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시대, 20세기 한국 현대사를 관통한 우리 시대 어른들의 생애사는 그 자체로 특별하다. 1945년 8ㆍ15 해방, 1950년 6ㆍ25 전쟁, 1960년 4ㆍ19 혁명만 읊어봐도 굴곡진 인생이 그려진다. 1935년 대구에서 태어난 채현국(84) 효암학원 이사장의 생애는 조금 더 흥미롭다. “여섯 번 부자가 되고 일곱 번 거지가 되어봤다”고 말하는 채 선생은 1960년대 탄광 운영으로 열 손가락에 꼽히는 부자도 되어봤고, 민주화 지사들의 든든한 뒷배 역할도 자처했었다. 지금은 지방에 2개 학교를 보유한 학교법인의 이사장이지만, 가끔 작업복 차림으로 학교 정원을 손질하고 있는 ‘이상한 할아버지’로 살아가고 있다. 요즘은 자신의 생애를 증언하기 위해 젊은 역사학자들을 만나고 있다. 지난 15일 서울 필운동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정준영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조교수, 장신 역사문제연구소 상임연구위원과 만난 채 선생의 구술 채록 현장을 대화체로 정리했다.
◇8ㆍ15 해방이라는 ‘충격’
장신(이하 장)= “일제 시대 기억이 유독 선명하다. 황국신민교육의 실상은 어땠는가.”
채현국(이하 채)= “학교에서 일본 군가(軍歌)를 수도 없이 불렀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도 술을 마시면 어릴 때 배운 일본어를 곧잘 구사하는데, 이는 제2의 언어를 맞아가면서 배운 탓이다. 국민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배운 적도 없는 일본말을 해야 했고, 우리 말을 하면 교사가 귀싸대기를 올려 붙였다.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나았다.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은 ‘망국의 국민들은 버러지다. 최소한 노예로 쓰려면 인간성을 개조해야 한다’는 논리 아래 철저하게 진행됐다. 이런 세뇌 교육은 해방 직전까지 계속됐고, 당시 나는 세뇌된 친일파나 다름 없었다.”
장= “선생처럼 일제 통치가 이미 시작된 1930년대에 태어나신 분들은 갑작스런 조국 해방에 외려 놀랐다는 분들이 꽤 된다.”
채= “조선총독부라는 게 있었지만 나는 조선이란 것과 아예 관련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대한’이란 말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일제 통치 전에 대한제국이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 학교에서는 대한제국이 망했다고 하지 않고, 조선왕조가 망했다는 것만 강조했다. 1945년 8월 15일 나라가 해방됐다고 난리가 났는데, 동네 사람들이 마치 미친 사람처럼 좋아하더라. 나는 스스로를 황국신민으로 여겨 왔으니, 속으로 ‘나라가 망했는데 왜 저리 좋아하나’ 의아해 했다.”
장= “아무래도 1910년대 일제 점령 시기를 경험한 세대와는 또 다를 것 같다. 태어나자마자 철저한 황국신민교육을 받았기 때문 아닐까.”
정준영(이하 정)= “그 시대를 산 다른 사람들도 선생처럼 어린 시절 내재되어온 가치체제가 해방과 함께 일순간에 전도되는 경험을 증언한다. 8월 15일이 되자마자 학교에서 일본어 잘하던 모범생들은 바보가 됐고, 일본인 교사들에게 혼만 나던 불량 학생들이 잘 나가는 시대가 됐다고 한다.”
채= “해방 직후 내 모습은 권력자가 훈련시킨 것에 대한 ‘반응’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반응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결과다. 프랑스 사상가 파스칼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 했지만, 결국엔 겨우 갈대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권력이 길들인 대로 반응하며 살지 않고 돼먹지 않게 생각 따위를 하면 사회에서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통치에 방해되는 생각은 아예 싹을 자르는 통치술이다. 이런 경험 탓에 해방 이후에 어른들을 못 믿게 됐다.”
◇ “내겐 서울대가 최악의 학교”
장= “1956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 가선 달라진 게 없었나.”
채= “해방 이후 중ㆍ고등학교에서도 한글을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다. 일본어로만 가르쳐온 교사들이 우리말을 제대로 할 리가 없었다. ‘진짜 선생님이 맞나’라는 생각을 자주했다. 대학에 가서도 전부 한문으로 된 시조를 가르쳤지, 우리말로 된 장편 소설을 가르치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 이웃에 출판사 사장이 살았던 덕분에 다양한 우리말 소설을 구해 읽었던 나로서는 실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대학에 입학했지만 내 전공인 철학도 교수가 겨우 외워서 가르치는 느낌이었다. 철학을 어떻게 외워서 가르치나. 서울대는 내가 다닌 학교 중 최악의 학교다.”
정= “일제시대 당시 일본인들이 고등교육을 장악했다 보니 이후에도 공백이 꽤 컸다. 50년대 대학 교수 중 30, 40년대 일본 본토에서 공부를 마치고 국내로 들어와 교수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국민학교 때부터 일본에서 공부해 모국어가 한국어가 아닌 경우도 있었다. 당시 잡지나 소설을 보면 이런 지식인들은 거의 외지인으로 그려진다.”
장= “선생 말씀대로 해방 후 국내에서는 인문학, 사회학 연구가 빈약할 수밖에 없었다. 우수한 학생들은 주로 법대에 진학했다. 하지만 이들은 학자가 되기보단 판ㆍ검사가 될 재원이었다. 인문학, 사회학 쪽은 일본에서 유입된 학자들이 많았고, 우리말이 어눌한데다 일본의 학문을 가져와 그대로 가르치기도 했다.”
정= “낭만주의적 시각에서는 우리 교육시스템이 과거에는 더 나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한국 현대사에서 과연 대학교육제도가 좋았던 적이 있나 싶기도 하다. 교육기관이나 연구기관 둘 중 어느 성격으로도 호평을 하기 힘들다.”
채= “서울대는 내가 입시를 치렀을 때나 지금이나 시험 잘 치는 학생들을 뽑는 곳이다. 나는 이런 교육 체계가 가정에서의 학대, 즉 ‘가학’(家虐)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자기만의 독서나 탐구를 통해 스스로 관념을 만들어가는 게 아니라,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공부하고 그에 따라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직업을 얻는다. 부모가 옳다고 주입해온 가치라 쉽게 포기하지도 못한다.”
정= “선생이 말씀하시는 가학은 장경섭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표현하는 ‘가족자유주의’와 비슷한 것 같다. 한국에서는 유난히 가족 단위로 생존 경쟁을 하는 이기적 가족주의가 도드라진다. 부모님들은 ‘나를 믿어라, 그래야 우리 가족이 산다’고 강조한다.”
채= “시험 잘 치는 학생들이 점점 의과대학으로 몰린다는 점도 걱정이 된다. ‘시험 기계’들은 일하는 걸 싫어하고, 환자들의 고통을 외면할 가능성이 높다. 시험이 어려워질수록 정의롭고 고통 받는 자의 편에 설 의사들이 점점 줄어들 것이다. 학생들은 스스로, 함께 배워야 한다. 요새는 책도 많다. 각각 다른 책을 읽고 저희들끼리 생각을 나누고 토론해야 한다.”
◇이타적인 부자는 어떻게 가능했나
장= “1950년대 초부터 아버지와 함께 서울에서 연탄공장을 하고, 강원 삼척에서 ‘흥국탄광’을 운영했다.”
채= “아버지는 광산주와 계약을 맺고 채굴한 광물 중 일부만 수수료만 내는 독립경영인 ‘덕대’로 사업을 시작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맺자마자 장남이었던 친형이 자살을 하면서다. “이제 우린 영구분단이다”라는 말이 형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형이 자살하자 아버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탄광으로 숨어들었다. 아버지가 앞서 서울 경운동에 차렸던 연탄공장은 내가 이어 받아 운영했다. 연탄이 안 팔리는 여름에는 연탄공장 직공들에게 리어카를 빌려주고 아이스크림 장사를 하게 했다.”
정= “1960년대 전국에서 소득세 납부액이 열 손가락에 들 정도로 부자가 됐다. 부는 어떻게 축적할 수 있었나.”
채= “덕대인 아버지가 어음 때문에 파산할 지경에 처했고, 데리고 있던 광부들에게 월급도 제대로 못 줄 정도였다. 석탄이 나오면 그때그때 월급을 쥐어주다 보니 노동력도 시원찮았다. 과학적인 채굴 기술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산 밑에 샘이 없으면 무작정 땅을 파보는 식이었다. 경영난 소식을 듣고 내가 친구들에게 빚을 져 겨우 부도를 막았다. 위기를 넘기고 나선 아버지의 공격적인 투자로 금새 부자가 됐다. 원래 돈을 크게 벌 생각은 없었고, 아버지 부도를 막아주려던 게 목적이었다. 부자 되는 게 창피했고, 돈이 싫어서 세금도 정직하게 신고했다.”
고령의 채 선생은 3시간여의 채록이 진행되는 동안 목도 한번 안 축이고 꼿꼿한 자세로 생애사를 읊어 내렸다. 되레 지친 쪽은 한참 젊은 기자였다. 마지막까지 “상상력을 키우려면 소설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 선생께 책 추천을 부탁했더니 호통이 되돌아왔다. “그건 스스로 찾아라. 공부를 하는데 효율은 중요치 않다.”
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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