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준호의 실크로드 천일야화] <42> 힌두교의 성지 바라나시
혼돈이라는 단어는 이 도시에 붙여야 할 것 같았다. 어느 것 하나 제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이 없었다. 길을 나서면 사람과 승용차, 버스, 오토바이, 자전거는 물론이고 인력거, 오토바이 택시 격인 오토릭셔 어느 것 하나 제 길로 다니지 않았다. 여기에 소와 개, 염소, 심지어 원숭이마저 뒤섞여 도로를 활보한다. 클랙슨 소리가 끊이지 않는 그 도시는 바로 인도 바라나시였다.
4년쯤 전인 2014년 12월 인도로 떠났다. 힌두교 카레 간디 정도로 각인된 인도 땅은 쉽게 이방인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델리국제공항에서 4시간 수속을 밟은 후에야 베일을 벗었다. 인도 특유의 향신료 냄새와 시크교도의 터번을 보고서야 인도를 실감했다.
호텔에서 눈을 붙였다 떼기 무섭게 공항으로 다시 돌아왔다.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1시간20분 정도 걸려 도착한 곳이 바라나시였다. 이 도시에서 가장 먼저 만난 종교는 불교였다. 싯다르타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뒤 처음으로 설법을 편 곳이 이 도시에 있었다. 사르나트다. 널찍한 공원을 걸어 들어가니 높이 42m 직경 28m의 다메크탑 앞에 중국 불교신자 한 무리가 성지순례를 하고 있었다.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조계종 재단의 고등학교를 나온데다 절집도 많이 다닌 터라 마음이 편안했다. 녹야원(鹿野苑)이라는 이름답게 한쪽 철망 너머에는 사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너무 평화로웠던 것이 못내 걸렸다. 불사를 대규모로 벌이는 우리네 풍토 같으면 4대 성지를 이렇게 조용하게 놔둘 리가 없다. 진신사리 하나만 있어도 하늘을 찌르는 불상이 올라갔을 것이다.
나중에 통계치를 보고는 또 한번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불교가 태동한 인도에서 정작 불교신자는 1%도 되지 않았다. 카스트 제도를 옹호하는 힌두교가 평등을 강조하는 불교를 방치했을 리는 만무했다. 힌두교의 작전은 남달랐다. 석가모니를 힌두교 3대 신의 하나인 비슈누 신의 9대 화신으로 삼은 것이다. 힌두교도들은 더 이상 불교를 믿기 위해 개종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0.76%라는 통계 숫자는 해도 너무 했다.
비록 불교 4대 성지 중 하나지만 바라나시는 불교로 알려진 도시는 아니었다. 13억 인구의 82%가 믿는 힌두교의 성지였다. 그것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성지였다.
땅거미가 질 무렵 갠지즈강을 찾기 전까지는 그러려니 하는데 그쳤다. 하지만 인력거를 타고 차와 동물, 사람 사이를 이리저리 헤집다 강가에 도착해보니 입이 떡 벌어졌다. 강변에는 제단이 차려졌고 계단과 수십 척의 쪽배에는 힌두교도와 여행객이 뒤엉켜 ‘푸자’라고 불리는 종교의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금색 옷을 입은 7명의 브라만 청년이 제단에 올라 갠지즈강의 여신 ‘강가’를 위한 기도를 올리자 신도들의 표정이 사뭇 비장했다. 히말라야 카일라스 산에서 발원한 이 강은 천상에서 흐르다 시바신이 땅으로 연결했다고 신도들은 믿고 있다. 끊임없이 윤회를 거듭하는 인간들이 갠지즈강에서 목욕하고 세상을 뜨면 윤회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해탈할 수 있다는 믿음이 바라나시를 성지로 만든 것이다. 이 의식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3,000년 이상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했다.
인력거에서 내려 강변으로 오는 길에는 사람들이 소와 개, 염소와 뒤엉켜 누워 있었다. 이들은 갠지즈강에서 세상을 떠나는 영광을 바라며 현재를 송두리째 헌납하는 중이었다. 갠지즈강 주변의 나트륨등과 해괴망측한 요기들이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 다시 갠지즈강을 찾았다. 간밤의 어수선함은 온데간데 없고 정적만 감돌았다. 쪽배를 타고 갠지즈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다. 새벽인데도 강물에 몸을 씻는 무리가 보였다. 조금 더 올라가니 빨래를 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이들은 불가촉천민이다.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로 구분된 카스트 안에도 들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몸이 닿으면 오염된다는 믿음 때문에 절대로 옆에 오게 하지 않는 계급 바깥의 계급이었다. 심지어는 눈에 띄면 오염된다는 불가시천민까지 있다니 말문이 막힐 뿐이다.
뱃머리를 돌려 하류쪽으로 달리는데 ‘알람’이라는 이름의 인도 가이드가 카메라를 꺼라고 얘기했다. 화장터였다. 장작더미 속에 불길이 오르고 웅성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회의 사슬을 끊느냐 못 끊느냐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카메라가 해탈을 방해하는 꼴을 가만 놔둘 수는 없을 것이다. 화장터 찍다 카메라 빼앗겼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 성 싶다.
이날 바라나시를 떠나기 전에 비단공장을 한 곳 들렀다. 영국 식민지 전부터 실크산업이 호황을 누렸다고 한다. 그런데 비단을 짜는 숙련된 직조공 대다수가 무슬림이었다. 중세 이슬람 침입 후 하층 카스트에서 개종한 사람들의 후손인 것이다.
1947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때 이슬람교를 믿는 신도들은 파키스탄으로 독립했다. 그런 후에도 인도에는 10%가 좀 넘는 무슬림이 살고 있다. 10%라해도 인구 1억명이 넘는다. 82%를 차지하는 힌두교 신자들은 10억에 육박한다는 얘기고 보면 인도는 종교도 자급자족하는 나라다.
인도의 대표적 종교를 꼽으라면 자이나교도 빼놓을 수 없다. BC 6세기쯤 불교와 비슷한 시기에 태동한 자이나교는 극도의 고행을 강조한다. 불살생 불간음 무소유 금욕을 지키는 이 종교는 불교와 비슷하지만 땅 속의 벌레들을 죽일 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농사를 짓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채식주의 동물애호 단식의 뿌리에서 자이나교를 찾을 수 있다.
바라나시에서 아그라로 가는 길에 자이나교 사원을 들러봤다. 흰 옷을 걸치는 백의파, 옷을 걸치지 않는 공의파로 나눠지는데 다행히 벌거벗은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힌두교에 뿌리를 두고 이슬람을 받아들인 시크교는 개혁종교로 꼽힌다. 15C 말 이슬람 신비주의인 수피즘에 영향을 받은 구루 나나크가 카스트와 남녀차별을 부정하면서 시크교가 탄생했다. 장발, 무릎까지 내려오는 내의, 철고리, 허리의 칼, 빗을 몸에 지니고 있는 시크교도들은 머리에 커다란 터번을 쓴 모습으로 각인되고 있다.
글ㆍ사진=전준호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