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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회 칼럼] 인문(文)이 주도하는 정치

입력
2019.01.08 04:4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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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과 허목은 각각 노론과 남인의 영수였다. 워낙 정치적으로 첨예하게 부딪혔던지라 둘 사이의 관계가 좋을 리는 없었다. 다음은 그런 둘 사이에 있었던 제법 널리 알려져 있는 일화다.

송시열은 평소 속병으로 고생했다. 그러던 차에 하루는 아들을 허목에게 보내 처방을 받아오도록 했다. 그 처방전에는 주지하듯 비상이란 독약이 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송시열은 그 처방대로 약을 지어 먹었고,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속병이 나았다. 정적을 숙청하면 몇 명 정도는 사약을 받고 많게는 수십 명씩 귀양에 처해지던 시절, 정치적 이해를 초월해 이뤄졌던 우정의 전범으로 운위되어온 미담이다. 그런데 이 미담에서 읽어낼 바가 참된 우정 정도일까?

이들의 일화를 그릇이 컸던 인물들의 통 큰 우정으로만 보면, 이 얘기는 일상에선 일어나기 힘든, 그래서 인구에 회자될 수 있었던 신기한 얘기 정도로 여겨진다. 큰 인물 사이에서나 있을 법한 얘기로, 나와는 별 관계없는 얘기로 치부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화 속 일이 정말 일상적으로 일어나기 힘든 그러한 희한한 일이었을까?

물론 일상에서는 잘 일어나지 않는 일이기에 미담이 됐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런 물음을 한번쯤은 던져봄직하다. 치열하게 대립하던 둘 사이에 독약 처방을 믿고 따를 정도로 우정이 형성됐다면, 무엇을 토대로 그런 깊은 우정이 형성되었을까 하는 물음말이다. 동향도 아니고 동문수학한 것도 아니며 정치적으론 대립관계였음에도 깊은 우정을 지녔으니, 어디로부터 그러한 큰 믿음이 비롯된 것인지 사뭇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다른 일화를 하나 더 보자. 공자와 제자 사이에 있었던 일이다. 공자가 위나라에 머물렀을 때 제후가 그를 중용하고자 했다. 이 소식을 접한 염유는 스승이 과연 명분 없이 군주 자리에 오른 위나라 제후 밑에서 정사를 맡을지가 궁금해졌다. 마침 자공이 있기에 그의 생각을 물었다. 자공은 스승께 직접 여쭤보겠다며 공자를 뵀다. 그러고는 대뜸 여쭸다. “백이와 숙제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공자가 답했다 “옛적 현자들이다.” 자공이 재차 여쭈었다. “원망했던 것이지요?” 공자가 일렀다. “어짊을 추구하여 어짊을 체득했으니 무얼 또 원망했겠는가?” 이에 자공은 물러나와 염유에게 말했다. 스승께서는 위나라 정사를 맡지 않으실 것이라고.

그야말로 선문답이다. 알고 싶은 바는 위나라에서 정치할 의향이 있는지 여부인데, 물어본 건 백이와 숙제란 인물에 대한 평가였다. 그러고도 자공은 염유에게 스승께선 위나라에서 출사하지 않으신다고 확답한다. 실제 역사에서도 공자는 위나라의 정사를 맡지 않았다. 대체 자공은 그런 물음으로 어떻게 공자의 의중을 정확하게 꿰뚫을 수 있었을까.

힌트는 백이, 숙제다. 그들은 역성혁명으로 세상이 아무리 나아진다고 해도, 신하로서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는 신념을 죽음으로 지킨 이들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을 자신의 깨끗함을 지키고자 세상을 돌아보지 않은 고집 센 이들로 평가했다. 백이 형제에겐 현실의 개선보다는 명분의 수호가 더 큰 가치였다. 그런 이들을 공자가 현자라고 높이 평가했으니, 자공은 명분 없는 정권에 출사하지 않으리라는 공자의 뜻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공자와 자공의 대화는 선문답이 아니라 백이와 숙제라는 인물에 대한 지식을 스승과 제자가 공유했기에 가능했던 지적인 대화였음이다.

이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싶을 수도 있다. 그런데 백이, 숙제는 공자보다 500년가량 앞선 시대의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공자와 제자들은 그들에 대한 평가를 공유하고 있었고, 사제지간의 일상적 대화에서 거리낌 없이 그들을 활용했다. 지금 우리 사회서, 아니 대학에서 선생과 학생 사이에 500년쯤 앞선 시대 인물의 평가를 기본으로 공유하며 일상대화에서 어떤 주저함도 없이 활용함이 과연 가능할지, 마냥 회의적이다. 옛날이 지금보다 문명의 이기가 훨씬 못했다고 하여 사회의 인문적 수준까지도 그러하지는 않았음이다.

아니, 적어도 통치계층의 인문적 수준은 지금보다 한층 높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 송시열과 허목의 미담도 가능할 수 있었다. 둘 사이에는 언뜻 교집합이 없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매우 단단한 공통의 지반이 있었다. 성리학이 그것이었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였다. 그렇기에 성리학은 조선의 인문 자체였다. 정치적 이해를 달리했어도 그들 모두는 성리학이라는 인문 위에 서 있었다. 인문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허목은 비상을 처방하고 송시열은 이를 따를 수 있었음이다.

인문은 이렇게 정치적 이해에 앞서 있는, 어떤 정파라도 공유하고 있어야 하는 공통의 지반이다. 이것이 없으면 작금의 우리 사회에서 보이듯이 선거 승리에만 눈이 멀어 온갖 거짓과 강짜, 몰상식과 부도덕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게 된다. 정치인이나 관료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민주사회의 통치계층 곧 주권자는 시민이다. 인문이 정치의 기반으로 작동되지 않으면 시민사회 또한 정치판과 매일반일 수 있다는 얘기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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