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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마음풍경] 고통을 마주하는 인간의 위대함

입력
2019.04.11 04:4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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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내가 매년 빈센트 반 고흐의 삶의 흔적을 따라 여행을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한 지인은 이렇게 면박을 주었다. “고흐처럼 죽어서 유명해지면 뭐해? 살아서 잘 먹고 잘 살아야지!” 나는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때는 빈센트를 향한 내 열정이 폄하당하는 것, 고흐의 삶이 그런 세속적인 관점으로 재단되는 것이 싫어 그와의 대화를 포기했다. 그는 ‘고흐를 사랑하는 나’와 ‘고흐의 인생’을 한꺼번에 싸잡아 비난했고, 나는 분노 때문에 침묵을 선택했으며,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았다. 지금 다시 그를 만날 수 있다면 그때처럼 발끈하지 않고 차근차근 이야기하고 싶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큰돈을 벌지 못해도, 고흐처럼 동생에게 물감값을 보내달라며 애끓는 편지를 쓰는 한이 있어도, 참혹한 고통 속에서 죽는 날까지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이상을 향해 전진하는 것이 인간의 위대함이라고.

고흐의 작품은 단지 한 인간의 탁월함을 보여주는 사례에 그치지 않는다. 고흐의 작품은 극한의 고통 속에서 ‘생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이 삶을 지탱하는 데 있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심리학적 증거다. 그는 살아 있을 때 돈이나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삶의 의미’를 예술에서 찾았다. 아무리 보상이 적어도 ‘의미’가 있다면 인간은 견뎌낼 수 있다. 나는 인간의 무의식 속에 ‘아직 실현되지 않은 무한한 잠재력’이 있다고 본다. 때로는 가혹한 환경 때문에, 때로는 자기 안의 콤플렉스 때문에 실현되지 못한 그 잠재력 중에는, 스스로의 치명적인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힘도 있고, 누구도 해내지 못한 어려운 과업을 완수하는 재능도 있으며, 생존과 실용을 뛰어넘어 예술과 학문 그 자체를 추구할 에너지도 포함되어 있다. 나는 인간을 위대한 존재로 만들기 위한 마음의 프로그램, 그것이 심리학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상처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며, 상처를 핑계대며, 진정한 성숙과 책임감 있는 삶을 거부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더 깊이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을 탐구해야 한다.

현대인은 점점 위대하고 고결한 가치가 짓밟힐 위험에 처한 사회에 살고 있다. 미디어에서는 수백억 원에서 수십 조 원 단위로 위자료를 주고받는 유명인사들의 이혼 기사가 뜨고, 연예인들의 자녀를 TV에 출연시켜 대를 이어 스타로 만들어주는 예능프로그램들이 범람한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유명해지기’와 ‘부자되기’이야말로 지상최고의 가치가 되는 상황을 목격한다. 이것은 인간의 위대성이나 잠재력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위대성과 잠재력을 매스미디어와 자본의 힘으로 질식하게 만들어 ‘미디어 친화적 인간’으로 획일화시키는 것이다. 유관순의 삶을 그린 영화 ‘항거’에서 나는 모든 희망이 닫힌 세상에서도 인간은 결코 굴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내게 한 번뿐인 목숨을 내가 원하는 곳에 쓰고 죽는 것. 이런 절실함이 인간의 위대함이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고문을 겪고 부모의 참혹한 죽음을 어린 나이에 목격한 유관순의 위대한 한 걸음. 그것은 ‘세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과의 완벽한 거리감, 나에게 소중한 것을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추구해가는 인간의 절절한 의지였다.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비참한 생활을 견뎌내고 위대한 학자가 된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의미를 향한 소리없는 절규’에서 ‘실제로 보이는 자신의 모습보다 더 높은 가치’를 찾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강제수용소의 끔찍한 인권유린 속에서도 ‘내 안의 위대한 또다른 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소중하고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 사이에는 얼마나 커다란 차이가 있겠는가. 그 어떤 무시무시한 장애물도, 지금보다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인생을 걸고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인간의 의지를 가로막을 수는 없다. 나는 살아 있는 한 우리 안의 숨겨진 위대함을 찾기 위한 글쓰기의 여정을 계속할 것이다. 나는 ‘나보다 더 높은 것’을 향해 끊임없이 전진하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믿는다.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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