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 걱정이요? 그보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걸 해보는 게 먼저죠. 지금 아니면 못할 테니까요. 나를 위한 투자라 전혀 아깝지 않아요.”
인천 송도에 사는 권나우(25)씨는 화장품을 사는데 한 달에만 150만~200만원을 쓴다. 좋아하는 브랜드 제품을 쓰지 않으면 얼굴이 칙칙해 보이고 피부에 맞지 않는다는 걸 금방 느낀다. 영국 유학 생활을 하는 동안 화장품 구입을 위해 면세점을 자주 이용한 덕분에 회원등급이 ‘슈퍼 프리미엄’이다. 전체 회원 중 상위 8%에 든다.
권씨는 화장품을 그저 쓰기만 하는 건 아니다. 직접 사용해본 후기나 메이크업 과정을 촬영한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리기 시작한 지 1년이 됐다. 영국 맨체스터대에서 패션마케팅을 전공한 그의 생생한 후기와 영상에 또래 젊은이들은 크게 호응했다. 덕분에 권씨는 지난해 9월 신라인터넷면세점의 ‘신라팁핑 크리에이터’로 선정됐다. 권씨가 면세점 모바일 응용프로그램(앱)에 상품평을 자유롭게 올리면, 이를 보고 고객이 상품을 구매할 경우 해당 매출의 일부를 수익으로 보상받는다. 물론 화장품 지출액이 수익보다 클 때가 많지만, 권씨는 개의치 않는다. “아버지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돈 잡아먹는 귀신’이라지만, 적금 부으며 무작정 돈을 모으기보다 나만의 재미와 행복을 찾는 데 쓰고 싶다”고 권씨는 말했다.
유통업계는 앞다퉈 권씨 같은 젊은 ‘큰 손’들 ‘모시기’에 나서고 있다. 수입보다 큰 지출은 엄두도 못 냈던 과거 세대와 달리 자신을 위한 소비에 아낌이 없는 2030 세대가 결국 ‘미래의 VIP’로 성장할 거란 예상에서다. 실제로 신라면세점에선 2014년 58%에 머물렀던 20, 30대 고객 비중이 지난해 75%로 증가했다. 신라인터넷면세점은 권씨 같은 신라팁핑 크리에이터를 최근 500명까지 늘렸다. 그 중 87% 이상이 20대다. 이들의 소비가 면세점 이용객들의 소비를 증대시키는 데 적잖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신라면세점 측은 판단하고 있다.
면세점뿐 아니라 백화점에서도 젊은 소비층의 영향력은 빠르게 커지고 있다. 신세계백화점은 5단계였던 VIP 등급에 2017년부터 ‘레드’를 추가해 6단계로 확대하며 VIP 진입 장벽을 낮췄다. 기성세대와 비교해 구매력이 아직은 높지 않지만, 미래의 VIP 고객이 될 수 있는 20, 30대를 끌어 모으기 위해 기존 등급보다 낮은 기준을 적용해 VIP 레드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기준 레드 등급 고객 가운데 20, 30대 비중은 65%에 달한다. 이성환 신세계백화점 영업전략담당은 “2030 고객 선점은 현재와 미래의 매출 모두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젊은 ‘큰 손’들의 거침 없는 소비를 ‘지름신 강림’으로만 치부하면 오산이다. 이들은 소비에서 자신의 미래를 찾는다. 서울 청담동의 패션회사에 다니는 김재훈(28∙가명)씨는 유행을 선도하는 유명 디자이너들의 이른바 ‘하이패션’ 제품을 구매하는 데 연봉의 약 70%를 쓴다. 지난 연말엔 코트를 100만원, 시계를 300만원에 구매했다. 김씨는 “하이패션 업계의 패션 트렌드가 백화점 등 고급 브랜드로 내려오고, 이후 아웃렛이나 보세 브랜드에서 소비되는 식으로 의류 시장이 형성된다”며 “누군가는 ‘된장남’이라고 비난할 지 모르지만, 패션업계에서 일하는 만큼 무리해서라도 ‘오리지널 패션’을 소비하며 감각을 인정받고 싶다”고 말했다. 하이패션 제품이라도 할인 기간이나 해외 직구 등을 통하면 조금이라도 싸게 구입할 수 있다. 이런 경로를 찾는 게 김씨의 일상이다. 김씨는 이런 자신의 소비를 “계획사치”라고 소개했다.
권씨 역시 화장품을 소비하며 자신만의 꿈을 만들어가고 있다. 집 근처 오피스텔에 별도로 화장품을 보관하고, 동영상 촬영을 할 수 있는 작업실까지 만든 권씨는 “당분간 직장을 얻기보단 지금 같은 생활에 집중할 예정”이라며 “지금의 경험을 바탕으로 언젠가는 나만의 화장품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다국적제약사에서 일하는 손종진(28)씨는 월급의 상당 부분을 음악 관련 장비들에 투자한다. 기타와 건반 같은 악기는 물론, 스피커와 녹음 장비까지 구입한다. 최근엔 마음에 드는 소리가 나는 기타를 발견해 60만원에 샀다. 틈틈이 곡을 쓰고 직접 불러 녹음해 음반도 제작한다. 물론 현재 업무와는 전혀 관련이 없지만, 손씨에게 이런 소비는 “나를 위한 투자”다.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 부르는 게 가장 좋아하는 취미”라는 그는 “취미 생활이라도 한 분야 경험이 꾸준히 쌓이면 언젠가는 밥벌이도 될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다.
유통업계에서는 스트레스 해소와 함께 제2의 직업까지 꿈꾸는 손씨 같은 젊은이들을 붙잡기 위해 전문점 마케팅이 한창이다. 지난해 11월 문을 연 일렉트로마트 서울 논현점은 개점 이후 한 달간 전체 방문객의 70%가 20, 30대였다. 일렉트로마트는 이마트가 운영하는 체험형 전자제품 전문점이다. 이마트 논현점 관계자는 “20, 30대 젊은이들이 100만원대 고가의 전자장비를 사가는 경우를 종종 목격할 수 있다”며 “이들이 주로 구매하는 트렌디한 디지털기기나 생활가전이 매출을 견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꿈이나 직업과 별개로 “지금 아니면 언제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젊은 층의 소비 욕구를 자극한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취업을 준비 중인 심기문(25)씨는 매년 초 혼자 해외여행을 떠난다. 지난해엔 700만원을 들여 남아메리카 5개국을 돌았고, 올해는 곧 유럽으로 떠나려고 300만원을 준비했다. 식비와 교통비 등을 뺀 몇 달치 아르바이트 수입을 고스란히 여행에 투자하는 것이다. 심씨는 “목돈은 나중에라도 모을 수 있지만, 자유로운 여행은 지금 아니면 어려울 것 같다”며 “여행에서 남긴 글과 사진으로 지금의 나 자신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고 말했다.
기성세대가 소비를 억제했던 주된 이유인 ‘내 집 마련’이나 ‘결혼자금 준비’는 지금의 2030 세대에겐 “너무 크고 막연한 숙제”가 됐다. 그 숙제에 매달리기보다 ‘지금의 나’에 충실하기 위해 적극적인 소비에 나서는 것이다. 김재훈씨는 “부모님은 젊어서 쓰는 거 다 부질 없고 나이 먹은 뒤 잘 사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데, 막상 부모님 삶을 보면 소비의 즐거움을 유예시킨다고 해서 중장년 때 즐길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것 같다”며 “내 소비의 기준은 ‘내가 갖고 싶은 걸 즐겁게 갖는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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