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기업 2.0] “젊은 작가의 그림 10개월 무이자 할부로 사세요”

이전기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저장이 취소 되었습니다.

[사회적기업 2.0] “젊은 작가의 그림 10개월 무이자 할부로 사세요”

입력
2019.04.29 04:40
0 0

 정지연 ‘에이컴퍼니’ 대표 

정지연 에이컴퍼니 대표가 23일 서울 종로구 이화동 ‘미나리하우스’에서 전시된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미나리하우스는 에이컴퍼니가 운영하는 갤러리 카페다. 이한호 기자

한국미술시장정보시스템에 따르면 국내 미술시장의 연간 작품 거래액은 2010년부터 4,500억원대에 머물고 있다. 10년째 5,000억원 문턱을 못 넘고 제자리다. 미술가들 사이에서 “신라면 하나(2018년 매출 7,200억원)보다 못하다”는 자조 섞인 농담이 나온다. 그나마도 대형 갤러리와 유명 작가에 기형적으로 편중된 ‘기울어진 운동장’이라 신진 작가들이 시장에 진출해 자신의 작품을 판매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깝다.

‘에이컴퍼니’는 신진 작가를 발굴하고 그들의 작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대중에게 판매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컴퓨터공학도 출신 정지연 대표는 10여년 전 한 컨설팅 회사에서 미술 시장 조사 업무를 하던 중 촉망 받는 신진 작가 작업실 문에 전기ㆍ수도요금 독촉장이 덕지덕지 붙은 걸 보고 충격을 받아 2011년 에이컴퍼니를 창업했다. 지난 23일 서울 종로구 이화동의 그림 가게 ‘미나리하우스’에서 정 대표를 만났다.

 ◇그림을 처음 사는 사람들 

미나리하우스는 갤러리와 카페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벽에는 신진 작가들의 그림이 걸려있고 손님들은 가볍게 커피, 맥주를 마시며 그림을 감상하거나 사갈 수 있다. 물론 입장료는 없다. 에이컴퍼니는 2013년부터 6년째 미나리하우스를 운영 중이다.

에이컴퍼니에는 아트(art), 아티스트(artist) 등 예술과 관련된 단어가 ‘a’로 시작한다는 의미를 담았고, 미나리하우스의 이름에는 물을 정화하는 능력이 탁월한 미나리처럼 예술이 우리 사회를 정화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국내 미술시장에서는 대다수 갤러리와 작가가 구두계약을 한다. 그림 가격도 고무줄이다. 같은 그림이 이쪽 전시회에서는 100만원, 저쪽 전시회에서는 200만원에 팔리는 일도 많다. 현금이 주로 오가 기록도 남지 않고, 그림은 부유층의 비자금 조성 통로라는 부정적 이미지까지 덧씌워졌다. 정 대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신진 작가들이 생존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자는 마음에서 에이컴퍼니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2016년 9월 서울 용산구 블루스퀘어 네모에서 열렸던 브리즈 아트페어의 모습. 에이컴퍼니 제공
2018년 4월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브리즈 아트페어에서 관람객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에이컴퍼니 제공

그는 2012년부터 공개 모집을 통해 선발한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모아 전시하는 ‘브리즈 아트페어’를 개최하고 있다. 브리즈 아트페어의 가장 큰 원칙은 투명한 가격이다. 그림 옆에 가격이 명시돼 있다.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전시회에서는 드문 일이라고 한다.

정 대표는 직장인들이 퇴근 후 전시회장을 찾을 수 있도록 관람 시간을 오후 10시까지로 연장했고, 미술계에서는 파격적인 10개월 무이자 카드 할부 서비스를 제공했다. 정 대표는 “30만원짜리 작품을 한 번에 사는 건 부담스럽다. 그러나 한 달에 3만원 정도 투자해 작품을 사고 싶은 사람은 분명 있다.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태어나 처음 그림을 샀다는 사람이 많을 때 보람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나흘 동안의 전시회 내내 작가들이 직접 나와 고객들에게 작품을 설명하며 교감한 것도 큰 호응을 얻었다. 그림이 팔리면 수입의 60%는 작가가, 40%는 에이컴퍼니가 갖는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고객은 몇 년 전 25만원을 주고 그림을 사 간 초등학교 2학년생이다. 부모 손을 잡고 가벼운 마음으로 전시회를 방문했던 그 학생은 꼭 갖고 싶은 그림이 생겼다며 부모를 졸랐다. 결국 “그럼 지금까지 모은 새뱃돈으로 그림을 사라”는 부모의 허락에 그림을 사갔다. 그 학생은 이듬해 전시회에도 또 와서 같은 작가의 그림을 직접 샀다. 정 대표는 “그림을 방에 걸어두고 계속 보면서 마치 반려견과 친해지듯 자연스럽게 작품, 작가에 애정이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정 대표는 가급적 정부기관 등의 지원 없이 회사 자금만으로 브리즈 아트페어를 연다. 불필요한 간섭이나 규제가 싫어서다. 그러다 보니 자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아 전시관 대여하는 것 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전시회를 한 해 건너뛴 적도 있고 상황에 따라 한 해는 봄, 이듬해에는 가을에 열기도 한다. 그래도 다섯 차례 열리는 동안 입소문이 나면서 작년 전시회 때는 신진 작가들이 몰려 4.8대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올해는 6회째 브리즈 아트페어를 연말에 열 계획이다.

 ◇돈보다 원칙 

“800만원 짜리 그림을 사고 싶습니다.”

정 대표는 2년 전쯤 한 고객의 전화를 받았다. 800만원이면 브리즈 아트페어에서는 최고가에 속하는 작품이다. 대신 그 고객은 “15%만 깎아 달라”고 요청했다. 대부분의 갤러리가 VIP 고객을 상대하거나 고가의 작품을 팔 때 이 정도 할인해주는 게 관례라 그리 무리한 요청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 대표는 고심 끝에 “그림을 판다는 면에서는 다른 갤러리와 같지만 사회적 기업으로 지켜가는 원칙이 있다. 원칙을 어겨가며 팔지는 못할 것 같다“고 거절했다. 작가가 오히려 “할인해도 좋으니 팔자”고 졸랐지만 정 대표는 그 작가도 설득했다. 고객은 뜻밖에도 불쾌해 하기는커녕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에이컴퍼니의 원칙을 존중하고 지지 하겠다”며 정가에 그림을 구매해갔다. 정 대표는 “그 일을 경험한 뒤 우리가 가는 길이 옳다는 확신과 용기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미나리하우스 간판 옆에 선 정지연 대표. 이한호 기자

그는 처음 에이컴퍼니를 창업할 때 ‘아무리 힘들어도 최소 10년은 버텨보자’고 각오했다고 한다. 에이컴퍼니가 발굴한 작가가 오랫동안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의무감이었다. 그러나 요즘 꿈이 더 커졌다. 정 대표는 “프랑스 파리나 일본 교토에 가면 100년 넘은 서점, 오래된 가게들이 있고 그 안에 엄청난 스토리들이 담겨 있다. 앞으로 50년, 100년 후에 사람들이 미나리하우스를 보며 우리가 배출한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걸 상상한다”고 미소지었다.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저장이 취소 되었습니다.

한국일보가 직접 편집한 뉴스 네이버엣도 보실 수 있습니다. 뉴스스탠드에서 구독하기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