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엄마도 홀로 자식 키워… 영화 보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현실에선 18세 아들ㆍ15세 딸 엄마… 일보다 가족이 소중해요”
엄마는 태어날 때부터 엄마인 줄 알았다. 엄마에게도 꿈 많은 소녀 시절이 있었다는 걸 상상하지 못했다. 16일 개봉한 영화 ‘그대 이름은 장미’를 보고 극장을 나서며 오랜만에 엄마에게 안부 전화를 걸 관객이 적지 않을 듯하다. 배우 유호정(50)도 그랬다. 최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마주한 유호정은 “영화를 찍는 동안 엄마와의 추억이 떠올라 뭉클했다”며 “엄마에게 쓰는 편지 같은 영화였다”고 말했다.
‘그대 이름은 장미’는 홀로 딸을 키우는 평범한 엄마 홍장미(유호정)의 이야기다. 사춘기 딸과 티격태격하는 일상 풍경은 여느 엄마들과 다르지 않다. ‘누구의 엄마’가 아닌 오롯하게 홍장미였던 시절은 비범하다. 의류 공장 미싱사로 일하면서 가수의 꿈을 키워 1집 앨범까지 낸 1970년대 아이돌이었다. 홍장미가 가수 대신 엄마이기를 택한 사연은 예상 가능하지만, 영화는 신파의 함정을 영리하게 피해 간다. 젊은 홍장미 역할은 배우 하연수가 맡았다.
“상황만 보면 정말 파란만장하죠. 홍장미만큼 힘들게 산 사람도 없겠다 싶어요. 하지만 영화는 밝고 따뜻해요. 과거 회상 장면을 사랑스럽게 그린 덕분인 것 같아요. 다시 소녀 시절로 돌아간 듯한 설렘과 현재 삶에 대한 희망을 저 또한 느꼈어요. 힘겨운 삶에 이 영화가 작은 위로를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유호정이 자신 있게 영화를 추천하는 이유다.
스무살 무렵부터 예순을 앞둔 나이까지 홍장미의 40년 인생이 스크린 위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싱글맘으로 결코 쉽지 않았을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딸에 대한 사랑이다. 유호정은 홍장미의 인생을 얘기하다 몇 번이나 울컥했다. 그의 어머니가 꼭 홍장미 같았다고 한다. “15년 전에 돌아가신 엄마가 만약 이 영화를 보셨다면 ‘감독이 내 얘기 듣고 영화를 만들었니’라고 말씀하셨을 것 같아요. 엄마도 홀로 저와 여동생을 키우셨어요. 개봉을 하게 되니 더욱 엄마 생각이 나요. 영화를 보셨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유호정의 어머니는 딸에게 엄했다. 아빠가 없어 버릇없다는 얘기를 들을까 봐 애정 표현도 아꼈다고 한다. “‘우리 딸 예쁘다’는 소리를 한 번도 못 들어 봤어요. 그땐 가슴에 맺힐 만큼 속상하고 서럽더라고요. 결혼 후 제가 애교가 없는 건 엄마 탓이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하기도 했죠.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아요. 그게 엄마 식의 사랑이었다는 걸.” 그래서 유호정은 “홍장미를 더욱 꼿꼿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영화를 보면 ‘나는 부모님에게 어떤 딸, 아들이었을까’를 한번쯤 돌아보게 된다. 유호정도 잠시 시간을 되감았다. 그는 어머니에게 반항 한 번 하지 않은 딸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밤 9시 통금 시간을 어긴 적 없을 만큼 반듯했다. 맏언니답게 본보기가 돼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그 책임감이 너무 커서 때론 그를 짓눌렀고 조금은 우울했다. 성격도 내성적이었다. 그는 “남 앞에 나서는 걸 두려워하고 그렇게나 소극적었던 내가 배우가 됐다는 게 신기하다”고 했다.
유호정은 우연한 기회에 CF 모델로 데뷔해 1991년 MBC 드라마 ‘고개 숙인 남자’로 연기를 시작했다. 두 번째 드라마를 끝낸 무렵엔 일을 그만두려고 했다. “선배님들께 인사 안 한다고 많이 혼나기도 했어요. 너무나 유명한 배우들인데 신인인 나를 아실까, 내가 아는 척하면 오히려 불편해하시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내성적이었죠. 카메라 앞에서 감정을 표현해야 하고 몇 개월씩 여러 사람과 공동 작업을 하는 과정이 힘들더라고요. 배우를 꿈꾸며 도전하는 사람들의 자리를 제가 빼앗는 것 같았어요.”
1992년 KBS 드라마 ‘옛날의 금잔디’에서 만난 남편 이재룡이 ‘마지막으로 한 번만 해 보라’며 드라마 PD를 소개했다. 당시 최고 인기 청춘드라마인 MBC ‘우리들의 천국’이다. “연기를 못해도 너무 못한다는 생각에 무척 속상했어요. 그 상태에서 촬영을 시작했는데 울컥하는 감정이 확 올라오더군요. 친구와 울면서 이야기하는 표현이 잘 되는 거예요. 처음으로 희열을 느꼈죠. 연기를 좀더 열심히 해 보고 싶어졌어요.”
젊은 시절 단아한 이미지로 큰 인기를 끌었지만 유호정은 “단 한번도 스타라 생각한 적이 없다”고 했다. ‘책받침 여신’이라는 얘기에도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는 “최고가 아니어도 된다고 늘 생각했다”며 “그래서 지치지 않고 지금까지 연기를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어느덧 배우 인생 28년이 됐다. 유호정은 일을 더없이 소중하게 여기지만 일과 가족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할 때는 주저하지 않고 가족을 택하는 사람이다. ‘그대 이름은 장미’ 이전에도 한동안 열여덟 살 아들과 열다섯 살 딸의 엄마로 지냈다. 연기 활동은 2015년 SBS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 이후 4년 만, 영화는 2011년 ‘써니’ 이후 8년 만이다. “쉰 살 여자배우가 영화의 주인공을 맡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영화 개봉하면서 깨달았어요. 부담감도 느껴요. 제가 여성 배우를 대표하지는 못하지만, 영화를 함께 만들 분들에겐 보람을 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앞으로도 더 다양한 기회가 열리지 않을까요.”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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