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에 중재 역할 요청받고 “북미 간 타결 꼭 성사”
신한반도체제 구상 밝히며 “평화경제 시대” 경협 의지
북미 협상이 당분간 교착할 조짐이다. 지난해 6월 첫 회담 뒤 8개월간의 공전 끝에 재개된 정상 간 담판이 합의 없이 결렬되면서다. 하지만 테이블이 엎어졌다고 보기에는 여전히 양측의 대화 의지가 강하다. 다시 중재가 긴요해진 상황이라는 게 청와대의 인식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하노이 서밋 다음 날인 1일 “북미 간 타결을 꼭 성사시키겠다”고 다짐했다.
◇돌아서기는 했지만
“최고영도자 동지(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수뇌(정상)회담에서 논의된 문제 해결을 위한 생산적인 대화들을 계속 이어나가기로 했다.” 합의문 서명식도 없이 전날 북미 정상회담이 허망하게 끝난 데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게 책임을 떠넘겼지만 북한은 미국을 비난하지 않았다. 1일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오히려 “최고영도자 동지가 트럼프 대통령이 먼 길을 오고 가며 이번 상봉과 회담의 성과를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인 데 대해 사의를 표시하고 새로운 상봉을 약속하며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고 전했다. 자극적 표현이 동원된 예의 날 선 비판은 없었다.
도리어 충격에 빠진 듯 풀 죽어 보이는 게 북한의 모습이었다. 회담 둘째 날 심야에 회견을 자청하고 기자들 앞에 나타난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은 “국무위원장 동지께서 미국식 계산법에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느낌을 받았다. 앞으로의 조미(북미) 거래에 의욕을 잃지 않으실까 하는 느낌을 받았다”며 첨예하게 대립한 담판에서 김 위원장이 느꼈을 당혹감과 상실감을 대신 전했다. 지난해 5월 대북 강경파인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에게 맹공을 퍼부어 임박한 첫 북미 정상회담을 취소 위기에 빠뜨릴 당시의 독기는 찾을 수 없었다.
대화가 끝장났다고 여기지 않는 건 미국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회담 결렬 직후 기자회견에서 “앞으로 며칠, 몇 주 안에 다시 만나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란다”고 했던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다음 출장지인 필리핀으로 가는 길에 전용기 안에서도 “양측은 성취하려고 하는 것 사이의 충분한 일치를 봤기 때문에 대화할 이유를 찾아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날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의 전화 통화에서도 “북한과 대화를 계속해나가겠다”는 의지를 밝혔다고 외교부가 전했다.
다만 상당 기간 냉각기는 불가피할 전망이다. 폼페이오 장관은 기내 회견에서 추후 실무 협상 계획과 관련, “(북한과) 날짜를 정하지 않았는데 느낌상 시간이 좀 걸릴 듯하다”며 “양측이 조직을 재편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실제 협상 결렬 뒤 북미가 제각기 연 기자회견에서 양측의 현격한 인식 차가 드러나기도 했다. 지금껏 양측 간에 축적된 신뢰의 수준을 감안할 때 북한은 영변 내 핵 물질 생산 시설 폐기가 자신들이 제시할 수 있는 초기 비핵화 조치의 최대치라며 선을 그었지만 미국은 ‘플러스 알파’(+α)를 집요하게 요구했고, 영변 시설 폐기만 받고 그 보상으로 북한 측이 바라는 2016년 이후 고강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 제재 해제를 제공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미측이 퇴짜를 놓은 것으로 짐작된다. 정상회담을 망가뜨릴 정도로 각자 입장이 워낙 확고한 데다 흥정물 가치 평가 결과도 판이해 단기간에 양측이 접점을 찾기는 쉽지 않으리라는 게 외교가의 중론이다.
◇“타결 성사시키겠다”
하노이 담판이 북한 비핵화 진전과 대북 제재 완화로 이어질 것을 기대하며 남북 경제협력 본격 추진을 준비하던 청와대는 예기치 못한 결과에 당혹스러운 기색이다. 그러나 다시 우리가 타협 계기를 만드는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할 시점이라는 게 문재인 대통령의 판단이다.
이날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3ㆍ1절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문 대통령은 기념사를 통해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는 많은 고비를 넘어야 확고해질 것”이라며 2차 북미 정상회담 결과와 관련해 “더 높은 합의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이제 우리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북미 정상이) 장시간 대화해 상호 이해와 신뢰를 높인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진전이었고 특히 두 정상 사이에 연락사무소의 설치까지 논의가 이뤄진 것은 중요한 성과”라며 “트럼프 대통령이 보여준 지속적 대화 의지와 낙관적 전망을 높이 평가한다”고 했다. 이어 “우리 정부는 미국ㆍ북한과 긴밀히 소통하고 협력해 양국 간 대화의 완전한 타결을 반드시 성사시켜낼 것”이라고 적극 중재 의지를 표명했다.
중재는 미측 요청이기도 하다. 청와대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이 전날 북미 회담이 가시적 소득 없이 끝난 뒤 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김 위원장과 대화해 그 결과를 알려주고 적극적 중재 역할을 해 달라”고 당부했고, 문 대통령은 “가까운 시일 안에 직접 만나 심도 있는 협의를 계속해가자”고 제안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 말 추진되다가 북미 정상회담 뒤로 미뤄졌던 서울 남북 정상회담이 북미 협상 재교착 국면을 타개할 카드로 부상할 가능성이 있다. 평양 정상회담 때 김 위원장이 약속한 서울 답방은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서로 견인한다는 선순환론을 청와대가 증명할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제언이 나온다. 문 대통령은 미국이 남북관계 개선 속도를 늦춰달라고 한국에 요구하던 지난해 11월 말 당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계기에 트럼프 대통령과 회동해, 북미 중재를 위해 자기가 김 위원장을 먼저 만나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 경험이 있다. 당시에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비핵화를 하면 바라는 바를 이뤄주겠다는 자기 메시지를 김 위원장에게 전해달라며 문 대통령을 응원했었다.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별개 트랙에서 굴러가야 한쪽이 막힐 때 한쪽이 보완하는 ‘선순환적 투 트랙’이 될 수 있다”며 “이번에야말로 김 위원장 답방을 성사시켜 이를 보여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기념식에서 핵 담판 결렬에도 불구하고 예고했던 신한반도체제 구상을 밝히면서 전보다 어려워진 중재자 소임을 맡겠다는 각오를 우회적으로 내비쳤다.
문 대통령이 제시한 신한반도체제 구상의 핵심은 경제였다. 이념과 진영의 시대를 끝낸, 새로운 경제협력공동체를 만들어 “한반도에서 평화경제의 시대를 열어나가겠다”는 구상이다. 문 대통령은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의 재개방안도 미국과 협의하겠다”고 말했다. 아울러 비핵화가 진전되면 남북 간에 ‘경제공동위원회’를 구성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를 통해 동아시아 내에 새로운 다자평화안보체제를 만들어 내는 것이 궁극적 목표다.
남북간 철도ㆍ도로 연결 또한 신한반도체제 구상을 실천하는 과제로 제시했다. 문 대통령은 “한반도의 종단철도가 완성되면 지난해 광복절에 제안한 ‘동아시아 철도공동체’의 실현을 앞당기게 될 것”이라며 “그것은 에너지공동체와 경제공동체로 발전하고, 미국을 포함한 다자평화안보체제를 굳건히 하게 될 것”이라고 비전을 제시했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이동현 기자 nani@hankookilbo.com
하노이=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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