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어느 도시에 가든 쉬이 접할 수 있는 풍경이 표어와 구호 같은 계몽의 언사로 도배된 거리다. 무척 낙후된 고을에 가도 정도의 차만 있지 사정은 별반 다를 바 없다. 황토로 쌓아올린 담벼락 곳곳서 붉은 페인트로 써진 각종 표어와 구호를 어렵지 않게 접하게 된다.

그런 도시 경관을 접할 때마다 필자에겐 이런 물음이 뒤따르곤 한다. 그러한 계몽의 언사가 서울 온 거리를 빼곡하게 채우고 있다면? 가로등 기둥마다 온갖 구호와 표어가 나부끼고 있다면? 분명 숨이 꽉 막혀 올 듯싶다. 그런데 중국에서 접하면 그런 느낌은 간 데 없고 때로는 자연스럽게까지 느껴진다. 익숙해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뭔가 거기서 중국다움이란 걸 감지했다고나 할까, 암튼 나름 흥미로운 상념에 빠지곤 한다.

우리는 무엇에서 ‘중국다움’을 느끼게 되는 걸까. 부정적 뉘앙스를 사뭇 풍기는 ‘중국스러움’을 말함이 아니다. 인터넷 등에 퍼져 있는 괴팍하거나 엽기적인, 또 비상식적이거나 황당한 사건 등을 기반으로 빚어진 중국 이미지라든지, 지난 성탄절 즈음에 유포된 “중국엔 올해도 크리스마스가 없다” 식의 가짜 뉴스를 통해 형성된 중국 이미지를 ‘중국다움’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사드 한국 배치 이후 중국이 취한 제반 조치 등으로 우리나라에선 중국 이미지가 갈수록 추락하고 있지만, 그와 무관하게 중국이 지난 수천 년간 동아시아에서 제국으로 군림해오고, 오늘날엔 미국과 더불어 국내 정치가 곧 세계 전략이 되게끔 한 그 힘을 말함이다.

가령 세계 제일의 자기 전통문화 사랑 같은 것이 대표적 예다. 대륙과 대만이 각각 서구 근대의 발명품인 사회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여 근대국가체제를 갖췄음에도 둘 다 국명의 맨 앞에는 중화를 내세웠다. 이는 중화 곧 중국 전통문화를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인식의 소산이란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그런 전통문화의 핵이 바로 글(文)이다. ‘한자가 지배한 중국’, ‘텍스트의 제국’, ‘문화 중국’ 같은 통찰이 말해주듯이 중국 전통문화, 곧 중화의 고갱이는 글이다. 글이 지난 수천 년에 걸쳐 중국다움을 만들어왔고, 지금도 21세기 첨단문명에 조응하며 중국다움을 갱신해가고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인지 중국은 글로 전통과 현재, 미래를 한데 묶어내고 있다. 이를테면 산동성 곡부(曲阜)시 도로 곳곳서 접했던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四海之內皆兄弟也”란 문구에는 공자로 대변되는 전통과 “대국굴기(大國屈起)”를 꾀하는 현재적 욕망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둘 다 ‘논어’에 실려 있고, 우리 독음으로는 “유붕자원방래불역락호, 사해지내개형제야”로 읽히고 “벗이 멀리서부터 찾아오면 즐겁지 아니한가, 온 세상은 다 형제다”란 뜻의 이 구절에는 세계를 자기 중심으로 품어내고자 하는 욕망이 담겨 있다. 세계가 다 우리 형제이니 그들이 멀리서부터 찾아오면 또한 즐거운 일 아니겠냐는 말은, 중국이 곧 세계의 중심이 될 거라는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전통 유산을 재활용한 정도의 쓸모를 지닌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중국의 꿈은 조화를 귀히 여긴다”는 뜻의 “中國夢和爲貴(중국몽화위귀)”란 구절도 마찬가지다. ‘논어’의 “예의 쓰임은 조화를 귀히 여긴다”는 뜻의 “禮之用和爲貴(예지용화위귀)”를 패러디한 이 글귀에는 ‘중국몽’, ‘화해사회(和解社會)’ 같은 현 시진핑 시대의 욕망과 지향이 듬뿍 실려 있다. 화해는 곧 조화를 뜻하기에 그렇다. 게다가 이 구절은 21세기 전환기에 들어 부쩍 강조되어 온 ‘문명사회 건설’이란 국가 시책과도 긴밀히 연동되어 있다. 원래 문장의 ‘예(禮)’가 문명화된 삶의 구체 모습이라고 계몽해왔기 때문이다.

이렇듯 도시 곳곳을 채운 글에는 전통과 현재, 미래가 한 몸이 되어 있곤 하다. 곡부시가 공자의 고향이다 보니 그렇게 됐음만은 아니다. 중국 어디를 가든 전통과 현재를 융합해놓은 문구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중국이 민족의 용광로라면, 중국의 글은 과거에서 발원되어 현재를 흘러 미래를 만들어가는 중국문화의 용광로인 셈이다. 하여 중국의 미래를 지배하는 이들은 작금의 글을 지배한다. 중국이 자국 인문 자산의 정리와 집대성, 이의 국제적 발신에 대규모 자원을 투입하는 까닭이다.

당연히 이는 중국다움의 어느 하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중국다움을 말하는 이유는 ‘중국스러움’이 아닌 중국다움을 기반으로 중국을 봐야 한다는 절심함 때문이다. ‘미국스러움’, ‘일본스러움’을 기초로 미국이나 일본을 판단하고 정책을 세우거나 사업을 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는가?

분통이 터져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건 우리가 중국보다 국력이 약하다는 사실이다. 중국을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 이유다. 사실을 기반으로 할 때 상대적 강자를 요리할 수 있는 여지가 더욱 넓게 확보되기에 그렇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로워지지 않는다”는 2,000여 년 전의 통찰은 다른 곳이 아닌 지금 여기 우리에게 더욱 절실한 지혜이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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