 온 경우라고 했다.
“(얼마 전까지는) 평화롭게 살았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묻는 사람도 없고, 물가도 비싸지 않았고….” 델리의 한 로힝야 캠프에 거주하는 하심(가명ㆍ46)의 말이다. 그는 1990년대 초반 미얀마 군 10여명이 집으로 들이닥쳐 쑥대밭을 만들자 곧바로 탈출했다. 90년대는 미얀마 군부의 로힝야 토지 수탈이 극심했던 시기다. 땅을 빼앗긴 로힝야들은 불교도 정착촌과 군 부대 건설현장의 강제 노역에도 동원됐다. 폭력과 강간 등 심각한 인권침해가 만연하면서, 이른바 제2차 엑소더스(1차 엑소더스는 1978년)로 20만명 이상이 방글라데시로 몸을 피했다. 그 탈출 행렬에 동참했던 하심은 어쩌다 인도까지 왔고 벌써 25년을 넘겼다. 그는 인도 로힝야 난민사의 산증인이다. “모든 게 달라졌다. 이제 (인도)정부가 우리를 추방하려 갖은 압력을 넣고 있다. 경찰도 날마다 들락거리고, 언제 또 방화가 일어날지 몰라 하루하루가 너무 두렵다.” 하심은 이렇게 말하며 ‘두렵다’는 말을 유독 강조했다. ‘언제부터 그런가’라고 묻자 “4~5년 전부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4~5년 전부터’라면 2014년 5월 총선으로 권좌에 오른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의 집권기와 무관치 않다는 뜻이다. 힌두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모디의 인도국민당(BJP) 정권하에서 무슬림과 이주민에 대한 증오와 폭력은 급증했다. “로힝야와 방글라데시인들, 인도를 안 떠나면 죄다 총을 쏴 죽여버려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발언이 인도 아삼주(州)의 BJP 정치인 라자 싱의 입에서 나왔을 정도다. 그런가 하면, 북부 잠무 지역에선 2016년 이래 로힝야 추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빈번해졌다. 급기야 현재 진행 중인 총선을 앞두고 지난 8일 발표된 BJP 선거공약집에도 ‘이민자 축출’ 공약이 담겼다. 집권여당 정치인들의 노골적 혐오 발언과 행보가 로힝야를 겨냥한 폭력의 뒷심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다. 지난 2년여간 인도 전역에서 최소 세 차례 발생한 로힝야 캠프 방화사건은 그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경우다.
지난해 4월 15일 새벽 3시쯤, 델리 마단푸르의 칼린디 쿤즈 캠프는 누군가가 저지른 불로 잿더미가 됐다. 북부 잠무 지역 방화(2017년 4월)에 이어, 두 번째 로힝야 캠프 방화 사건이었다. 약 230명을 보듬던 판잣집 50여곳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당시 재빠르게 달려온 소방인력 덕에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난민들 마음엔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공포감이 자리잡았다. ‘언제 누가 또 방화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1년이 흘러 이번에 기자가 찾은 방화 현장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잡초가 무성했고, 이따금씩 소떼가 드나들었다.
그런데 이 방화 사건 후, 트위터에 자신의 소행임을 자랑스럽게 밝힌 이가 있었다. BJYU(BJP의 청년 조직) 간부로 추정되는 ‘마니시 찬델라(Manish Chandela)’라는 계정의 인물이었다. 그는 “영웅적 거사를 잘 치렀다”, “방화를 더 하겠다” 등의 문구를 스스럼없이 적었다. 인도의 인권변호사인 프라샨트 뷰샨은 이 정황을 상세히 기술, 마니시에 대한 경찰 수사를 촉구하는 ‘FIR(First information reportㆍ사건의 초기 사실을 정리한 신고서)’을 냈다. 하지만 1년이 지났음에도 진척은 없다. 그사이 세 번째 방화도 일어났다. 작년 5월 27일 델리 북쪽에 인접해 있는 하리아나주 난민 캠프에서였다.
지난 13일 하리아나주로 향했다. 하리아나는 ‘달리트(인도 사회의 최하 계층인 불가촉천민)’를 겨냥한 집단강간, 살해 등의 폭력이 자주 발생하는 지역이다. 이곳에도 로힝야 캠프가 5, 6곳 정도 있다. 기자와 동행한 로힝야 인권운동가 사버 초민은 달리는 차량 안에서 미얀마 라카인주에 사는 부친과 통화를 계속 했다. 휴대폰 너머로 “3일 전 미얀마군 100명이 마을로 들이닥쳤다”는 말이 들렸다. 사버의 아버지는 “군인들이 집 밖으로 나오면 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고도 말했다.
요즘 라카인주에선 불교계 소수민족인 라카인족 반군 ‘아라칸군(AA)’과 미얀마 정부군 간 내전이 격화하고 있다. 그 틈새에서 라카인 시민들은 물론, 로힝야들이 거의 매일 다치거나 죽어나간다. 예컨대 사버의 외가 쪽 당숙은 지난 3일 부티동 타운십 사잉딘 폭포 근처에서 군의 공습으로 목숨을 잃었다. 당시 최소 20명의 로힝야가 숨지고 5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모두 ‘대나무 베는 노동’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ROHRINGYA 의장 자파르울라는 “로힝야들이 대나무를 베려고 산에 들어갈 땐 월 단위로 간다. 장시간인 만큼 식량까지 다 싸 들고 들어간다”고 그 맥락을 먼저 설명한 뒤, 다음과 같이 이 사건을 규정했다. “그러니까 반드시 군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군은 그날 로힝야들이 그 지역에서 대나무 베는 일을 한다는 걸 잘 알고도 공격한 것이다.” 사건 이틀 후, 미얀마군은 성명을 내고 “사망한 로힝야들은 AA 테러리스트와 공조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공습 당시 AA는 현장에 있지도 않았다.
인도 정부는 바로 이러한 내전, 학살, 거짓 프로파간다(선전)가 멈추지 않는 땅으로 로힝야들을 돌려보내려 하고 있다. 인도가 “불법 이민자 로힝야들을 강제추방하겠다”고 공식 발표한 건 2017년 8월이다. 실제 추방은 지난해 10월 4일 시작됐다. 프라샨트 뷰산 변호사가 “로힝야 강제 추방을 막아달라”며 낸 집행정치 신청을 그날 인도 대법원이 기각하자마자 곧바로 추방에 나선 것이다. 즉, 대법원도 로힝야 추방의 길을 ‘합법적으로’ 터준 셈이다. 올해 1월 3일과 3월 28일, 강제 추방은 최소 두 차례 더 있었다. 이런 조치는 국경 단속 강화와도 맞물려 취해지고 있다. 국경을 넘기가 무섭게, 혹은 넘어가려다 체포되는 사례도 최근 수년간 잇따랐다.
방글라데시 접경 지역인 인도 동북부 트리푸라주 감옥에 2년 4개월째 수감 중인 로힝야 여성 수나와르(19)가 그런 경우다. 그는 2016년 10월 로힝야 반군(ARSA)의 경찰 초소 공격 직후, 학살 사태가 벌어지자 라카인주를 탈출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인도로 국경을 넘다 체포됐다. 이 사정을 잘 아는 한 로힝야(익명 요구)는 수나와르가 만기출소 시점을 지났는데도 석방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현재 인도 전역의 구금 시설엔 130명가량의 로힝야들이 갇혀 있는데, 전례로 볼 때 이들이 강제 추방 1순위 대상자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한편, 차량을 타고 3시간쯤 걸려 도달한 하리아나 난민캠프는 수백명의 로힝야 난민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버팔로를 잡고, 음식을 나누며, 코란 암송 대회 시상식을 치르는 모습이 보였다. 고단하고 두려운 일상을 잠시나마 접어둔 난민 공동체의 시간이 분명했다. 엄청난 양의 음식을 준비 중인 부엌 옆방에선 등이 굽은 노인 한 명이 눈길을 끌었다. 기자를 덥석 반겨준 그는 “나는 91세 누르 아차”라고 했다. “라카인주 부티동 타운십에서 왔다”고 또렷한 발음으로 말하기도 했다. 미얀마에서 모든 가족을 잃었다는 그 노인은 그러나 언제 인도로 왔는지, 누구와 함께 왔는지는 잘 기억해 내지 못했다.
이유경 국제분쟁전문 저널리스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