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간 ‘레이더 조사(照射ㆍ조준해 쏨)’ 논란이 가열되는 가운데 일본 정부의 영상 공개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결정에 따른 것이라고 일본 언론들이 29일 보도했다. 방위성 측이 영상 공개와 관련해 “한국의 반발만 가져올 뿐”이라는 신중한 입장을 취했으나 아베 총리의 한 마디에 방침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과 위안부 관련 화해ㆍ치유재단 해산 등으로 냉각된 한일관계를 국내 여론 단속용으로 활용하려는 의도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산케이(産經)신문 보도에 따르면 아베 총리는 지난 27일 이와야 다케시(岩屋毅) 방위장관을 총리관저에 비공식적으로 불러 영상 공개를 지시했다. 당시 이와야 장관은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중시하며 난색을 표했으나 아베 총리의 한 마디로 방침이 바뀌었다. 아베 총리와 이와야 장관이 만난 날은 양국 국방당국이 두 시간 동안 화상회의를 진행한 날이다. 당시 양측이 해결 방안 모색을 위해 꾸준히 소통하자고 합의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이튿날 일방적 영상 공개로 양국관계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에 산적한 양국 간 갈등 현안의 해결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일본 언론들은 이날 “아베 총리가 최근 대법원 판결과 위안부 관련 재단 해산 등으로 화가 났다”는 자민당 관계자의 언급을 인용, 레이더 조사 논란이 불거지자 아베 총리가 폭발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아베 총리가 영상 공개를 지시한 것은 국내적으로 최근 악화한 한일관계를 통해 여론을 결집시키고, 국제적으로도 자국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소재로 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아베 총리는 최근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문호를 개방한 출입국 관리법 개정안 강행 처리와 관련해 지지층인 보수층 일각으로부터도 비판을 받았다. 이에 한일 외교 갈등을 부각시켜 극우ㆍ보수층을 중심으로 지지층 결집에 나섰다는 해석이 나온다. 지난 2010년 센카구(尖閣ㆍ일본명 댜오위다오) 열도 주변에서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과 중국 어선이 충돌했을 당시 정부 대처에 대한 비판이 높았던 사실을 의식한 측면도 있다. 당시 민주당 정권은 관련 영상을 공개하지 않았으나, 해상보안청 직원이 인터넷에 유출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아베 총리는 이에 “공개했어야 할 영상을 공개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또 방위성이 공개한 영상은 일본어뿐 아니라 영어로도 자막을 입혀 유튜브에 공개됐다. 당시 상황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는 영미권에선 한국 측이 국제법을 준수하지 않은 것처럼 인식될 가능성이 크다. 지난 10월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 때처럼 자국의 해외공관 등을 통해 해외 언론과의 인터뷰를 지시하는 등 국제 여론전에 나선 것과 유사한 행보다.
일본 언론들은 방위성이 공개한 영상과 관련해 △광개토대왕함과 북한 어선이 가까이 있어 화기 관제 레이더를 활용한 수색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 △국방부의 해명처럼 당시 날씨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는 점 △일본 초계기의 호출에도 광개토대왕함이 응답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한국의 해명을 적극 반박했다.
그러나 논란의 핵심이자 결정적 증거인 레이더 주파수 데이터를 공개하지 않았다는 국방부의 지적에는 “기밀인 관계로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지지(時事)통신은 방위성 간부의 언급을 인용해 “어느 정도 정확하게 전자파를 수신했는지는 초계기의 능력에 관한 사항으로 공표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레이더 주파수를 공개할 경우 일본 초계기의 감시 능력을 공개하는 것인 만큼 밝힐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일본 측 주장대로 화기 관제 레이더를 탐지했다는 사실이 기장과 대원들의 대화에 의한 것일 뿐 레이더파의 음성이 삭제됐다는 이유로 영상의 증거능력이 불충분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앞서 국방부는 일본 초계기가 탐지했다는 화기 관제 레이더의 주파수를 공개할 것을 요구했으나 일본 측은 수용하지 않았다.
해상자위대 소장 출신인 이토 도시유키(伊藤俊幸) 가나자와(金澤) 공업대학 도라노몬(虎ノ門)대학원 교수는 아사히(朝日)신문에 “자위대의 능력과 관계된 것으로 (레이더파 음성을) 지웠겠지만 일본 측의 주장의 근거로서는 약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도쿄(東京)신문 인터뷰에서도 일본 초계기가 저공비행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조사 당했다는 전파를 변화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편집해서 날조했다고 지적 받았을 때 반박하지 어렵다”면서 “방위성은 당시의 음성을 전체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쿄=김회경 특파원 herm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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