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았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년이 되었다. 나라를 잃고 고통 받던 선조들이 목숨 걸고 그러나 평화롭게 독립을 외쳤다. 수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고 가정과 삶은 송두리째 망가졌다. 끝내 국외로 탈출하여 임시정부와 독립군 운동에 헌신한 이들이 어느 하루 편한 날을 보냈을까. 그 후손들은 지금 어떻게 사는가? 그분들을 생각하면 지금 누리는 평범한 하루도 결코 가볍거나 예사로울 수 없다. 아무리 배부른 하루도 나라 없는 민족으로서는 불행한 하루다. 그래서 100주년 행사를 지켜보면서 그분들이 겪었을 하루의 고통만이라도 느껴보았다.

하지만 친일과거청산(명칭을 분명히 해야 한다. ‘친일’로 뭉뚱그릴 게 아니라 정확히 ‘친일매국’으로 불러야 옳다)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100주년 뜻 깊은 행사에 부끄럽게도 그것을 다시 천명해야 했다. 그런데 그게 과거에 매달리는 것이라며 불편한 이들이 있다. 일본은 3ㆍ1운동 때 사상자 수를 대통령이 언급한 게 잘못된 일이라며 타박한다. 적반하장도 이 정도면 역대급이다. 그런데 이 나라 정치인들 가운데도 그런 주장에 비슷하게 동조하는 자들이 제법 있다. 그들이 바로 박중양의 후손들이다. 박중양을 처단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아예 그 인간의 존재를 알지도 못한 채 살아왔기 때문이다.

박중양불망비 ⓒ충북인뉴스

지난 해 공주에 있는 충남교육연수원에서 특강을 마치고 공산성에 들렀다. 거기에서 고약한 비석을 만났다. 경악했다. 억지로 세운 비석들도 많아서 제 값 하는 것 드물지만 이건 다르다. ‘본도장관박공중양불망비’라니. 박중양이 누군가. 1897년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유학 후 1903년부터 1년간 일본의 관료로 지내다 귀국하여 대한제국 관료로 생활했다. 러일전쟁 때 일본군 통역으로 종군했다. 이후 대구군수 겸 경북관찰사 대행으로 임명되어 대구읍성을 허문 자다.(진주 판관을 겸하면서 진주성곽의 일부도 철거했다). 우리나라 읍성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박중양의 읍성 파괴부터였다. 왜 그는 읍성을 없앴을까?

조선시대 거의 모든 군현에는 읍성이 있었다. 읍성은 그 지역의 중심이고 시간과 공간의 상징이다. 그게 사라지면 정체성의 뿌리까지 흔들린다. 외세가 장악하고 지배해도 저항력이 감소한다. 그걸 노렸다. 일제는 조선을 점령한 뒤 강제로 거의 모든 읍성성곽을 무너뜨렸다. 세계 역사 어디에도 점령자가 점령지의 성곽을 모두 무너뜨린 예는 없다. 그만큼 일본의 침략은 치밀하고 끔찍했다. 그 단초가 바로 박중양의 대구읍성 파괴였다. 일종의 샘플링이었다.

엄연히 대한제국 시대였다. 황명도 없이 읍성을 허물었으니 대역의 죄다. 그러나 처형당하기는커녕 승진해서 중앙으로 진출했다. 이미 조정을 친일파가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는 경술국치 때까지 경상북도관찰사와 충청남도관찰사(장관) 등을 역임했다. 그때 공주에 그 비석이 세워진 것이다. 지금까지 온전하게 살아남은 읍성은 낙안, 고창, 해미 딱 세 군데뿐이다. 운이 좋았을 뿐이다. 그런데 거기 찾아가는 관광객들은 ‘낯선 모습’에 인증샷 찍기 바쁘다. 왜 그 많은 읍성이 사라졌는지 묻지 않는다. 그러니 박중양의 불망비를 봐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다. 비석을 없애는 게 아니라 그 앞에 치욕의 내용을 적은 팻말을 심어야 한다. 그래야 분노와 부끄러움과 자각을 배운다. 박중양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을 지냈고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도 지냈다. 해방 후 친일파로 몰려 반민특위에 기소되었지만 풀려났다. 이완용을 비호하고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존경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던 그는 1959년 86세로 죽을 때까지 모든 호사를 다 누렸다.

그런 인물이 어디 박중양 하나에 그치랴. 지금도 그런 자들의 후손이 활개치고 떵떵거리며 권력과 재력을 쥐고 있다. 부끄러움은커녕 후안무치 적반하장이다. 과거에 매달리지 말란다. 적폐청산 지겹단다. 좌익 준동에 나라 넘기는 꼴 못 보겠단다. 빨갱이들 때문에 나라가 위태롭단다. 여전히 이러고 있다. 친일매국노의 죄를 처단하고 청산하지 못한 업보다.

박중양을 제대로 알고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그 망각이 그 자의 불망비를 덮고 있다. 공주시가 공부하지 않으니 이 비석을 ‘모시고’ 있다. 3ㆍ1절 100주년을 맞아 태극기 흔들며 대한독립만세 외치는 게 전부가 아니다. 100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청산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끝까지 캐내 청산해야 한다. 청산된 역사가 다음 세대에 넘겨줄 유산이다. 그래야 지금도 당당하게 활동하는 제2, 제3의 박중양들을 색출하고 응징할 수 있다.

언젠가 다시 공주에 갔을 때 박중양의 비석이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당당하게 서있는 꼴은 보지 않기를 바란다. 그 죄상 낱낱이 밝힌 팻말을 그 비석 앞에 세우라! 그 후손들이 두고두고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은가. 왜 부끄러움은 우리의 몫인가! 알아야 분노하고 깨우쳐야 고친다. 다음 100년의 대한민국의 역사가 당당하기 위해서다.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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