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행의 동기가 불분명하고 범죄자가 피해자를 무차별적으로 골라 불특정 개인 혹은 다수가 피해를 보았을 때, 그런 범죄를 ‘묻지마 범죄’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단어의 조어법은 어쩐지 이상하게 느껴진다. 우선 ‘묻지 마’가 문장이기도 하거니와, 이 문장의 화자가 누구인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묻지 말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오히려 범죄자는 적극적으로 이유를 말하고 싶어 한다. 사회의 윤리적 기준에서 납득이 되지 않을 뿐, 이유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 ‘묻지마’는 범죄자에게 범죄의 이유를 묻지 말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관련한 언론의 보도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피해자가 누구이고 왜 죽었는지 그 이유를 찾으려 애쓰지 말라는, 그 이유를 묻지 말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살해의 이유가 아닌 죽음의 이유를 알게 되면 질문이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잘못도 없는 사람들이 갑자기 살해당한 이유에 대한 질문, 죽음에 관련된 사람들과 조직, 사회의 시스템에 대한 질문 말이다.
지난 17일 새벽 진주의 한 아파트에서 방화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방화 후 칼을 휘두른 한 40대 남성으로 인해 총 18명이 숨지거나 다친 이 사건에서, 살해당한 5명 중 4명은 12살 어린이를 포함한 여성이었고 1명은 남자 노인이었다. 여성과 노인, 어린이가 살해된 것이다. 아파트 거주자가 자신의 이웃을 범죄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범죄 대상이 특정되며, 명백히 약자들이 희생되었음에도 언론들은 관성적으로 이 사건에 ‘묻지마 칼부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사건을 ‘묻지마’ 범죄로 부르면 어떤 것이 지워지는가? 범죄자에 대해 지속적인 주민들의 신고가 있었지만 개선되지 않은 점, 범죄자가 특정 가구의 여성들을 계속적으로 위협한 점, 성인 남성에게는 칼을 휘두르지 않은 점이 지워진다. 이 모든 것을 지워 범죄자 개인의 정신병력만 문제 삼으면 그저 세상이 흉흉한 것이고 피해자들은 운이 없었던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어차피 사회가 책임질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악한 개인이 저지른 불행한 사건일 뿐이니, 구체적인 이유와 원인, 이전에 벌어진 범죄의 징조에 대해서는 묻지 말라고 한 뒤, 범죄를 유발한 여성을 포함한 약자에 대한 혐오, 이에 대한 사회의 책임을 따져 물을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다. 왜 죽였는지에 대해만 초점을 맞추고, 왜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말라고 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2016년의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을 경험한 후, 여성들은 여성과 약자를 대상으로 한 범죄에 언론이 ‘묻지마’라는 이름을 붙일 때마다 다른 방식으로 호명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이는 이후 묻지말라며 묻어버린 더 많은 범죄로 인해 이제는 꼭 필요한 일이 됐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여성혐오 살인사건으로 정확히 호명하고, 부산의 커피숍에서 흉기를 휘두른 남성이 20대 여성을 선택해서 공격했음을 분명히 하고, 지난달 진주에서 50대 남성이 특별한 이유 없이 폐지를 줍는 여성 노인을 폭행했다고 정확히 말한다면, 이 모든 사건의 공통점이 보이기 때문이다. 남성 범죄자의 여성을 대표로 하는 약자 집단을 향한 공격이라는 공통점이다. ‘이유 없이’, ‘무작정’ 선택한 피해 대상이 모두 여성이거나 노약자였다는 점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묻지마’ 범죄라고 이름 붙이는 것은 무책임한 일일 뿐 아니라, 이어질 수도 있는 비슷한 범죄가 예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한다는 점에서 위험한 일이기까지 하다. 언론은 범죄가 벌어졌을 때 ‘묻지마’라는 단어를 앞세우지 않는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한다. 범죄에 숨겨진 진실을, 혐오를, 막을 수 있었던 가능성을 지우지 않고 물어보는 것, 질문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언론이, 경찰이, 권력이 ‘묻지마’라고 말한다면, 바로 그때가 질문할 때다.
윤이나 프리랜서 마감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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