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에선 할머니가 곧잘 등장하지만 대개 비슷한 모습이었다. 시골 장터나 지하철역 구석에서 손수 키운 푸성귀를 내다놓고 파는 할머니, 농사지은 온갖 곡식이며 먹을거리를 도시 사는 자녀와 손주에게 철마다 한가득 보내는 할머니, 시골집에 혼자 남아 집 떠난 자식을 늘 그리워하고 기다리고 걱정하는 할머니……. 멀리 떨어져 계신 할머니-할아버지도 아닌, 할아버지여서는 안 될-의 깊고 그리운 정이 동시에서는 너무 많아서, 너무 뻔했다. 너무 뻔해서, 가짜 같았다. 왜 동시의 눈에는 ‘나물 파는 할머니’밖에 안 보일까. 아무리 따뜻한 시선이라 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르신이라 안 하고/나한테만 ‘선생님’이래.”//주민센터 청년이/깍듯이 불러 주더라며//온종일 기분 좋다고/싱글거리는 할머니.//“커피 고르는 나더러/‘세련 되셨네’ 하더군.”//슈퍼마켓 아가씨가/마냥 치켜세우길래//“아니지, ‘취향’일 뿐이라오!”/쏘아 줬다는 할아버지.”(‘눈높이 2’) ‘선생님’은 이제 누구에게나 붙이는 평범한 존칭어지만 노인은 그보다 더한 존칭어도 아닌 ‘어르신’으로 불리며 ‘선생님’ 밖에 서 있다. ‘어르신’으로 괄호 쳐진다. 할아버지는 커피에 대한 기호도 취향도 없나? 잠시만 따져 봐도 노인 비하가 분명하다.

동시조 ‘어느 갯골목’의 ‘늙은 할매’는 ‘나물 파는 할머니’처럼 피상적으로 관찰된 대상이 아니다. ‘어르신’이라는 호칭으로 규정되며, 개개인이 무시되는 특정 ‘집단’이 아니다. 갑자기 사라진 ‘늙은 할매’의 근황이 걱정되고 궁금하고 안타까운 건 바로 그 할머니, 그 한 인간이 시에 담겼기 때문이다.

왜 다른 사람에게 하듯 ‘선생님’이라 부르지 않느냐, ‘어르신’은 커피 취향도 없는 줄 아느냐는 목소리가 ‘늙은 할매’를 발견했다. 노인을 집단으로 뭉뚱그리지 않고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불렀다. 노인도 어린이도 세상 모든 약자와 소수자도 집단이 아닌 개인의 이름으로 불려야 한다. 여태 노인을 ‘나물 파는 할머니’로 뭉뚱그렸으니 어린이한테도 그래오지 않았을까 의심하고 또 의심해본다.

박경용 시인은 이미 1970년대에 ‘동시도 시’라는 시론을 누구보다 정밀하게 정립했다. 동시라 해서 무조건 어린이 독자에 맞추려 하지 말고 시인의 언어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극히 당연하고 이제는 누구나 동의하는 생각이지만 요즘 동시가 정말 그렇게 창작되는지 의문이다. 박경용 시인은 ‘동시도 시’라는 여전한 지향으로 ‘늙은 할매’를 발견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김유진 어린이문학평론가ㆍ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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