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23> 원로 학자 한완상
“내가 먼저 실천하는 선제적 사랑 통해 이 땅에 평화를”
한완상(83) 전 부총리가 ‘3분 교도관’을 한 일이 있다. 0.7평(2.3㎡) 옥중 신세였던 그를 부러워한 교도관 때문이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서울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돼 있을 때다. “감옥에서 뭐가 행복하다고 늘 흥얼거리시냐”던 교도관은 어느 날 급기야 “잠깐만 나와보시라”고까지 했다. 창살 안엔 간수가 앉아 있고, 그 밖에선 죄수가 보초를 서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졌다. 마음 졸인 한 전 부총리가 ‘누가 오는 것 같다’고 거짓말을 하고서야 이 역대급 역할 바꾸기는 끝이 났다.
그게 궁금했다. 자유를 속박 당하고 양심을 부정 당한 옥살이를 하면서도 그는 어떻게 행복할 수 있었을까. 그 모습이 얼마나 좋아 보였으면 나이 서른도 안 된 교도관이 영어의 처지가 돼볼 생각까지 했을까.
“행복은 꿈을 가진 사람에게 있는 거니까요.”
그는 별스런 일이 아니라는 듯 웃었다. 남산 지하 취조실(당시 중앙정보부 조사실)에서 두 달간 고초를 당할지언정, 끝내 양심을 지켜 얻은 진정한 자유요, 행복이었다. 행복은 ‘지금, 여기’에 있다는 삶의 선물 같은 진실을 한 전 부총리는 알고 있었던 거다.
그렇게 평생 간직했던 꿈은 그러면 무엇인가. 그는 다섯 글자로 말했다. ‘선제적 사랑’, 즉 내가 먼저 실천하는 사랑이다. 그것은 적극적 평화를 이루는 방법이기도 하다. 종교와 신념, 철학이 융합된 개념이었다. 100년 전 일제의 폭압에 만세운동으로 맞선 3ㆍ1정신도, 대통령의 국정농단에 비폭력 시위로 맞선 2016년의 촛불혁명도, 결국 본질은 선제적 사랑의 구현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그의 오랜 소망도 성큼, 눈 앞에 다가왔다.
“선제적 사랑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를 이룩하는 것이 내 궁극적 희망이죠. 작년 한 해 동안 남북 간에 상전벽해의 변화가 있었으니 머지 않았어요.”
1945년 8월 15일을 광복의 날이 아닌 ‘분단의 날’로 명명하는 한 전 부총리에게 하나 되는 남과 북은 곧 3ㆍ1정신의 되살림이다. 문재인 정부가 청산해야 할 제일의 적폐로 73년 여 간 쌓인 ‘분단 적폐’를 꼽는 것도 그래서다.
“분단으로 먹고 살아온 세력, 평화가 오지 않아야 기득권을 유지하는 세력이 정치권에도 민간에도 있다는 사실이 저를 가장 분노하게 하죠. 제야의 종 타종 때도 이런 소원을 빌었어요. ‘평화여, 오라. 평화가 올 때는 다른 정신으로 오지 말고 오롯이 3ㆍ1정신으로 오라. 그래서 마침내 통일이여 오라’고.”
문재인 대통령이 그에게 맡긴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옷이 알맞게 느껴졌다.
◇3ㆍ1운동의 정신, ‘촛불혁명’으로 이어지다
-문재인 정부는 ‘이게 나라냐’는 분노의 촛불로 탄생했으니 답을 제시해야 할 사명이 있죠. 3ㆍ1운동 역시 그 나라를 지키려는 저항의 정신으로 일어난 움직임이고요.
“맞아요. 이 정부가 출범하게 된 동기는 2년 전 연인원 1,700만 명이 한겨울에 들었던 촛불의 힘이에요. 당시를 기준으로 하면 97, 98년 전 3ㆍ1정신의 부활이죠. 나는 촛불 광장의 거리에서 이걸 가슴으로 느꼈어요.”
-3ㆍ1정신을 뭐라고 보시나요?
“비폭력과 평화지요. 촛불시위 현장에서 나타난 정신과 100년 전 33인의 독립선언의 본질은 아주 유사해요. 무단통치를 했던 일본 제국주의의 강권 폭압에 우리 민족과 민중은 비폭력과 평화적인 방식으로 대항을 했어요. 그저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을 뿐이죠.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그런 적극적인 평화정신이 3ㆍ1정신의 핵이에요. 그 비폭력적인 저항이 개별적으로 일어난 게 아니라, 3, 4개월 간 전국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났어요. 참여한 (연)인원이 220만 명에 달했어요. 당시 (우리나라) 인구가 1,700만 명이었는데. 인류 역사상 보기 힘든 사례죠. 내 개인이나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을 위한 공공성 때문에 감동과 울림을 준 것이고 그게 파장이 되어 변혁을 일으킨 거예요.”
-그 3ㆍ1정신의 핵을 2년 전 촛불광장에서 느끼신 거군요.
“그간 틈틈이 이어진 변혁적 저항이 폭발한 것이 ‘촛불 명예시민혁명’이라고 생각해요. 2016년 늦가을에 광화문에서 시작돼 이듬해 봄까지 전국으로 번진 촛불시위가 왜 100년 전 3ㆍ1운동의 연속이냐. 그걸 확인한 계기가 있어요. 촛불시위 초기에 (청와대 인근) 효자동 쪽은 경찰이 차벽(경찰버스로 만든 방어벽)으로 막아뒀거든요. 그러니까 일부 과격한 남성들이 차벽 위로 올라가서 ‘청와대로 가자’고 외쳤죠. 그러자 주위에 있던 소녀들이 ‘내려와, 내려와’를 제창하더군요. 이게 퍼져서 주위의 젊은 여성들이 또 ‘비폭력, 비폭력’을 외치더라고요. 결국 남성들이 스르르 내려왔어요. ‘아, 이게 3ㆍ1운동의 재현이로구나’ 싶었죠.”
-당시 마음이 어떠셨어요.
“아주, 짜릿했죠. 그런데 당시 언론이나 학계에서 이 촛불이 98년 전 우리 땅에서 일어났던 그 민족적 비폭력 저항운동의 재현이라고 평가하는 데가 없더라고. 더구나 촛불시위가 6개월 가까이 이어졌는데 그렇게 질서정연할 수 없었죠. 서구를 넘어선 수준이에요. 마그나카르타(대헌장)로 의회민주주의를 심었던 영국은 축구에서 지면 폭동을 일으키는데. 촛불시위에 영웅도 없었죠. 마이크를 잡은 이가 신호를 주면 수십만 명이 촛불을 탁 껐다가, 다시 일제히 켜는 광경이 어떻게 가능한가요? 이건 전체주의 국가에서 훈련 받은 국민 만이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싶더라고요. (웃음) 그뿐인가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인근의 상가들은 시위에 참여하는 시민에게 화장실을 쓰게 했죠. 광장에는 지역, 세대, 이념, 성별의 장벽도 없었어요. 그 뜨거운 시민 정신에 눈물이 났어요.”
-3ㆍ1정신이 어떻게 이어진 걸까요.
“우리 DNA 안에 있는 거죠. 3ㆍ1운동이라는 위대한 경험이 내재돼있다가 촛불 명예 시민혁명으로 폭발한 거예요!”
-촛불민심의 본질은 묵은 질서의 청산일 거예요. 그런 점에서 문재인 정부의 역사적 사명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분단의 극복입니다. 왜냐. 그간 우리나라는 분단을 통해 이득을 얻는 세력이 지배 세력이 돼왔어요. 이승만부터 박근혜까지. 중간에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분단 냉전 세력의 옥죔으로부터 자유로운 적이 없었죠. 그 세 분의 대통령도 분단의 극복이란 과제 앞에서 좌절하고 말았으니까요. 이제 문재인 정부로 그 역사적 사명이 이월된 겁니다. 문 대통령도 그걸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굉장히 힘들 것이고, 그 중압감으로 번민할 거예요.”
◇청산해야 할 제일의 적폐는 분단
-다행히 지난해 남북 정상회담이 연달아 있었죠.
“평창 동계올림픽부터 오늘까지 이룩한 상전벽해 같은 변화는 결국 문 대통령의 강한 의지 덕분인 걸 알죠. 그걸 가장 드라마틱하게 느낀 게 (지난해) 9월 19일이에요. 문 대통령이 능라도 5ㆍ1 경기장에서 15만 평양 시민 앞에서 연설을 할 때죠.”
-평양 정상회담 때 특별수행원으로 동행하셨죠. 직접 들으셨겠군요.
“처음에는 조마조마했어요. 문 대통령이 그랬잖아요. ‘우리는 5,000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살았다. 지난 70년 적대를 완전히 청산하고 다시 하나가 되자. 백두에서 한라까지 영구히 핵 위협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자.’ 사실 평양 시민이 이 연설에 어떻게 반응할 지 걱정이 되더라고요. 노골적으로 비판하거나 욕설은 못할 거고 냉혹한 무반응으로 일관하지 않을까 싶었죠. 그런데 1초쯤 지났을까,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 이게 꿈입니까. 생시입니까’ 했어요. 나같이 북한을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상상하기 어려운 평화 제의의 연설을 서로를 악마화 해온 지 73년 된 시민 앞에서 했는데 박수가 나오다니. 꿈이라면 현실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한 전 부총리의 감격은 남달랐을 법 하다. 그는 그 유명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는 취임사 초안을 썼다. 또 김영삼 정부에서 통일원 부총리를 하면서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씨의 북송을 성사시켰다. 이 일로 당시 여당의 보수파 의원들에게 공세를 당했다.
“능라도 경기장에서의 감동은 (정부에서) 통일 업무를 책임졌던 사람으로서 겪었던 아픔과 상처가 치유되는 듯한 기쁨이었죠. 그런데 이윽고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만약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서울의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비슷한 연설을 했다면? ‘태극기부대’의 반응은 아마도 대다수 시민의 박수에 묻히겠지만, 어쨌든 일부 태극기부대처럼 분단으로 먹고 사는 세력이 존재하니까요. 분단을 극복하는 데 장애는 양쪽에 다 있지만 어쩌면 우리가 더 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죠. 문 대통령을 정략적 혹은 정파 이익의 차원에서 집요하게 반대하는 세력이 있으니까. 다원주의의 장점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냉전 근본주의 현상이고 반평화의 흐름이라서 참 슬프죠. 그래도 그때 능라도 경기장에서 문 대통령이 받았던 박수가 공명이 돼서 변혁을 일으킬 것이라는 확신을 또 한 번 가져봐요.”
-분단의 극복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무척 복잡한 일이죠.
“분단을 악용해 정치적인 이득을 본 사람들은 다시 말하면 우리 사회에서 민주화를 지연 시킨 세력이죠. 사회 정의를 짓밟은 사람들이고, 생존권적 기본권인 노동3권, 언론ㆍ학문ㆍ사상의 자유를 능멸한 사람들이에요. 그러니 분단의 극복은 민주화와 복지 그리고 평화와 민족통일의 문 열기로 이어져야 하죠. 이게 바로 나라다운 나라로 가는 길이에요. 우리 위원회가 만들어진 이유도 단순히 100년 전 일어난 사건을 회상하자는 게 아니라 3ㆍ1운동과 임시망명정부의 정신이 현실의 난관인 분단을 극복하는 의지로 연결되게 하기 위해서죠. 나아가 보다 평화롭고 정의롭고 공평하고 자유로운 민주사회로 이어지도록.”
-남북 지도자 간의 신뢰는 공고하다고 느끼셨나요?
“4ㆍ27 남북 정상회담 때 김 위원장이 북한의 도로 사정이 좋지 않으니 문 대통령이 평양에 갈 때는 항공편을 이용하라고 권한 적이 있었죠. 그 말을 듣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자기 체제의 미비한 점을 드러낸 거 아니에요? 9월 평양 정상회담에서는 더 놀라운 광경을 봤죠. 만찬 때 우리 측 인사가 김 위원장에게 만약 서울 답방을 하면 대부분의 시민은 환영하겠지만 일부는 불편해 할 거라는 얘기를 했어요. 그렀더니 김 위원장이 ‘내가 아직 서울시민에게서 환영 받을 만한 일을 못했으니 이해한다’는 식으로 답을 하더군요.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최고 지도자가 그런 말은 하기가 쉽지 않죠. 그 정도로 두 정상 사이에 신뢰가 두텁다고 생각했어요.”
한 전 부총리는 재미있는 일화를 하나 더 소개했다. 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와 김 위원장 부인 리설주 여사에 얽힌 것이다. 평양 정상회담 만찬 때 좌중의 권유로 김 여사가 ‘동무생각’을 부르자, 리 여사에게도 주변에서 답가 요청이 잇달았다. “리 여사도 무대로 나오라는 권유가 끈질겼는데, 리 여사가 지혜롭게 넘기더군요. ‘서울에 가게 되면 하겠다’고요.”
-그런 분위기를 볼 때 민족보다 우선하는 동맹은 없다는 말이 현실이 될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그렇죠. (평양 정상회담 수행 때) 김정은 위원장한테도 내가 그 얘기를 했어요. 서울에 와서 보니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사진으로도 보도됐던데. 김 위원장에게 내가 ‘우리 역대 지도자 중 한 분이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는 없다는 취임사를 한 적이 있는데 혹시 아느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김 위원장이 가장 존경하는 할아버지인 김일성 주석이 그 얘기를 듣고 (당시 통일 부총리였던) 나한테 어느 인사를 통해서 크게 감동했다는 뜻을 전한 적이 있다’고 말해줬죠. 그리고는 ‘그게 벌써 20여 년 전 일인데 오늘 남북 정상의 평양선언으로 그 말이 이뤄질 길이 열렸다’고 하니 김 위원장이 활짝 웃더군요.”
-문재인 정부가 남북관계에서는 큰 진전을 만들었지만, 경제문제 때문에 위기예요.
“경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려면 장구한 시간이 필요해요. 세계 모든 나라가 현재 경제적으로 어렵기 때문이죠. 경제도 사실 불평등이 있어야 기득권을 유지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정치의 문제이기도 하고요. 남북의 경제공동체가 우리 경제 위기를 해결하는 물꼬를 틀 수 있어요. 북한이 남한에 비해 월등히 자원이 많기 때문이죠. 또 노동력의 질도 좋고요. 이제는 한강의 기적이 아니라 한강과 대동강 동시 기적을 이룰 수 있어요.”
◇‘감방 안이 그렇게 행복해요?’ 교도관의 부러움
한 전 부총리의 말소리가 건조해지기 시작했다. 연말연초 잇단 대외 행사에 전날까지 2박 3일 지방출장을 다녀왔다고 하니 피곤할 법했다. 그의 입에서 “마지막으로 이것만 얘기하면…”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런데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회고록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에 짤막하게 소개된 교도관과의 일화다. ‘민중사회학’으로 유명한 한 전 부총리는 서울대 문리대 교수로 재직할 때 민주화운동으로 두 번 해직되고 세 번 임용된 특별한 이력을 지녔다. 그 중 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돼있을 때의 일인데 더 자세한 사연과 후일담이 궁금했다. 그 말을 꺼내자 한 전 부총리의 눈빛이 다시 밝아졌다.
“그이가 그때 나한테 주례를 부탁했었어요. 그래서 내가 (형 집행정지로) 풀려난 뒤에 두어 번 연락이 왔는데 갑자기 연락이 끊겨서 궁금했죠. 십여 년이 지나서 KBS의 ‘TV는 사랑을 싣고’란 프로그램에서 출연 제의가 와서 그 사람 얘기를 했죠. 이름은 모르나 성씨만 기억한다고. 그 프로에서 그를 찾아줘서 스튜디오에서 재회를 했어요. 왜 연락을 안 했느냐고 물으니까, 통화한 게 도청이 돼서 교도관 일을 그만 두게 됐다고 하더군요. 그 뒤에 생계 때문에 고생 하다가 경찰시험을 쳐서 경찰관이 됐다고요. 어린이 날 만났는데, 아이가 둘이라기에 내 출연료를 아이들 선물로 줬죠.”
-아니, 옥살이를 어떻게 하셨기에 교도관이 부러워 보인다고 감옥에 들어가 보기까지 한 건가요?
“그때 내가 늘 하던 일이 있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기도한 뒤에 찬송을 하고 성경을 읽고 그 다음에 전문서적이나 소설, 만화도 봤죠. 그런 일들을 하면서 늘 웃고 있으니까 그 교도관이 그러더라고요. ‘아이고, 선생님. 감옥 와서 뭐 행복하다고 그렇게 늘 웃으시냐’고. 그래서 내가 ‘왜요, 부러워요?’ 하니까, 그가 그래요. ‘솔직히 부럽다’고. 내가 ‘자네는 나이도 젊어 앞날이 창창한데 죄수로 갇힌 내가 뭐 부러우냐’고 했더니, 또 그래요. ‘선생님은 희망이 있잖아요.’ 교도관한테 무슨 희망이 있겠느냐는 거죠.”
철창을 사이에 둔 인생상담이 이어졌다. 교제하는 여성에게 직업을 얘기하기조차 부끄럽다는 그의 신세 한탄에 한 전 총리가 조언을 했다. ‘공무원이라고 해라. 거짓말 아니지 않느냐. 무슨 공무원이냐고 물으면 법무부에 있다고 해라. 그것도 맞는 말 아니냐. 더 시간이 지나 무슨 과냐고 또 물으면 교정과에 있다고 해라. 내 결점까지 사랑하는 단계가 됐다고 생각할 때 얘기해라. 교도관이라는 것 때문에 당신을 버린다면, 그는 당신을 사랑한 것이 아니다.’
하루는 그 교도관이 일을 벌였다. 갑자기 감방 문을 열고 들어오더란 것이다. “선생님 자리에 한 번 앉아보고 싶어서요. 누가 오는지 (감방) 밖에서 살펴봐주세요.” 졸지에 처지가 뒤바뀌었다. 옥에 들어간 그는 한 전 부총리가 보던 책들을 들추거나 그가 찬송을 부를 때 모습을 흉내 내기도 했다. 한 전 부총리가 오히려 불안했다. 결국 ‘누가 오는 것 같다’는 거짓말로 상황을 종료시켰다.
-진짜 행복하셨어요? 어떻게 감옥에서 행복할 수 있나요?
“몸은 0.7평에 갇혀있지만, 내 양심과 자유와 희망은 빼앗아 갈 수 없는 거니까요. 양심수가 가진 일종의 특권이죠.”
-행복이 어디에 있기에 그런가요.
“행복은 꿈, 희망을 가진 사람에게 있는 거죠.”
-희망이 무엇인가요?
“선제적 사랑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를 이룩하는 것이 내 궁극적 희망이지. 그 희망이야 감옥 가서 생겼겠나. 옛날부터 갖고 있는 소망이죠. 그게 나이가 들수록 더 분명해지는 거고요.”
-그러면 지금도 그 희망이 있어 행복하신가요?
“아, 물론이죠! 그게 내 삶을 관통하는 희망이고 행복이에요.”
그러더니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행복이란 건 객관적인 조건에 있는 게 아니에요. 그건 조건이 행복한 거지, 사람이 행복한 게 아니에요. 열악한 조건에서도 이겨내고 새로운 걸 만들어낼 수 있는 희망과 용기가 있을 때 기쁜 것이죠.”
◇전두환도 용서할 수 있다, 다만…
-지금까지 지켜온 삶의 도가 있다면, 뭘까요?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역사적인 예수 그러니까 갈릴리 지역에 살았던 실물 예수, 그리고 부활의 예수를 신앙으로 믿죠. 역사적 예수나 부활의 예수가 공통적으로 강조한 것은 샬롬, 평화예요. 그건 전쟁 없음의 소극적 평화가 아니라 인간의 기본권이 신장되고, 인간이 억울한 고통을 받지 않게 되고, 억울한 고통을 받은 사람은 온전하게 치유되는 세상이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평화가 이슬비처럼 내리는 새 하늘이고 새 땅. 이걸 이루는 방법은 ‘이웃 사랑’이 아니라 ‘원수 사랑’이에요. 나와 비슷한 이웃, 같은 고향, 같은 학교 출신을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한국 교회는 원수 사랑이 아니라 이웃 사랑만 얘기하죠. 왜? 쉬우니까. 그러면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이 뭐냐. 내 삶의 지침인데, 내가 그렇게 못 살아봤기 때문에… 선제적 사랑이에요. ‘선제적’이라는 단어는 전쟁할 때 많이 쓰죠. 선제 타격, 선제 공격. 그런데 선제적으로 원수를 사랑해야 평화가 와요. 남북 문제도 그렇죠. 악을 이기는 건 무력이 아니라 선이에요. 원수 간에는 발악(發惡)을 통해 공멸로 가죠. 발악의 반대가 우리 말에는 없는데 말하자면 발선(發善)이죠. 발선이 평화를 만드는 동력이에요. 그래서 북한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오늘까지 살아왔어요.”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원수 사랑이 선제적 사랑이라면, 우리는 청산 대상이자 적폐의 원흉이 된 전직 대통령들도 용서해야 하는가.
“부장판사들 대상으로 강연을 한 적이 있는데, 한 분이 묻더군요. ‘전두환씨도 용서하시느냐’고. 내가 그랬죠. 용서하고 싶어 몸살이 날 지경이라고. 그런데 용서할 수 있는 계기가 없다고. 진정으로 자기의 잘못을 진솔하게 인정하고 사과하면 용서해야죠. 그런데 한 번도 사과한 적이 없잖아요? 심지어 그건 내 개인에게 지은 죄가 아니라 국민에게 지은 죄예요. 그가 저지른 역사적인 악을 정당화 할 수는 없는 거예요. 피해자들에게 진솔하게 고백하고,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나는 내일이라도 점심 식사 대접을 할 거예요.”
그러더니 그는 선제적으로 말했다. “아이고, 이제 나를 해방시켜주세요.” 붙잡을 도리가 없었다.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