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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 요절한 ‘생태학 선구자’ 안승준, 공동체 복원 꿈꾸다

입력
2019.04.01 04:40
수정
2019.04.01 09:18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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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안승준의 ‘국가에서 공동체로’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는 지난 한 세기 우리나라 대표 지성과 사상을 통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한국일보> 연재입니다. 매주 월요일 찾아옵니다.

우리나라 생태 학문의 선구자였던 안승준은 스물다섯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남아 있는 사진이 많지 않다. 사진은 1992년 출간한 안승준의 에세이집 ‘살아는 있는 것이오’의 표지에 실린 것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우리나라 생태 학문의 선구자였던 안승준은 스물다섯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남아 있는 사진이 많지 않다. 사진은 1992년 출간한 안승준의 에세이집 ‘살아는 있는 것이오’의 표지에 실린 것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 기획에서 다루는 인물들 가운데 오늘 주목하는 이는 가장 덜 알려진 사람일 것이다. 자신의 학문 세계를 제대로 펼쳐 보이지 못한 채 스물다섯의 나이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의 전공을 어떻게 봐야 할까. 철학을 거쳐 사회생태학과 인류학을 공부했으니 생태학 연구자라 하는 게 좋을 것으로 보인다. 안승준이 바로 그 청년이다.

안승준을 다루는 까닭은 두 가지다. 첫째, 우리 현대 지성사에서 그는 생태학적 계몽의 선구자라 부를 만하다. 그는 생태학적 문제의식을 공동체성의 회복으로 심화시킴으로써 현대성의 그늘을 극복하려 했다. 둘째, 그의 삶이 안겨주는 감동이다. 그가 남긴 청춘의 기록은 마음 시리다. 동시에 그의 고뇌와 성찰은 우리 사회가 선 자리와 갈 길을 돌아보게 한다.

캄캄한 밤하늘을 바라보면 거기엔 무수한 별들이 빛난다. 안승준이란 별이 크게 빛난다고 보긴 어렵다. 그러나 밤하늘이 아름다운 것은 큰 별들 때문만이 아니다. 비록 작은 별들이라 하더라도 밤하늘을 빛내고 있고, 그들이 뿜어대는 은은한 별빛들은 밤하늘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 우리 현대 지성사에서 안승준은 그런 작지만 소중한 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살아는 있는 것이오’ 

안승준은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중학교를 다니다가 아버지 근무지를 따라 일본 도쿄로 전학해 그곳에서 공부했다. 고등학교 때는 미국으로 건너가 학업을 이어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 입학해 철학을 공부하다가 뉴욕에 있는 뉴스쿨포소셜리서치 학·석사 통합과정에 편입해서 생태학과 인류학을 전공으로 삼았다. 1991년 학사학위를 받은 그는 버몬트주 더머스톤에서 불의의 추락 사고로 안타깝게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나의 이름은 SNG-JUNE이라고 읽습니다. 당신이 6월을 노래하고 싶다고(to SING the month of JUNE) 생각하시면 내 이름이 됩니다. (...) 나는 인류학과 사회생태학을 함께 공부하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누구든지 ‘공동체’나 ‘환경문제’에 관심이 있는 분이 있으면 나에게 오십시오. (...) 혹시 나무판화에 관심이 있는 분은 들러주십시오. 나는 요리와 좋은 음식 먹기를 좋아하는 사람임을 잊지 마십시오. (...) 당신이 뉴욕에서 보내는 이번 여름이 즐겁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안승준이 뉴스쿨포소셜리서치에서 공부하고 있었을 때 기숙사에 새로 들어온 학생들에게 자기 소개를 하기 위해 작성한 글의 일부다. 그는 발랄하면서 진지한 학생이었다. 1986년에서 1987년까지는 잠시 귀국해 연세대에서 동양철학과 국문학을 공부하면서 서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열었던 민족학교를 수료하기도 했다. 그는 세계시민을 지향하면서도 두고 온 조국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

우리나라 생태 학문의 선구자였던 안승준이 남긴 에세이집 ‘살아는 있는 것이오’의 표지. 한국일보 자료사진
우리나라 생태 학문의 선구자였던 안승준이 남긴 에세이집 ‘살아는 있는 것이오’의 표지. 한국일보 자료사진

안승준은 세 권의 책을 남겼다. 학사학위논문인 ‘국가에서 공동체로(From State to Communityㆍ1994)’, 시·에세이·편지 등을 묶은 ‘살아는 있는 것이오’(1992), 그리고 번역한 후카시로 준로의 ‘후카시로 준로의 청춘일기’(1994)가 그것이다.

‘살아는 있는 것이오’는 안승준의 아버지인 안창식과 어머니인 고순자가 엮은 것이다. 아버지가 서문을, 어머니가 발문을 썼다. 부제인 ‘가슴 뜨겁게 살다간 한 젊은이의 초상’처럼 열정과 고뇌의 청춘이 들려주는 생생한 목소리가 담겨 있다. 동생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은 우리 사회의 미래에 대한 그의 생각을 엿보게 한다.

“‘현대화된’ 한국사회를 바라보며 ‘발전’이란 개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 요새는 점점 보수자본주의의 사상과 마르크스주의의 바탕에 깔려 있는 공통된 가치, 공통된 세계관에 눈이 뜨인다. 역사발전주의, 경제주의 등등. 대체될 수 있는 세계관, 삶의 모습이 그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홍대 앞 네거리에서 모두가 흥에 겨워 장구소리에 맞추어 춤을 출 수 있는 문화가 생활 속에 들어올 수 있다면, 건전한 삶의 모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안승준이 꿈꿨던 것은 격렬한 산업화 과정에서 잃어버렸던 공동체성의 현대적 복원이었다. 그는 이 가능성을 사회생태학적 구상과 실천에서 찾았다. 그의 저작 ‘국가에서 공동체로’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룬다.

 ◇‘국가에서 공동체로’ 

안승준의 학사학위 논문인 ‘국가에서 공동체로’는 1994년 책으로 출간됐다. 안승준은 한국의 근대화가 생태 위기를 불러왔다고 비판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안승준의 학사학위 논문인 ‘국가에서 공동체로’는 1994년 책으로 출간됐다. 안승준은 한국의 근대화가 생태 위기를 불러왔다고 비판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국가에서 공동체로’는 영어로 출간됐다. 그의 오랜 벗 장하석과 사회생태연구소의 에릭 제이콥슨에 의해 편집됐다. ‘한국의 근대화에 대한 비판과 대안’이 그 부제다. 아버지인 안창식에 의해 우리말로 옮겨졌다.

안승준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뭘까. 안승준은 한국의 성공적인 근대화가 고도로 중앙 집중화된 국가가 강력한 통제를 행사함으로써 달성된 것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이 산업화는 가시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세계시장에의 의존 심화, 경제적 집중과 소득 불평등, 농민계층의 희생 등과 같은 구조적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고 그는 비판한다.

안승준은 이런 구조적 문제들 가운데 특히 생태 위기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한국 산업화의 역사는 국가에의 예속과 자율적 공동체 붕괴의 역사였고, 특히 식민지 시대의 근대 국가 형성이 생태 파괴와 위기를 가져왔다고 진단한다. 식민지 국가는 자치적인 마을공동체를 무력화하는 동시에 파괴했고, 이러한 과정은 1960년대 이후 급속한 산업화와 함께 가속화됐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그렇다면 이런 일방적 자연 지배와 중앙집권적 국가관료제를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은 어떻게 가능할까. 이에 대한 해법으로 안승준이 주목하는 것은 생태사상가 머레이 북친의 사회생태학적 구상이다. 생산자를 생산과정에서 분리시키는 게 근대 국가 형성의 핵심을 이뤘다면, 이를 극복하는 것은 그 생산과정에 생산자의 새로운 참여를 모색하는 데서 시작할 수 있다는 게 안승준의 대안이다.

이 대안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안승준은 ‘공동체 토지 신탁’을 제시한다. 공동체 토지 신탁은 토지를 사용하는 개인들이 투자한 가치는 보유할 수 있으되, 그 토지 자체는 공동체가 관리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이 전략은 고유한 문화와 상호결속에 의해 형성되는 지역 공동체의 활성화를 겨냥하고, 나아가 그 공동체 속에서 인간이 자연과 공존하는 삶을 실현해 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학사학위논문인 만큼 ‘국가에서 공동체로’가 매우 탁월한 학술 저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책은 우리 사회의 미래에 대한 한 젊은 생태학 연구자의 패기만만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광복 이후 우리 사회가 걸어온 길은 명암이 선명한 모더니티의 과정이었다. 그 그늘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공동체로서의 사회’의 위기다. 안승준은 공동체의 중요성을 계몽하고 생태학적 대안을 모색한 선구적인 생태학 연구자로 기억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공동체의 미래 

내가 공부하는 사회학의 핵심 연구 대상은 다름 아닌 ‘사회’다. 사회학적 시각에서 사회란 개인들로 구성돼 있는 동시에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민주공화국을 연 지 100년이 된 현재, 우리 사회에선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로서의 사회’가 작지 않은 위험에 처해 있다.

사회가 갖는 개인성과 공동체성 가운데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강조할 순 없다. 개인성이 강화되면 사회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영역이 되고, 공동체성이 강화되면 권위주의의 공간이 되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사회란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사냥터가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이며, 이러한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게 사회에 내재된 본연의 과제라는 점이다.

‘국가에서 공동체로’에서 안승준은 말한다. “우리의 욕구는 (...) 우리의 지각 있는 선택들에 의해 형성돼야만 한다. (...) 이것이야말로, 일상 생활의 작은 구석에까지 개입하는 근대 국가의 난폭과 이데올로기를 배제하고, 우리들 자신과 우리들의 공동체 안에서 생태적 균형을 되찾을 유일한 길인 것이다.”

안승준의 꿈이 결코 쉬운 과제는 아니다.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공동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선 물질적 욕망에 대한 자기제한적 이성을 발휘해야 할 뿐만 아니라 민주적 절차에 기반한 사회적 합의를 일궈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안승준의 꿈이 미뤄둬야 할 목표도 아니다. 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하되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다시 말해 미래지향적인 공동체를 추구하고 모색하는 것은 미래 100년의 우리 사회에 부여된 매우 중대한 과제의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는 지난 한 세기 우리나라 대표 지성과 사상을 통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연재입니다. 다음주에는 김성칠의 ‘역사 앞에서’가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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