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서구 등촌동에서 전처를 흉기로 살해한 혐의로 경찰에 붙잡힌 김모씨가 지난해 10월 25일 영장실질심사를 위해 서울남부지법으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10월 22일 발생한 ‘등촌동 전처 살인사건’의 유족들은 경찰과 검찰에 피의자 신상공개를 요청했지만 매번 “안 된다”는 답변밖에 확인할 수 없었다. 유족들은 그 즈음 발생했던 ‘강서구 PC방 살인사건’의 피의자와 달리 신상을 공개할 수 없다는 수사기관의 설명을 납득할 수 없어 결국 두 달 뒤 인터넷 커뮤니티에 직접 피의자 실명과 사진을 공개했다. “저는 아직 그 살인자가 두렵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엄마를 위해 저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는 게 유족들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피의자 신상을 공개한 이유였다.

강력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재발 방지와 가해자 처벌 차원에서 피의자 신상공개를 요구하는 유족들의 희망이 100% 반영되지는 못하고 있다. 검찰과 경찰 등 수사기관은 흉악범죄 피의자 신상공개를 심의하는 절차에 따라 종합적으로 판단한 결과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2015년 2월부터 2018년 12월 10일까지 경찰이 개최한 특정 강력범죄 피의자 신상공개위원회(위원회) 개최 내역을 입수해 분석한 결과는 경찰 설명과는 다소 상이했다. 도리어 위원회의 구성이나 개최 여부에 대한 판단, 신상공개의 기준이 일관된 잣대가 없었다.

경찰 특정강력범죄 피의자 신상공개위원회 개최 내역.김문중 기자

경찰은 흉악범 신상 공개 기준이 모호하다는 비판에 2015년 2월부터 신상공개에 대한 세부 지침을 마련하고 위원회를 열어 신상 공개를 결정해왔다. 이 시기 경찰은 13건의 범죄에 대해서 위원회를 열었고 이 중 11건에 대해 피의자 신상을 공개했다. 문제는 위원회 개최 판단에서부터 경찰의 자의적 기준이 통용된다는 사실이다. 위원회 개최 여부를 담당 지방청 과장이나 부장, 담당 경찰서 과장이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일관된 기준으로 신상을 공개한다는 취지가 무색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등촌동 살인사건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피해자의 딸이 청와대 홈페이지에 청원을 올려 엄벌을 촉구하고 인터넷 커뮤니티에 피의자 실명과 사진을 공개해도 수사기관은 오불관언이었다. 서울지방경찰청 형사과 관계자는 이 사건에 대해 위원회가 개최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그간 신상공개위원회를 개최한 사례 및 수사를 통해서 확인한 사실관계를 종합적으로 고려했다”는 답변을 내놨다.

지난해 10월 24일 발생했던 ‘춘천 예비신부 살인사건’도 사정은 비슷했다. 유족들은 마찬가지로 청와대 홈페이지에 “이런 잔인하고 중대한 범죄에 대하여 살인 피의자의 얼굴 등 신상을 공개한다면 저같이 피눈물 흘리는 엄마가 나오는 것을 예방할 수 있을 것입니다”는 눈물의 호소를 올렸다. 이에 청와대가 두 달 가량 뒤 ‘신상공개위원회 의결을 거쳐서 신상정보가 공개될 수 있다’며 ‘이 사건은 결국 비공개로 결정됐다’는 답변을 내놨지만 위원회는 열리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강원지방경찰청 형사과 관계자는 “모든 살인 사건 피의자 얼굴이 다 공개돼야 하는 것은 아니고 이 사건의 경우 신상 공개가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지난해 10월 22일 ‘강서구 PC방 살인사건’ 피의자 김성수(30)씨 얼굴을 공개했다. 연합뉴스

강력범 신상공개 논란 때마다 이슈가 되는 ‘정신질환 피의자’에 대한 기준도 뚜렷하지 않다. 경찰은 2016년 5월 발생한 ‘강남역 살인사건’ 당시 피의자가 중증 정신질환자로 재범 방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상을 공개하지 않았다. 반면 같은 해 발생했던 ‘수락산 살인사건’과 ‘오패산터널 총격 사건’ 피의자들도 조현병을 앓아왔지만 위원회는 신상 공개를 결정했다.

같은 정신질환 피의자라도 위원회 구성이 달랐다. 서울에서 발생한 ‘강남역 살인사건’과 ‘수락산 살인사건’, ‘오패산터널 총격 사건’ 신상 공개 결정에는 정신과의사가 외부 위원으로 참여했으나 ‘제주성당 묻지마 살인사건’의 경우 목사가 외부 위원으로 참석했다.

그림 3'강남역 살인사건' 피의자 김모(37)씨가 2016년 5월 24일 오전 서울 강남역 인근 노래방 화장실에서 현장검증을 마친 뒤 밖으로 나서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피의자 신상을 공개하는 시기도 천차만별이었다. 경찰이 공개한 11건 중 5건의 피의자가 구속 영장 발부 전에 신상이 공개됐다. ‘부산 실탄사격장 강도살인미수사건’ 경우 경찰은 사건 발생 2일 만에 위원회를 열어 전원 일치로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는 피의자 신상을 공개했다. ‘안산 불도 토막살인사건’ 피의자는 긴급체포 이틀 만에 영장실질심사 출석 과정에서 신상이 공개됐으며, ‘시화호 토막살인사건’ 피의자는 체포 직후 신상이 공개됐다. 경찰 내부 지침은 '피의사실에 대한 법원의 1차 판단이 완료됐다고 볼 수 있는 구속영장 발부 시점 이후 공개'를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국민과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고 이미 실명이 공개된 피의자의 경우는 충분한 증거가 확보됐을 시 구속영장 발부 전에 위원회 결정에 따라 공개할 수 있다'는 예외 조항 때문이다.

제주의 한 성당에서 혼자 기도하던 여성을 흉기로 수차례 찔러 숨지게 한 혐의(살인)로 구속된 중국인 피의자 첸궈레이가 2016년 9월 22일 오후 범행 현장에서 경찰과 현장검증을 마친 뒤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강력범 신상공개 제도 전반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현재는 누가 (신상공개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는지에 따라 (공개 결과가) 영향을 받는 등 일관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지방경찰청에서 임의로 임명한 위원들이 결정하는 방식으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강동욱 동국대 법대 교수는 “수사기관의 의사에 따라서 공개해 국민에게 알리는 방식은 ‘망신주기’ 이상의 효과가 없다고 본다”면서 전면 재검토 의견을 밝혔다.

이런 지적에 대해 경찰청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그간 신상공개 사례를 분석하며 제도 개선을 추진 중”이라며 “요건에 맞는 범죄에 대해서는 되도록 모두 신상공개위원회를 열고, 전문가들이 참여해 결정하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신질환 피의자 신상 공개에 대해서는 “모든 정신질환 피의자 신상을 공개한다거나 비공개하는 것은 아니다”며 “피의자의 정신질환 정도와 범행 수법 및 경위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결정한다”고 밝혔다.

홍인택 기자 heute12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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